이정록
20. 초곡주막(草谷酒幕)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길손들의 원활한 여정을 위하여 원우의 활성화를 꾀하려고 다각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17세기를 전후하여 원우는 이 땅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원(院)이 퇴락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가 주막(酒幕)의 등장 때문이라고 하지만, 원은 국가의 정책에 의해서만 운영해야하는 한계가 있고, 유동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급격하게 늘어나는 유동인구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 퇴락의 주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원은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고 「주막」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숙박 시설에게 원우 본연의 기능을 넘겨줘야만 했다.
주막은 날로 늘어가는 유동인구의 증가에 힘입어 몫이 좋은 곳부터 어렵지않게 주막의 영역을 넓혀만 갔다. 국가 시책에만 의존했던 원우와는 달리 주막은 개인의 영리 목적으로 운영되었기에 주막의 위치가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대로변 요충지,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 이를테면 몫이 좋은 곳이 주막 경영의 필수 조건이었다.
새재는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영남대로 중 주막 경영의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의 조령성지도에 동서문(지금의 제1관문인 주흘관) 안쪽으로 주막촌이 그려져 있는데 초곡주막(草谷酒幕)이라고 표기하였다.
이곳은 새재길이 시작되는 들머리라 새재길 중에서도 가장 몫이 좋은 곳이었으므로 주막들이 밀집하여 주막촌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새재에는 해동지도에 그려져 있는 새재 들머리의 밀집해있는 주막촌을 시작으로 조령원터 주변과 동화원 주변에도 꽤 많은 주막들이 성업을 했을 것으로 추증하고 있다.
새재 고갯길에는 바쁜 길을 가야하는 사람들과, 풍류를 즐기려는 풍류객, 시도 때도 없이 넘나들던 보부상, 옥색 고운 도포를 차려입은 선비님들, 이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넘었던 고갯길이었다. 이런저런 사람들로 새재 주막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새재 주막은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따뜻하게 포옹해야만 했다.
주막은 이렇게 집을 떠나서 길을 가야하는 길손들에게만 필요한 숙박시설의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역 주민들의 고달픈 삶에 맺힌 회한을 한잔 술로 곁들이며 울분을 삭이던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기도 하였다. 아무튼 주막은 원우의 단순한 숙박시설의 기능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었고, 주막이라는 이름에서 상상할 수 있듯이 숙박 기능과 주점의 기능 그리고 식당의 기능이 복합된 형태인 셈이다.
또한 주막은 주막을 운영하는 주체가 주모라는 여인이라는 점에서 원우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또 다른 매력을 느끼는 곳이기도 하였다. 주막은 보행에만 의존해야했던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사막 속에서 오아시스를 연상할 만큼 또 다른 인생살이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양에서 과거가 열리는 때에는 청운의 꿈을 품은 영남지방의 선비님들로 새재 골짜기가 넘쳐났다고 한다. 새재일원에 산재해있는 주막들은 물론 푸실의 모든 민가에서도 과거길 손님을 받아야 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재라고 하여 항상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은 아니었다. 엄동설한 새재 골짜기에 눈이 내려 쌓이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적막강산이 된다. 새들도 넘기 힘들어서 새재(鳥嶺)라고 하였다는 새재의 본색이 이때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눈 내린 겨울 날 율곡 이이 선생께서는 새재 주막에서 머물며 지으신 7언 율시 한 편이 「율곡전서 권1」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숙조령(宿鳥嶺)
登登涉險政斜暉 <험한 길 오르다보니 어느 듯 석양인데> 小店依山汲路微 <산 아래 주점 물 기르는 길조차 아득해> 谷鳥避風尋樾去 <골짜기 새는 바람 피해 숲을 찾아들고> 邨童踏雪拾樵歸 <마을 아이는 눈길에 땔나무 주워 가네> 羸驂伏櫪啖枯草 <말은 마판에 누워 마른풀 씹고 있고> 倦僕燃松熨冷衣 <숯불에 찬 옷을 다림질하는 노복은 게으르기만 하고> 夜久不眠群籟靜 <잠들지 못한 밤은 참 고요도 한데> 漸看霜月透柴扉 <싸늘한 달빛만이 사립문을 비추네.>
급한 것도 그래서 서두를 것도 없는 느긋한 여정인 듯 마음의 여유가 절로 넘쳐나는 시 한 편이다.
새재 주막들은 이럴 때만은 한적한 산사처럼 적막이 감돈다. 하늘에서 눈이라도 사뿐사뿐 내리는 날은 새재의 주막들은 주막이 아닌 먼 얘기 속에 나오는 꿈 속 같은 아늑한 풍경으로 변모를 한다.
새재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주변 경관이 빼어나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승지였다. 시인 묵객들은 풍광이 수려한 새재 주막에 머물면서 주옥같은 많은 시를 남겼다.
서애 대감(유성룡)은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하사받고 상경을 하면서 새재 주막에서 하루 밤을 보내면서 5언 율시 한편을 읊조렸다.
숙조령촌점(宿鳥嶺村店)
消小林風起 <살랑 살랑 봄바람 불어오고> 冷冷溪響生 <졸졸졸 시냇물 소리 들려오네> 幽懷正迢處 <나그네 회포는 끝이 없는데> 山月自分明 <둥근달 산위로 둥실 떠오르네> 浮世身如寄 <덧없는 세상 잠깐 머물 곳인데> 殘年病轉嬰 <늘그막이라 병 또한 끊이질 않네> 南來還北去 <남으로 왔는데 다시 북쪽으로 가야만하지> 籫笏愧處名 <조정의 높은 벼슬 내겐 부끄러워>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져간 풍물도 많지만 주막 역시 세월 속에 묻혀버린 풍경 중의 하나다. 막걸리 한 사발을 앞에 놓고 낯 선 사람과 낯선 곳에서 이런 저런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하며 안주삼아 주모에게 던지는 한 두 마디 농담에서 회포를 풀고 위안을 삼아야했던 주막 풍경도 이제는 옛 얘기일 뿐이다.
보행에만 의존해야했던 시대에서 자동차가 질주하는 시대로 바뀌면서 초곡 주막들도 사양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해동지도의 조령성 지도에 그려져 있던 동성문 안쪽 새재 길 양편으로 주막촌을 이루었던 초곡주막촌(草谷酒幕村)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은 선정비가 기다랗게 늘어섰을 뿐 그 옛날 번성했던 주막의 흔적은 조그마한 것조차 남기지 못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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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장소가 주막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으로 예전에는 길을 나섰다가 들르는 곳이 주막이었습니다. 한끼를 해결하거나 날이 저물어 하룻밤 묵을 곳이 필요할 때 찾아드는 곳이 주막이지요.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이 묵어가던 곳. 죽령은 과거시험에서 죽 미끄러질까봐 안 가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과거에 낙방할까봐 못가고 문경(聞慶)이라는 지명처럼 경사스러운 소식을 들을까 하는 한줄기 희망을 안고 넘던 고개라는 문경새재. 그곳에는 여러 지역의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나랏님에 대한 소식이나 세상사에 대한 소식도 들을 수 있고 제각각인 사람들의 모습과 다양한 직업으로 먹고사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니 주막에 들러 부뚜막 가마솥에서 주모가 퍼주는 뜨끈한 국물에 밥을 한술 말아 따뜻하게 속을 채우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