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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종루 |
| 칠곡 송림사(漆谷 松林寺)의 기원과 사적에 대한 고찰(6)
여환숙
13) 범종루(梵鐘樓)
이 종루는 불교의 사물(四物)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판(雲版), 목어(木魚)를 갖춘 이층구조의 누각이다. 정면 삼칸 측면 이칸의 주심포 양식의 금단청 겹처마 팔짝집이다. 기둥과 평방에는 초가리를 부착한 낙양각(洛陽閣)을 이루고 원주의 기둥에는 주련을 걸었다. 아래층에는 포교사, 사찰문화해설, 신행단체의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다.
범종루의 주련
願此鐘聲遍法界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 鐵圍幽暗悉皆明 철위산의 어두움이 햇빛처럼 밝아지고 三途離苦破刀山 삼악도는 고통 벗고 도산지옥 부숴지고 一切衆生成正覺 모든 중생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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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종루 현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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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석조유물(石造遺物)
사내의 석조유물은 신라시대 금당의 전각을 밝혔을 석등(石燈), 석탑부재(石塔部材), 배례석(拜禮石), 공양대(供養臺), 당간지주(幢竿支柱), 주초석(柱礎石), 대중공양을 위한 연구석(硏臼石) 등이 있다. 사찰의 후원에는 부도전과 팔공산송림사사적비(八公山松林寺事蹟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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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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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성대사비각(箕城大師碑閣)
기성대사의 비는 송림사 동편의 산기슭에 단칸 비각 안에 수비되어 있다. 비좌위에 비신 개첨석을 갖춘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양식으로 대사의 문도들에 의해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삼임진(三壬辰) 조선 영조(英祖) 48년(1772) 3월에 건립되었다. 비의 두전은 「箕城大師碑銘」이며 제명은 「有明朝鮮國扶宗樹敦臨濟下三十一世箕大師行蹟碑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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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성대사 비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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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城大師碑銘 有明朝鮮國扶宗樹敦臨濟下三十一世世箕大師行蹟碑銘 幷序 通政大夫 弘文館 副提學 知製敎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李瀰 撰 嘉義大夫 吏曹參判兼同知 經筵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 知製敎尹東暹書 通訓大夫 行弘文館應敎 兼經筵侍講官 春秋館編修官 侍講院輔德 中學敎授 漢學敎授 趙宗鉉 篆 佛以空寂無爲爲宗以慈悲普施爲敎以寂觀之百爲皆屬根塵以其慈悲故凡導衆度世之道來能無有爲經樹文字乃導度之津筏故講分文籍稱八萬大藏不厭其煩且多也然卽以文勸導其不古於空寂之宗可知耳而竊怪海東山剎所藏幾皆西方舊經雖高禪名釋其能有迷作以護佛導衆者不多見也箕城大師余未及接其人而其徒弟慧澄持師念佛還鄕西諸佛報恩文兩篇以示余求某記蹟碑銘余不辭而記之盖重其慈悲之學也師法號快善俗姓柳父時興同知母黃氏生漆谷府內時 肅宗癸酉歲也頂闊準直面黧身瑩十三入八公山松林十四零髮于敏湜之門十六受具于西歸大師受業于道德山太照設講于落賓堂弘濟大師凡讀緇門諸經父情思仡二義皆入澈而後己又工於耳彸遭健不動諸寺標揭多師心畵卄五學高律嚴落賓師遂授印爲遠近之間銘追附者曰衆而辯卞無礙音聲弘亮提耳警誨操戲革心發信馳思者不可以量數時或靈迹不係遍遊十方名山大剎缾鉢幾盡一曰卓錫于桐華寺告衆曰萬緣歸寂卽是上乘豈終區二說爲爾曹皆戲吾不復講矣商搆草幕持華嚴全經八十券終以復始獨夜趺坐默會禪宗坐夜半酉肱假寐而己所著衲所雖裙襪皆緇其色口豕著世談風雨水旱亦不問淡素守直法性圓蠟人稱敏八公山精康申同志州人各齎錢穀百欲營精籃於銀海寺上谷師曰心性無異若各自以其心爲心各自以其物爲物財勞形土木亦何益也且也永是空手谷亦空手物何必多乎哉咸曰遂合成方丈之寬與之同居以心與物爲一皆師融化之敎矣癸未冬自劒磨歸住八公纔期年問牧菴長老之病於禪本寺上是曾栖地徒衆皆門下出捏槃經講說自若翼曰不侇而瓜壽七十二僧臘五十九徒衆位遺命火葬于東峯下頂骨超出於數百武外層巖上白玉其凪野燦然遂塔於桐華寺之霜峯大師浮屠不盖師學於落賓落賓學於霜峯得其嫡傳者也昔甲子春慧澄訪余于道峯山庄講楞嚴數章盛道師學律之高卓余常神往後二十六年余來嶺藩慧澄尙無恙其容淡枯其心圓寂來問可知爲師徒弟也余來喜爲緇家文字於有夙世相感者且嘉慧澄能闡其師之敎於是乎言後之欲知師法力者還鄕報恩二篇庄 