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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문경새재(19) 원터(院址) /이정록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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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령원터(사진 문경시)

문경새재(19)


이정록



19. 원터(院址)

 원은 원우(院宇)라고도 하는데 먼 길을 떠난 나그네들을 배려하기 위한 숙박 시설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피로에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곳으로 먼 길을 가야하는 길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시설이다.

 원의 유래는 고대국가 체제가 확립되면서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길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문헌상에 나타난 최초의 원은 「신증 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역원조에 8세기 중엽, 경주 대로원(大櫓院)이 존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양촌 권근 선생의 견탄원루기(犬灘院樓記)에 의하면 나라에서 역을 두어 사명을 전하고 원을 두어 상인과 여행자들에게 혜택을 주었으며, 중국에는 5리마다 단정(短亭)을, 10리마다 장정(長亭)을 두어 집을 떠난 백성이 노중에서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역의 역할은 중앙과 지방간의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물자를 운송하며 사신의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및 숙박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여 공무수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제도로써 관리를 두어 운영하였다.

 각 지방의 역도(驛都)는 종 6품인 찰방(察訪)이, 역도에 소속된 역에는 종9품의 관원인 역승(驛丞)이 파견되어 업무를 담당하였다. 역은 주요 국도변에 30리마다 설치하였으며 우리가 종종 쓰는 ‘한참’(一站))이라는 말이 역과 역의 거리인 30리를 이르는 말인 것이다.

 하지만 원(院)은 순전히 백성들의 편의를 위하여 설치 운영되었다. 원은 대로변 요충지나 고개 또는 하천변 등에 설치되었는데 대략 10리 안팎의 거리를 유지하였다. 

 고려 후기의 정치적 불안과 홍건적의 침입, 왜구의 창궐 등으로 인하여 전국 도처의 원들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퇴락되거나 아예 혁파(革罷)되었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원우에 관심을 두었다. 태조 6년에 편찬한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원은 보수, 원주의 차임, 원우의 유지에 관한 여러 기록들이 있고, 세종 7년에는 각 고을에 명하여 승속(僧俗)이나 착한 사람을 원주로 삼고, 도로 보수와 산불방지 등에 힘쓰게 하여 행인의 불편을 돕도록 하였다.

 세종 10년에는 원주(院主:원의 관리 책임자)에게 잡역을 면제하였으며, 세종 22년 변방인 평안도 회천에서 어연에 이르는 구간의 원우를 특별히 보수하도록 명을 내렸다. 또한 경국대전에 원주에게 지급되는 원위전은 자경무세이며, 대로변에는 1결 35부. 중로에는 90부. 소로에는 45부를 지급토록 하고 보인(保人) 3명씩을 두게 하고, 타역에 종사하지 못하고, 오로지 원우 일에만 힘쓰도록 하는 등 원우에 관한 규정을 두어 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제도적 뒷받침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전국의 원의 총 수효는 1309곳이며, 문경에는 11곳(동화원, 조령원, 초곡원, 요광원, 관음원, 회연원, 곶갑원, 견탄원, 불정원, 개경원, 보통원)이 있었으며, 새재에도 고개마루턱에 동화원을 시작으로 중간쯤에 조령원, 새재 입구에 초곡원(일명 화봉원)이 있었다.

 조선조 초기부터 원우의 활성화를 위하여 제도적 뒷받침을 하는 등 다각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급격히 퇴락하여 결국엔 대부분의 원우가 이 땅에서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천여 곳이 넘는 원우가 이제는 옛 문헌에나 남아있으며 원이 있었던 지역에 원의 이름이 지명으로 굳어져 전하는 것이 원우의 흔적이라면 흔적일 것이다.

↑↑ 조령원터(사진 문경시)

 원우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곳은 새재의 조령원(일부에서는 이곳이 동화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함) 한 곳이다. 주흘관과 조곡관 중간쯤에 주변이 다른 곳에 비하여 비교적 평탄하고 널따란 곳에 조령원터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문경읍 상초리 447-1번지다. 초곡천 개울을 따라 이어지는 새재길 동편에 성곽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돌담장이 조령원터이다. 동서 담장의 길이가 길고, 남북 담장의 길이가 짧은 직사각형에 가까운 원터의 돌담장 안의 면적은 600평 가량이다. 서쪽 담장이 새재길과 접하여있고 담장 중간쯤에 방형석주 형태의 석문이 있다. 성곽이라고 하여도 손색이 없는 3m 높이의 돌담으로 둘러쳐진 조령원터의 축조 연대는 기록으로 전하는 바가 없다.
 
↑↑ 조령원터(사진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의 작성(鵲城)의 형태가 출입문이 방형석주(方形石柱) 형태의 석문(石門)이며 돌담을 엇물리게 축조한 점 등이 서로 비슷하여 동로의 작성과 같은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동로의 작성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동로에 피난 왔을 때 작장군이 쌓았다는 설화가 전해 오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성곽으로 규정하고 있다.

 조령원지 유적 발굴을 두 차례에 걸쳐 실시했는데, 조선조 자기편과 고려시대 청자편, 그리고 신라의 토기류가 함께 출토되었다. 동로의 작성 축성과 조령원지 발굴 조사를 종합하여 고찰해본다면, 조령원은 삼국시대 때 이미 개설되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조령원지 발굴조사에서 대장간 터가 발견되었는데, 대장간 터 주변으로 농기구와 사냥도구 어망의 추(錘)가 출토되어 조령원은 단순한 원의 기능뿐이 아닌 시골 장터 같은 역할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령원은 새재를 넘나드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숙식을 제공하고 편안히 쉬어가는 안식처로써 기여한 공이 지대하다. 구한말까지만 하여도 조령원터 돌담장 안에는 큰 기와집 여러 채가 존재하였으나,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건물을 모두 파괴하여 지금은 빈 터만 덩그마니 남아있다. 

 조령원은 천 년이 훨씬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덩치 큰 돌담장으로 새재를 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적떼와 산짐승으로부터 보호를 해주었듯이, 다가오는 천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동안은 새재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덩치 큰 돌담장의 위용을 두고두고 자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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