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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북 지역의 철비(鐵碑) 고찰(1)/전일주(경산)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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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지역의 철비(鐵碑) 고찰(1)


전일주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경산)


І. 머리말

본고는 한국에 현존하는 철비 가운데 경북 지역에 있는 쇠로 만든 비석[鐵碑]을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확인된 바로는 경북 지역에 11기가 있으며, 전국에는 100여 기(基)가 남아 있다. 경북에도 많은 철비가 존재했으리라고 추정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놋쇠나 철물들이 공출되어 사라지거나*, 근래 도시화로 인해 한순간에 분실되고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 군수 최현달 철비는 칠곡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군수물자의 용도로 공출되어 현재는 문헌상으로만 확인된다(팔거역사문화연구회, 2016). 경남 김해의 김성학 철비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수탈로 징발되었다가 용광로에 근무하던 김해김씨 김용숙씨에 의해 보호될 수 있었던 대표적인 예로서, 선조가 지켜낸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유물이다.
** 대구 동구의 이헌소 철비는 지역 재개발 당시 비각 혹은 안내표지판 등의 부재로 인한 관리 부주의로 분실되었음이 추측된다.

금석문 자료는 당대의 사회상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당대의 1차적 사료로써, 역사서에 적혀 있지 않은 사회상을 비춰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금석문 가운데 비석은 각종 기록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나무, 돌, 쇠붙이 등에 새겨놓은 것을 말하며, 철비(鐵碑)란 철을 재료로 하여 비를 조성한 것을 지칭한다. 철비는 옥외 철제문화재의 대표적인 사료이지만, 현존하고 있는 철비에 대한 조사가 적으며, 외부 노출에 의한 부식과 파괴, 소실의 문제가 있으므로 그 연구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철비에 대한 선행연구는 홍대한의 「朝鮮時代 鐵碑의 造營 硏究」가 대표적이다.* 이 논문은 조선왕조실록과 소설, 간찰 등 철비가 기록된 다양한 문서를 살펴 기록학적 의의를 밝혔으며 문서에서 언급된 철비의 건립 배경과 경상도 지역 철비로는 26기의 형상과 해설이 있다. 이는 철비의 인문학적 접근으로 학계에 존재성을 알리는 근간이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기록학적 연구는 철비의 연원과 제작 배경을 학습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만 금석학적인 접근에서 소재 파악과 실측, 내용적인 부분의 해석이 다소 부족한 편이다. 이외에 경북 지역의 선정비로써 석비에 비해 수량이 적으나 철비의 존재를 언급한 논문**이나 전국적인 철비를 종합적으로 고찰한 논문***도 있다.

* 홍대한 「朝鮮時代 鐵碑의 造營 硏究」, 기록학연구, 2010, 220p
** 채광수 「조선시대 善政碑 건립 과정과 시기별 추이 :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영남대학교 2010.
*** 전성원 「한국 철비의 문화재적 가치와 보존과학적 연구」,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2023.

Ⅱ. 철비 분포 현황

경북에 분포하고 있는 철비 11기의 비명과 세부 위치, 제작연월의 목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북지역의 철비 현황표>
 철비명칭 철비명칭(한자) 소재지  제작연월
 1.영장 류춘호 영세불망비  (營將柳春浩永世不忘碑)  경주시 황성동 416 호림정  1893년 6월
 2.현감 홍로영 영세불망비  (縣監洪魯榮永世不忘碑)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160번지  1826년경
 3.현감 조병익 영세불망비  (縣監趙秉益永世不忘碑)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387번지  1872년 10월
 4.고판서 응와이선생 흥학창선비  (故判書凝窩李先生興學倡善碑)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 70번지  1875년 12월
 5.목사 윤자일 청덕선정비  (牧使尹滋一淸德善政碑)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198-3번지  1855년 5월
 6.순상 정기선 거사비  (巡相鄭基善去思碑)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 산39번지  1838년 10월
 7.내성행상접장 정한조 불망비  (乃城行商接長鄭漢祚不忘碑)  울진군 북면 두천리 230번지  1890년경
 8.내성행상반수 권재만 불망비  (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  울진군 북면 두천리 230번지  1890년경
 9.관찰사 홍우순 청덕애휼영세불망비 (觀察使洪佑順淸德愛恤永世不忘碑)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번지  1852년 11월
 10.현령 심해 유애선정비  (縣令沈瑎遺愛善政碑)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번지  1870년 11월
 11.현령 이용준 영세불망비  (縣令李容準永世不忘碑)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8번지 1859년 4월 


Ⅲ. 철비 내용 고찰

경북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철비 11기의 현황과 비문을 판독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장 류춘호 영세불망비(營將柳春浩永世不忘碑)
 
