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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계 김득배 생거지 비 제막식(2017년 12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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悲運의 高麗忠臣 金得培 장군(3), 七百年만에 제자리 찾아 生居地碑 세우다
이창근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문경)
Ⅳ. 金得培 장군 七百年만에 제자리 찾아 生居地碑 세우다
❙建立 經緯
고려말 공민왕(恭愍王)때 중국(中國) 홍건적(紅巾賊) 20만(萬) 대군(大軍)이 침입해 와 고려 오백년 사직이 망국(亡國)의 위기에 놓였을 때 구국(救國)의 전장(戰場)에서 난(亂)을 평정하여 큰 공(功)을 세운 장군(將軍)이 있었으니 김득배(金得培)이다.
김득배(金得培) 장군(將軍)은 지금까지 현(現) 상주시(尙州市) 낙양동 유허비터가 그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고, 또 상주시 외서면 관동리 깃골, 상주목 산양현 깃골 또는 상주목 용궁현 깃골, 영강빈 깃골 출생으로 기록된 곳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문경에서도 그 지역이 불확실하고 검증되지 않아 상주(尙州) 출생 인물로 인증(引證)되어 사실상 정작 문경에서는 그의 존재마저 잊혀지고 묻혀버린 상태였다.
전날 밤 꿈에 썩은 시체를 등에 업고 밖으로 나오는 꿈을 꾸고 난 이튿날인 2010년 3월 15일 향토사가 이창근이 우연히 상주의 김명균(金明均, 상주김씨尙山金氏 33세손世孫)을 만나면서 선조(先祖) 김득배(金得培) 장군이 흥덕 깃골 출생자라고 함으로써 6년여의 끈질긴 조사로 그가 상주 출생이 아니고 현(現) 문경시 흥덕동 깃골(箕谷, 龜谷) 출생 임이 확실하게 밝혀졌다.
우선 그의 출생지 깃골에 생거지비(生居地碑)를 건립(建立)할 것을 이창근이 문경시에 발의(發意)하여 칠년(七年)이라는 긴 세월, 우여곡절 끝에 (오히려 문경의 사학계, 시청 관계자들이 증거를 내놓으라고 부정하는 바람에) 김명균의 자료제공, 김장희 상산김씨 대종회장(大宗會長_, 김상흠, 김영호 서울 파조대표(派祖代表), 김윤순, 김우균 후손(後孫)들의 적극적인 조언(助言)과 증언(證言)을 토대로 2017년 6월 13일 김득배(金得培) 생거지비건립추진위원회(生居地碑建立推進委員會)를 결성했다.
안장수 전(前) 문경선거관리위 사무국장이 실무(實務)를 맡아 선생(先生) 출생 칠백년(七百年)만에 제자리를 찾아 문경시의 후원(後援)으로 2017년 12월 5일 출생지(문경시 흥덕동 389-1번지) 깃골(기곡 箕谷)에 난계 김득배 선생 생거지비를 건립하고 역사적인 제막식을 가졌다.
건립추진위원회(建立推進委員會) 위원장(委員長)은 이창근(李昌根)이고 위원(委員)은 최병식(崔昞植), 김학모(金學模), 채대진(蔡大鎭), 이창교(李昌敎), 현한근(玄漢根), 고영조(高永照), 채희영(蔡熙永), 권영하(權永河), 김종수(金鐘洙), 이욱(李旭), 조시원(曺時元), 고성환(高性煥), 안장수(安章守), 정규화(鄭圭和), 김정자(金正子), 김용제(金用濟), 장제삼(鄭在三) 등이다.
개막식에서 이창근 위원장은 “난계 김득배 선생이 700년 만에 제자리를 찾아 비를 세우고 누명으로 미흡하게 드리워진 역사인식을 바로 인식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했다.