銘曰 釋抱于箕傳授西鉢 透經趑律志若眼徹 峯雲滿衲性一而寂 應中無物惟彌陀佛 還鄕報恩拾二一酉 八萬同藏慈悲村益 左海緇衆都歸一轄 護眞度迷五十九臘 卓波八公永鎭佛域 靈骨潘世悔字躍纅 司述雖空普敬可繹 有欲 筏視此片石 紀元後三壬辰 三月 日 立 大 施 主 正憲大夫 行同知 中樞府事 金尙九 贈嘉義大夫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 金義信 贈通政大夫 掌隷院 判決事 金彦碩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부종수돈(扶宗樹敦) 임제하삼십일세(臨濟下三十一世) 기성대사(箕城大師) 행적비명(行蹟碑銘) 서문을 아울러 쓰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弘文館 副提學 知製敎) 겸(兼) 경연 참찬관(經筵 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 修撰官) 이미(李瀰)가 찬술하였고, 가의대부(嘉靖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 경연 (同知 經筵) 의금부(義禁府) 춘추관사(春秋館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윤동섬(尹東暹)이 글씨를 썼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응교(行 弘文館 應敎) 겸(兼) 경연 시강관(經筵 侍講官)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 시강원 보덕 중학교수 한학교수(侍講院 輔德 中學敎授 漢學敎授) 조종현(趙宗鉉)이 전액(篆額)을 쓰다.
부처님은 공적(空寂)과 무위(無爲)로써 종(宗)을 삼고 자비(慈悲)와 보시(普施)로써 교(敎)를 삼는다. 공적(空寂)의 입장에서 보면 온갖 것은 모두 근진(根塵)에 속하지만, 자비(慈悲)를 기본으로 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까닭에 세상을 구제하는 도(道)에는 원래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있을 수 있다.
경전(經典)은 문자(文字)를 세워 중생을 건네주는 나루터와 뗏목과 같다. 따라서 그것을 문서나 서적으로 구별하여 강론하여 팔만대장(八萬大藏)이라 칭하며, 또 그것이 번거롭고 많지만 싫증내지 않는다. 결국 글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그것이 공적(空寂)의 종(宗)보다는 오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해동(海東)의 산찰(山刹)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거의 서역(西域)에서 전해져온 옛날 경전이다. 비록 고승(高僧)과 이름난 승려의 책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을 수호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책이 많지 않은 것이 내가 괴이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기성대사(箕城大師)는 내가 그 분을 직접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 문제(門弟)인 혜징(慧澄)이 대사의 염불환향서(念佛還鄕西)와 제불보은문(諸佛報恩文) 두 편을 가지고 나에게 보여주면서 공적비(功績碑)의 명문(銘文)을 써주기를 요청해 왔다. 나는 사양치 아니하고 그것을 적어주었는데, 대개 그의 자비를 바탕으로 한 학문에 대하여 중점을 두었다.
대사의 법호(法號)는 쾌선(快善)이고 속성(俗姓) 류(柳)씨요 아버지는 이름은 시흥(時興)이다. 어머니 황(黃)씨가 칠곡부(漆谷府) 내에서 대사를 낳았는데, 때는 숙종(肅宗) 계유(癸酉)년이었다. 정수리가 넓었으며 성격은 곧았고 얼굴은 검고 몸은 빛났다.
열 세 살에 팔공산(八空山) 송림(松林)으로 들어가 열 네 살에 민식(敏湜)대사의 문하에 머리를 깍았으며 열 여섯 살에 서귀(西歸)대사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덕도산(德道山) 태조(太照) 대사에게서 수련했으며 낙빈당(落賓堂) 홍제(弘濟)대사가 강원(講院)을 마련하자 치문(緇門)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공부하였는데 이 두 가지의 뜻이 모두 사무치게 들어온 이후에야 그만두었다. 또 귀 기울이거나 눈을 크게 떠 경계하여 탐욕을 만나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힘썼기 때문에, 여러 절에서 대사의 심화(心畵)를 표식으로 많이 내 걸 정도였다.