↑↑ 소재지|경북 경주시 황성동 416 호림정
크기|높이:113cm, 폭:30cm, 두께:3cm


┃원문┃
營將柳公春浩永世不忘碑(영장류공춘호영세불망비)
歛此大惠 雄鎭一麾*(감차대혜 웅진일휘)
裘帶多暇 冰蘗**自持(구대다가 빙벽자지)

口碑溢境 頂薌載路(구비일경 정향재로)
勒諸翁仲 寔出衆籲(늑제옹중 식출중유)
  崇禎 紀元五 癸巳 六月 日立(숭정 기원오 계사 유월 일 립)
  鄕都監 權達運(향도감 권달운)
  監官 金時憲(감관 김시헌)
┃해석┃
이처럼 큰 은혜를 베푸시어
우리 고을 경주를 다스리셨네.
한가로울 때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빙벽 같은 청렴한 마음 지니셨네.
백성들 입으로 칭송하는 소리 넘치며
곡식 가득 수확하여 길에 실어 나르네. 
비석을 세워 공덕을 새기노니
이는 백성들의 칭송에서 나왔다네.
  1893년 6월에 세우다.
  향도감 권달운, 감관 김시헌.
* 일휘(一麾) : 진(晉)나라 완함(阮咸)이 한 번 배척을 당해 수령으로 나갔다는 ‘일휘출수(一麾出守)’의 준말로, 외방의 관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文選????, 卷21 五君咏 阮始平
** 빙벽(冰蘗) :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소태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굳게 절조를 지키면서 청백하게 사는 것을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2. 현감 홍노영 영세불망비(縣監 洪魯榮 永世不忘碑)
 
↑↑ 소재지|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160번지
크기|높이:113cm, 폭:37cm, 두께:7cm


┃원문┃
縣監洪侯魯榮永世不忘碑(현감홍후노영영세불망비)
  崇禎 四 丙戌 月日(숭정 사 병술 월일)
  1826년에 세움
┃해설┃
홍노영의 선정비는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을 
지나면 선정비군 중에 있다. 1826년에 건립된 것으로 
비좌개석(碑座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비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비신의 앞면은 장방형 감실을 만들고, 
감실의 양각선(陽刻線)에 용린문(龍鱗紋)을 연속적으로 
만들었으며, 그 안에 글씨를 양각으로 주조하였다. 
뒷면은 감실을 만들어 비의 무게와 쇳물의 양을 줄였다. 
비석 머리는 팔작지붕 모양으로 단조롭게 표현하였다.


3. 현감 조병익 영세불망비(縣監 趙秉益 永世不忘碑)
 
↑↑ 소재지|경북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387번지
크기|높이:106cm,폭:32cm,두께:3cm


┃원문┃
縣監趙公秉益永世不忘碑(현감조공병익영세불망비)
壬申 十月 日(임신 십월 일)
  1872년 음력 10월에 세움
┃해설┃
조병익의 선정비는 봉서루(鳳棲樓) 우측 비각 안에 
있으며, 1902년에 아들 조기하(趙夔夏)가 비각 중수기를 
지었다. 1872년에 건립된 것으로 귀부하엽(龜趺荷葉)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귀부는 둥근 형태로 마치 두꺼비
처럼 생겼고, 거북이 등에는 화염문(火焰紋)이 있으며, 
비의 부식이 진행되고 있으나 판독이 가능하다.
비신의 앞면은 장방형 감실을 만들어 그 안에 글씨를 양
각으로 주조하였다. 비석머리의 전체적인 형태는 연꽃이다. 
그 정상에 연봉이 있고 안에는 중앙에서 좌우로 성장, 화생
하는 모습의 연화문을 매우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인물┃
조병익(趙秉益) : 진사로서 1886년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에 임명되어 옥당에서 호군 신환(申桓) 등의 
처벌을 요구하는 연차(聯箚)를 올렸을 때 함께 참가하였다. 
1890년 태묘효모전상책보시(太廟孝慕殿上冊寶時) 독금보관
(讀金寶官)으로 참례하여 가자(加資)되었다. 이듬해 식년문
과에 시관을 맡았다가 사소한 잘못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방송되었다. 이어 1892년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고, 1900년 
정릉·홍릉의 친제시(親祭時)에 겸장례비서승을 맡았다. 
1905년 장례원소경으로 임명되어 칙임관 4등이 되는 등 
왕실의 의례를 맡아 보았다.