비록 소박한 제막식이지만, 이 작은 나비의 날개짓이 공께서 다시 한번 이 세상에 태어나는 불씨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선생의 출생과 성장지가 상주가 아니고 바로 문경시 흥덕동 깃골 여기 이 마을임을 세상에 알린다고 했다. 또 국가의 존망이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20만 대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하고도 전공을 시기한 간신의 모함으로 죄인의 누명까지 쓰고 구천지하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선생의 누명을 벗겨드리고 그 위업을 올바로 인식하고 재조명하는 뜻깊은 시간의 자리라고 했다. 정작 문경에서는 산양현 깃골, 용궁현 깃골로 기록되어 위치마저 불투명한 상황에서 칠백년이란 긴 세월을 표지석 하나도 없이 방치한 것이 사실이며, 어쩌면 이 중대한 역사적 대사안이 영원히 묻혀 버릴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고윤환 문경시장은 축사에서 “예부터 인걸은 지령(地靈)으로 태어난다 했습니다. 우리 문경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대왕과 문광공 홍귀달 선생, 청대 권상일 선생 등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지역입니다. 이외에도 고려시대 백련결사로 유명했던 천책(天頙) 스님과 조선시대 불교 중흥에 힘쓴 괄허(括虛) 스님도 모두 우리지역 출신입니다. 난계 김득배 선생도 바로 이곳 흥덕 깃골에서 출생한 난세 영웅이었습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에 처한 고려를 위기에서 구해 낸 불세출의 영웅이셨습니다. 이러한 분의 출생지가 우리 문경이라는 것이 한없이 자랑스럽습니다. 이는 우리세대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세세대대로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져 이 지역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 훌륭한 인물이 지속적으로 배출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더욱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비가 건립되기까지 이창근 건립추진위원장님을 비롯한 여러 위원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고 했다.
문경시의회 김지현 의장도 축사에서 “난계 김득배 선생의 생거지 비 제막으로 우리 문경은 호국의 고장으로써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것이며, 오랜 시간이 흘러 잊혀질 뻔한 역사적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줌은 물론 고려 말 어려운 시기 국란을 극복하는데 이바지한 큰 인물 난계 김득배 선생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고려를 지키고자했던 정몽주와 교유한 것으로 보아 선생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단면으로 우리 고장의 자랑스런 인물로 우뚝 자리매김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현한근 문화원장은 “난계 선생께서 태어나고 자라신 자리에서 포은 정몽주 선생이 난계 선생의 충혼장백을 기리듯, 문무를 겸전하시고 홍건적을 물리치신 공훈을 되새기며 늦게나마 비문에 그 뜻을 새겨 현향하고저 한다며 홍건적 난을 맞아 도병마사라는 군사 총책임자로서 큰 전공을 세우신 난계선생 생거지에 비를 세우게 된 것은 우리 문경 역사의 귀감이 되고, 고려문화의 역사의 현장을 온 국민께 알리는 시발점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후손을 대표한 상산김씨 김기식 대종회장은 축사에서 “이 기념비를 건립(建立)함으로써 예향(藝鄕)인 문경이 난계(蘭溪) 선생의 태지(胎地)임을 사방에 알리고, 덧붙여 선생의 공적(功績)을 기림으로서 현존(現存) 후세대에게 지역의 자부심을 일깨워주고, 또한 고려말(高麗末) 이러한 우국충신(憂國忠臣)이 이 지역에 계셨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Ⅴ. 高麗 政堂文學 金得培 先生 生居地 碑 碑文 고려 정당문학 김득배 선생 생거지 비 비문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이곳은 속리산(俗離山) 갈령작약지맥(葛嶺芍藥地脈) 돈달산(遯達山) 동쪽 끝자락, 영강수(潁江水) 굽이돌아 명당(明堂)을 이룬 곳 깃골(箕谷, 龜谷)이라 이르니 고려충신(高麗忠臣) 김득배(金得培) 장군(將軍)이 태어나시고 성장(成長)하신 생거지(世居地)로다.
선생(先生)의 호(號)는 난계(蘭溪)이며 자(字)는 국자(國滋),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니 상산김씨(商山金氏)의 시조(始祖) 보윤공(甫尹公) 휘(諱) 수(需)의 십일세손(十一世孫)으로 문충공파(文忠公派)의 파조(派祖)가 되는 분이시다. 조부(祖父)는 상락군(上洛君) 일(鎰)이며 조모(祖母)는 김만궁(金萬宮)이다.