스물 다섯 살에 고율엄(高律嚴) 낙빈(落賓) 대사에게서 수학하여 드디어 인가(印可)를 받고 주변에 이름이 알려져 배움을 청하는 자들이 날로 늘어났다. 언변이 좋아 구애됨이 없고 음성도 크고 밝았으며, 입을 귀에다 가져다 알려줄 정도로 친절히 깨우쳐 주었으며, 방만함을 갈무리하여 마음을 바로잡아 주었으니 믿음을 가지고 달려 오려는 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때 혹 부처님의 유적에 관계되지 않더라도 두루 사방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유람하면서 물장군(水甁)과 발우[缾鉢]를 몇 개씩이나 갈아치울 정도였다. 어느날 동화사(桐華寺)에 머물면서 대중에게 고하기를 “모든 갖가지 인연(因緣)은 공적(空寂)으로 돌아가 도다. 이것이 바로 상승(上乘)의 근기(根機)에 해당되는 것이니 어찌 최후에 두 가지로 변별하고 구분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그대 무리를 위해 설하는 것은 모두 희론(戱論)이니 나는 다시는 강론하지 않겠노라”라고 하였다.
이윽고 초막(草幕)을 얽어 팔십 권 화엄경(華嚴經) 전체를 지니고 끝내면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였으며, 밤에는 홀로 가부좌하고 앉아 좌선하며 묵묵히 선종(禪宗)과 만나 앉아서 밤을 지세다 유시(酉時)가 되어서야 겨우 팔을 고이고 선잠에 들었다. 입은 납의(衲衣)가 비록 치마와 버선이지만 모두 검은색이어서, 돼지가 세상이야기를 하는 격이 되기 때문에, 비와 바람 수해와 가뭄 등의 세속 일에는 또한 관여치 아니하였다. 성격이 담백하고 간소하며 정직하였고, 대사의 법성(法性)이 걸림 없이 원만하여 사람들이 팔공산(八空山) 정기를 밝게 한다고 하였다.
경신(庚申)년에 뜻을 같이하는 주(州)의 사람들이 각자 돈과 곡식을 가져와 은해사(銀海寺)의 위쪽 계곡에 절을 짓고자 하였다. 이에 대사가 말하기를 “사람의 심성은 서로 다르지 않다. 만약 각자 자기의 마음처럼 다른 이의 마음을 생각하고 또 각자 자기의 재물을 다른 사람의 재물로 생각한다면 재물과 노동력과 흙과 나무 따위가 무슨 이로움이겠는가. 또 영원히 우리는 빈손이고 계곡 또한 빈손일 터이니 재물이 반드시 많아야 하겠는가”라 하였다. 이에 모두 말하기를 ‘아! 드디어 방장(方丈)의 관용과 어울어져 그와 함께 기거하면서 마음과 재물이 하나가 되니, 이 모두는 바로 대사의 융화(融化)에 대한 가르침에서 비롯한 것이다’라 하였다.
계미(癸未)년 겨울 검마(劒磨)에서 돌아와 팔공산에 머문 지 겨우 일 년 만에 선본사(禪本寺) 위에서 목암(牧菴) 장로의 병문안을 하였다. 이곳은 이전에 기거하였던 곳으로 대중들도 모두 문하(門下)에서 배출된 곳이다. 열반경(涅槃經) 강의를 태연히 하고는 다음날 옆에 지켜보는 무리들 없이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세수(世壽) 칠십이세요 승랍(僧臘) 오십 구세 였으며 대중에게 유명(遺命)을 남겼다. 동쪽 봉우리 아래에서 화장을 거행하니 정수리 뼈가 수백 개였는데, 마치 암석 위에 층층이 쌓은 백옥(白玉) 같아서 바람이 조용히 잠자는 들판에서 환하게 빛났다. 드디어 동화사의 상봉(霜峰) 아래에 탑을 세우고 대사의 부도(浮屠)는 뚜껑을 씌우지 않았다.