4. 고 판서 응와 이선생 흥학창선비(故判書凝窩李先生興學倡善碑)

↑↑ 소재지|경북 성주군 가천면 신계2길 38
크기|높이:106cm, 폭: 31cm, 두께: 3cm
┃원문┃
故判書凝窩李先生興學倡善碑(고판서 응와 이선생 흥학창선비)
學貫天人 業著家邦(학관천인 업저가방)
晩節藏修 寓樂仁智(만절장수 우락인지)
刱我儒稧 牖我峽俗(창아유계 유아협속)
高行景行 百世仰德(고행경행 백세앙덕)
  儒稧諸生立(유계제생립)
  旃蒙淵獻(전몽연헌)
┃해석┃
학문은 천리와 인사를 꿰뚫었고
업적은 가문과 나라에 드러났네.
만년에 쉬지 않고 공부하며,
산[仁]과 물[智]에 즐거움 부쳤네.
우리 유계(儒稧)를 창시하여
좁은 숲속에서 나를 깨우쳤네.
높은 행실과 빛나는 행실이니
백세토록 그 덕을 우러러 보겠네.
  1875년 12월 유계(儒稧)의 여러 생도들이 세우다.
┃해설┃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 70번지 신계리 교동마을에서 갈골 마을로 가는 도로 중간쯤에 산림정화 구역인 포천구곡(布川九曲)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62호 만귀정 내에 있다. 만귀정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가 1851년 만년에 귀향하여 독서와 자연을 벗 삼아서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자연석 위에 세워진 비는 비신과 이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수에는 앞면에는 두 마리 용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태극문이 새겨져 있다. 비신에는 ‘고판서응와이선생흥학창선비’라고 새겨져 있다. 판서 응와 이원조가 학문을 일으키고 선을 주창한 비석이다.
철비 비문 뒷면에 旃蒙淵獻 十二月 日(전몽연헌 십이월 일) 1875년 음력 12월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인물┃
이원조(李源祚, 1792-1871)의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이다. 순조 9년(1809)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로 강릉부사, 제주목사, 경주부윤, 한성판윤 등의 외직과 병조참판, 대사간, 공조판서 등의 내직을 두루 거쳐 고종 8년(1871)에 종일품 숭정대부 판의금부사에 올랐다. 그는 가야산 포천계곡의 풍경을 읊은 ‘포천구곡(布川九曲)’의 마지막인 제9곡 홍개(洪開) 인근에 만귀정(晩歸亭)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흥학비(興學碑)는 가천면 신계동(新界洞)에 있는 만귀정 입구에 철로 주조되어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응와 선생이 자연을 벗 삼아 강학과 독서로 여생을 보낸 흔적이다.


5. 목사 윤자일 청덕선정비(牧使尹滋一淸德善政碑)
 
↑↑ 소재지|경북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198-3번지
크기|높이:90㎝, 폭:36㎝, 두께:4㎝


┃원문┃
牧使尹侯滋一 淸德善政碑(목사 윤후자일 청덕선정비)
一年治績 百里陽春(일년치적 백리양춘)
捐廩優老 輕傜賑貧(연름우로 경요진빈)
庚呼荒歲 子視編民(경호황세 자시편민)
有口皆碑 永世不磷(유구개비 영세불린)
  乙卯五月日 立(을묘 오월 일 립)

┃해석┃
일 년간 다스린 업적에 백 리 안이 봄빛이요.
창고를 덜고 노인을 우대하며
부역을 줄이고 가난한 이 구휼했네.
흉년이 들면 곡식을 빌려 왔고
편호의 백성들 자식처럼 돌보았네.
입 가진 이들이 모두 비석을 세우니
후세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
  1855년 음력 5월에 세움


6. 순상 정기선 거사비(巡相鄭基善去思碑)
 
↑↑ 소재지|경북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 산39번지
크기|높이:127cm, 폭:37cm, 두께:5cm


┃원문┃
巡相鄭公基善去思碑 (순상 정공기선 거사비)
  戊戌 十月 日 立(무술 시월 일 립)
  1838년 음력 10월에 세움
┃해설┃
도장리 동래 정씨 직제학 정사(鄭賜) 묘역에 있는 
철비이다. 이 철비 비명의 善자와 去자 사이가 부러져 
있어 버팀돌로 석탑의 옥개석을 이용하였다. 
이로 보아 도장리 일대를 절터로 추정할 수 있다.
┃인물┃
정기선(1784~1839)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원백 호는 수석이다. 한양 출생, 
경상감사, 이조참판을 거친 이후 예조판서까지 올랐다.
경상감사 시절 지역 연도 순시를 지보리 근처에서 하였
는데, 그때 세워진 비(순조29년)이다. 원래는 구마전
(마전리 교회근처)에 있던 것을 1934년 홍수로 무너져 
지보리 재실로 옮겼다가 다시 조상 산소 옆인 현재 위
치로 이전하였다.

[출처 향토경북 21집]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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