고려(高麗) 충선왕(忠宣王) 4년(四年.1312) 임자(壬子)에 아버지 상성군(商城君) 록(祿)과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 사이에 득배(得培) 득제(得齊) 선치(先致) 삼형제(三兄弟) 중 맏이로 태어나 배위(配位)는 서흥김씨(瑞興金氏)이며 슬하에 여식(女息) 다섯을 두었다. 이 마을에서 득배 삼(三)형제가 자라났다는 사실이 밝혀진 일은 영조(英祖) 32년(三十八年) 이 마을 이연원(李延元)의 집 우물에서 선치(先致)가 학동시절 사용하던 벼루가 수습되고 부터다.
선생(先生)은 약관 18세(十八歲)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각부령(典客副令)으로 강릉대군(江陵大君) 입원시(入元時) 10년간(十年間) 호종(扈從) 숙위(宿衛)하였으며 1351년 강릉대군이 공민왕(恭愍王)에 즉위하자 좌부대신(右副代言)이 되었으나 반원정치개혁(反元政治改革)에 부담을 느낀 권신(權臣) 조일신(趙日新)의 무고(誣告)로 낙향한 후 깃골에서 4년(四年)을 지내면서 유현(儒賢)들과 교유하고 개혁의 의지를 다지던 중 수차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추밀원(樞密院) 직학사(直學士)에 오르고 서남면(西北面) 도순문사(都巡問使) 상만호(上萬戶)가 되었다.
공민왕 8년(八年) 12월(十二月) 사만여(四萬餘) 홍건적(紅巾賊)이 내침(來侵)하자 도원수(都元帥)의 명(命)을 받고 방어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서경(西京)이 함락돼 공민왕 9년(九年)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 제장(諸將)과 협조(協謀)하여 적(賊)을 전멸시키고 서경(西京).함종(咸從)을 탈환하니 왕(王)은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을 사(賜)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除授)하였다. 동년(同年) 10월(十月)에 지책거(知貢擧)가 되어 정몽주(鄭夢周) 임박(林樸) 문익점(文益漸)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공민왕 10년(十年) 10월(十月) 홍건적(紅巾賊) 20만(二十萬) 대군(大軍)이 재침(再侵)함에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되어 안우 이방실과 이를 방어했으나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국토가 초토화되고 고려사직이 존망(存亡)의 위기에 처하니 공민왕이 복주(福州, 안동安東)까지 몽진(蒙塵)하고 상주(尙州)에 머물면서 문경(聞慶) 주흘산(主屹山)에 피신하였다. 선생(先生)은 공민왕 11년(十一年) 정세운, 안우, 이방실과 최영, 이성계 등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출정(出征)하여 홍건적(紅巾賊)을 완전 소탕하여 난(亂)을 평정(平定)하였다. 두 아우 상산군(商山君) 득제(得齊), 낙성군(洛城君) 선치(先致)도 뛰어난 장군(將軍)으로 개경 탈환전에 참전하여 국가위망지제(國家危亡之際)에 수창대의(首倡大義)하사 극복(克復) 구국지업(救國之業)하시니 세칭(世稱) 3원사(元帥)라! 청사(靑史)에 빛나도다. 선생(先生)은 지략(智略)이 특출한 문무겸전(文武兼全) 유장(儒將)으로 분전토적(奮戰討賊) 하였으니 그 공(功)이 지대(至大)함은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영원불변(永遠不變) 하오리다.
이때 총병관(總兵官) 정세운(鄭世雲)과 세력(勢力)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金鏞)이 유공자(有功者)들을 시기하여 왕(王)의 밀지(密旨)라고 거짓 조서를 꾸며 안우와 이방실로 하여금 총병관(總兵官)을 살해케 하였으니 안우와 이방실은 김득배(金得培)를 끌어 들이려 하였으나 단호하게 반대하고 만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서를 믿고 총병관(總兵官)을 유인하여 장사(壯士)를 시켜 타살(打殺) 하였다.
김용(金鏞)은 안우와 이방실이 주장(主將)을 살해했다고 왕(王)에게 고(告)해 안우와 이방실을 타살케 한 다음 김득배(金得培)를 살려두면 거짓이 탄로 날까 두려워 동류(同類)로 누명을 씌워 체포케하니 대역간신(大逆奸臣) 하수인(下手人) 정지상(鄭之祥) 등에 의해 영순면(永順面) 원호동(遠湖洞) 선대(先代)의 묘막(墓幕)에 피신했다가 압송돼 상주 병성(屛城)에서 모살(謀殺)되니 천추만고(千秋萬古)에 원한(怨恨)이라. 세수(歲壽) 51세(五十一歲) 공민왕 11년(1362) 3월(三月) 1일(一日) 큰 별 지다.