대사는 낙빈(落賓)대사에게서 수학하였으며 낙빈은 상봉(霜峰)대사에게서 배워 법통(法統)을 이었다. 옛날 갑자(甲子)년 봄에 혜징(慧澄)이 나를 도봉산(道峰山) 산장으로 찾아와 능엄경(楞嚴經) 여러 장을 강의하였는데, 그 도(道)가 무르익어 있었고, 그것은 바로 스승인 기성대사에게서 율(律)을 배워 기량이 높고 뛰어났다. 나는 항상 그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후 이십 육 년 만에 나는 다시 본래 나의 울타리로 돌아왔다. 혜징은 항상 거짓이 없고 그 용모는 맑고도 맑았으며 그 마음은 원만하고 고요했으며 그가 스승의 제자였다는 것을 물어 알 수 있었다. 내가 오니 치가(緇家)의 문자에 대하여 전에 서로 교감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였으며 또한 가혜(嘉慧)와 징능(澄能)이 그 스승의 가르침을 여기서 펼치고 있었다. 후에 대사의 법력(法力)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환향(還鄕)과 보은(報恩)의 두 편을 보아야 한다.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기성대사(箕城大師)를 품에 안아 서쪽에서 전해져온 발우(鉢盂)를 대사에게 전해 주었도다. 경(經)을 꿰뚫어 보고 율(律)에 서성거리니 그 품은 뜻이 눈에 사무치도다. 산봉우리 구름 위 기상이 납의(衲衣)에 가득하니 성품은 오직 하나이니 공적(空寂) 뿐이로다. 응하는 속에 어떠한 사물(事物)도 없으니 오직 아미타불(阿彌陀佛)뿐이로다. 환향(還鄕)과 보은(報恩)의 두 편을 모아 하나의 유(酉)로 하도다. 팔만의 부처님 뜻이 함께 갈무리되어있으니 자비로 시골 마을이 이롭게 되었도다. 좌해(左海)의 대중들이여 모두 한 곳으로 돌아 오도다. 진리를 보호하고 번뇌를 건져주기를 오십 구년간 하시도다. 뛰어난 파도가 팔공산에 휘도니 길이 부처님이 진호(鎭護)하는 곳이로다. 신령스런 유골을 세상에 뿌리니 한스러움의 회(悔)라는 글자가 선명한 빛깔의 실처럼 빛나도다. 서술을 맡아보는 것은 비록 공(空)한 일이지만 공경(恭敬)을 바쳐 말을 늘어 놓도다. 욕심이 있는 자, 이 한 조각 돌을 방편 삼아 보기를 바라노라.
기원후(紀元後) 3번째 임진(壬辰)년 3월 일에 세움. 대시주(大施主) 정헌대부(正憲大夫) 행동 지중추부사(行同 知中樞府事) 김상구(金尙九) 증 가의대부(贈 嘉義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 겸(兼)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 김의신(金義信) 증 통정대부(贈 通政大夫)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 김언석(金彦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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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성대사 비각 옆 부도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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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부도(浮屠)
송림사에는 사내 석종형(石鐘形) 8기의 부도군과 사외 기성대사비각(箕城大師碑閣) 동쪽에 석종형(石鐘形) 4기의 부도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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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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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도군 |
| III. 마치면서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 된 역사는 수 십세기가 지났다. 역사서인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삼국유사에 가장 먼저 남방불교가 전래되어 금관가야(金官伽倻)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등장한다. 나라의 국명(國名)이 불교의 명칭이다.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 부다가야(佛佗伽倻)에서 유래되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首露王) 7년(48) 7월 아유타국 허황옥(許黃玉) 공주가 시집올 때 동행한 보옥선사(寶玉禪師) 장유화상(長遊和尙)이 불경(佛經)과 차(茶), 파사석탑(婆娑石塔)을 진풍탑(鎭風塔)으로 배에 싣고 온 것이 그 증거이다. 후에 고구려(高句麗)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 순도(順道)가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의 사자를 따라 불교를 전하고, 백제(百濟)에는 인도승 마라난타가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에 동진(東晉)에서 영광(靈光) 법성포(法聖浦)로 들어 왔으며, 이곳 신라(新羅)에는 눌지왕(訥祗王) 원년(417)에 고구려에서 신라 지역으로 들어 온 묵호자(墨胡子)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전래하여 이곳 경상도 지역에 전하게 되었으며, 왕경(王京)인 경주(慶州)와 인근지역으로 초기에는 주로 교종불교(敎宗佛敎)의 전파가 이루어지며 법흥왕 14년(527)에 불법을 공인하여 칠가람(七伽藍)이 완성되고, 진흥왕대를 거치면서 거대한 사찰이 창건되었다. 이 시기에 송림사는 진흥왕(眞興王) 5년(544)에 진나라에서 귀국한 명관(明觀)스님이 중국에서 가져온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기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다. 후에 경덕왕(景德王), 원성왕(元聖王) 이후로 지방 토호세력의 지원을 받은 선종불교(禪宗佛敎)가 유행하면서 신라지역 전역에 많은 사찰이 창건되고 포교화가 되었다. 송림사는 신라불교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에 창건된 사찰로 현재까지 사세가 유지되고 있다. 특히 주불전인 대웅전(大雄殿)과 사찰의 중심인 전탑(塼塔)은 그 대표적인 유산이며 인근 대구 경북지역과 전국의 수 많은 불자들이 신봉하는 귀의처(歸依處)가 되고 있다. 과연 그들은 깨닳음을 얻었을까? 대각(大覺)의 경지에 들었을까 ? 화두를 던져본다 !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환숙
경북향토사연구회 부회장 칠곡군 문화관광해설사 구상선생기념사업회 이사 국사편찬위원회 칠곡군 사료조사위원회 위원 칠곡문화원 이사 및 칠곡학연구소 연구위원 2010년 제10회 동서커피문학상 수상 저서 '초록을 꿈꾼 나날들', 시집 '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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