선생(先生)의 문인(門人) 포은 정몽주는 공민왕에게 주청(奏請)하고 시신(屍身)을 염습(殮襲)하여 상주 남쪽 십리허(十里許)에 안장하고 제문(祭文)과 만시(挽詩_를 지어 장사지냈다. 포은이 영전(靈前)에 바친 제문(祭文)은 가위(可謂) 자자혈루(字字血淚)로서 어찌하여 말머리에 땀도 마르기 전에 태산같은 공로가 있는 사람을 피로 칼날을 적시게 하였는가? 충혼장백(忠魂壯魄)이 구천지하(九泉地下)에서 피눈물을 마실 것이라 하였으며 사문(師門)의 순도적(殉道的) 죽음은 조선조 오백년(五百年)을 회통(回通)하는 충절의 피를 선죽교에 뿌리는 모태(母胎)가 되었다. 그 후 김용(金鏞)의 간계(奸計)가 탄로나 공(公)의 무고(無辜)함이 밝혀졌음에도 선왕(先王)의 허물이라 미뤄오다가 왕계(王系)가 바뀐 공양왕에 이르러 상락군(上洛君)에 봉군)封君되고 신원(伸寃)이 되었으며 조선조 세종 연간에 양성지(梁誠之)의 상소로 문무겸전의 극칭인 문충(文忠)의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국란극복 16공신(十六功臣)으로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다.
공(公)의 천수(天壽)가 꺾이지 않았던들 고려의 국운(國運)과 역사(歷史)는 바뀌었을 것이니 아- 애석하고 원통하다! 적난분탕(賊亂焚蕩) 속 누명까지 쓰고 자취 묻혔으니 이 비(碑) 건립으로 그 위업(偉業) 올바로 인식되고 재조명(再 照明)되는 계기가 되어 공(公)께서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는 불씨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공(公)은 홍건적(紅巾賊) 침입으로 나라의 존망(存亡)이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위망지제(危亡之際)에 분전토적구국(奮戰討賊救國)하사 그 위업(偉業)과 충혼(忠魂)을 높이 받들고 현창(顯彰)해야할 역사적(歷史的)인 인물(人物)로서 국가적 차원으로 민족정신 교육의 귀감(龜鑑)이라 문경시(聞慶市)의 후원(後援)으로 문경인(聞慶人)의 뜻을 모아 이 (비)碑를 세운다. 2017년(二○一七年) 정유(丁酉) 십이월(十二月) 오일(五日) 건립(建立) 國史編纂委員會史料調査委員 鄕土史家 李昌根 謹撰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향토사가 이창근 근찬 三十一世孫 耕巖 金浩植 謹書
31세손 경암 김호식 근서 高麗 政堂文學 金得培先生 生居地碑 建立委員會 謹竪 고려 정당문학 김득배선생 생거지비 건립위원회 근수
高麗忠臣 金得培 先生 生居地碑 建立記 詩 고려충신 김득배 선생 생거지비 건립기 시 이창근(李昌根)
선생과 나 어찌하여 연을 맺어 先生與我豈緣親(선생여아기연친) 밤낮으로 애절한 통한의 심사 금할 길 없네 晝夜戀情無禁眞(주야연정무금진) 이일 알고 지난지 칠년 세월 되었는데 知得於焉當七歲(지득어언당칠세) 쉬울 듯 어렵고 맺고 헤어짐이 오래 되었네 易難結解歷多晨(이난결해역다신) 시신을 등에 업고 나온 꿈은 屍身負背彷徨夢(시신부배방황몽) 바야흐로 이것이 하느님의 계시일세 方此皇天啓示因(방차황천계시인) 세상사 어렵지 않은 일 없다지만 世事不難何莫在(세사불난하막재) 지친 나 참고 견디기엔 기운이 다빠져 버렸네 疲吾忍耐氣渾淪(피오인내기혼륜) 완결이 목전에 와 있음을 느끼는데 目前完決感知際(목전완결감지제) 의기 소침하여 원망만 거듭될 뿐이네 意氣消沈怨望申(의기소침원망신) 청사에 기리 남을 이 위업을 靑史長傳斯偉業(청사장전사위업) 나약한 나에게 어찌 홀로 맡겨 두는고 衰吾豈但獨任陣(쇠오기단독임진)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되어 한탄만 나오는데 乖違甚誤恨嘆發(괴위심오한탄발) 이런 일은 관청에서 맡아서 해야될 일이 아닌가 此不官廳擔任伸(차불관청담임신) 큰 업적 어느 누구가 초안자 인가 丕績何誰初案者(비적하수초안자) 이름 석자 기리 남기를 다만 바랄 뿐이네 姓名永剩但望人(성명영잉단망인) 고려말 풍전 등화같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麗端燈火甚危際(여단등화심위제) 나라를 구하였는데도 누명을 써 원혼이 떠다니는데 救國陋名寃魄巡(구국누명원백순) 이러한 충신을 온 민족이 다 어찌 알지 못하는고 盍識忠信渾族摠(합식충신혼족총) 창근이 오직 홀로 실행에 옮길 따름일세 昌根惟獨實行臻(창근유독실행진)
헌시[獻詩]
충혼의 꽃으로 피었노라 월석(月夕) 강상률 - 난계 김득배 장군 생거지비 제막식 기념에 부쳐
역사의 이끼에 가려진 난세 속에 어둠을 뚫고 밀어낸 존망의 위기에 처한 국난을 평정하여 고려 사직을 구한 장군은 청사에 빛나는 한 시대의 영웅이었습니다.
굴절된 바람의 흔적마다 위기를 극복한 불세출의 명장으로 모함을 딛고 사직 공신에 재조명 됨은 충혼장백의 숭고한 위업을 역사에 새긴 그 빛의 이름이 우리 곁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목마른 산천을 품은 땅 끝까지 격변의 그림자 머문 터전 위에서 새 천년 횃불 밝혀 불씨를 피웠던 불멸을 향한 전설 속 붉은 깃발을 달고 천하를 호령하던 장군의 외침이 가까이 들려옵니다. 문경 깃골에 서린 장군의 기백은 이 땅에 뿌리 내린 불기둥 되어 주흘산 높은 기상되고 영강물 깊은 흐름되어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나니
마지막 꿈에서 깨어나 밀알이 썩어 새 열매를 맺는 우국충정 깃든 영혼의 길목에 의연히 일어서 하늘 우러러 헤아려보는 광야에 핀 충혼 거룩한 숨결의 넋이어라
바람 가는 길을 묻는 숨겨진 자리에 명예회복을 위한 운명적 만남을 이룬 절개 높은 의로운 포은의 충절을 익힌 향토사가 이창근 선생의 숨은 헌신으로 소리 없이 방황했던 역사의 진실을 찾아
어둠 속 슬기로운 햇살 솟구친 꺼지지 않는 장군의 시대정신은 핏빛 함성이 밝게 빛나는 별빛을 안고 새 하늘 여는 역사의 꽃으로 다시 피었노라 호국정신 높게 받드는 충혼의 꽃으로 피었노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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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가란 어떤 일을 하는 분일까를 생각하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나라를 구한 충신이라 하더라도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역사에서 가려졌던 분들을 그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6년여의 조사 끝에 지역 사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증거를 제시하여 마침내 생거지비를 원래의 장소에 세우도록 이끌어낸 그 노력에 마음깊이 탄복하게 됐습니다. 이창근 선생님이 썩은 시체를 등에 업고 밖으로 나오는 꿈을 꾸고 난 이튿날 김득배 장군의 후손을 우연히 만나 상주 출생이 아닌 문경시 흥덕동 깃골 출생임을 확인하신 것도 참 기이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인연을 소홀히 하지않고 오랜시간 연구하신 끝에 마침내 생가지비가 건립되어 뿌듯하고 자랑스럽습니다. 2017년 비를 제막했으니 벌써 8년 전의 일이지만 한 사람의 노력이 어떻게 역사가 되는지를 보여준 존경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비운(悲運)의 고려충신(高麗忠臣) 김득배(金得培) 장군, 칠백년(七百年)만에 제자리 찾아 생거지비(生居地碑) 세우다' 연재를 마칩니다. 이 내용은 집필자의 학술적인 견해로 다른 연구자와 견해차를 가질 수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