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주암정의 봄(사진 이정록) |
|
주암정의 사계(2)
이정록
2. 春, 주암정의 진달래
우수 경첩을 지낸 금천의 시냇물이 풀리고 버들강아지가 예쁘게 피어나면 주암정의 봄은 시작된다.
금천 너머로 멀리 보이는 들판에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피어나고 그 꿈길 같은 길을 따라 그리운 사람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금방이라도 다가 올 것 같은 주암정은, 이런 환상이 있는 곳이다.
춘삼월 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주암정에는 봄을 맞은 산수유 가지가 제일 먼저 꽃망울을 열기 시작한다. 꽃망울이 작기는 하지만 노란 꽃술이 앙증맞게 예쁘고, 밀폐된 벌통 속에서 죽은 듯이 긴 겨울을 지내야 했던 벌들이 처음 나들이 나오는 곳이 바로 산수유 꽃이다. 실개천을 따라 피어나는 산수유 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주암정 뒤편은 바위 절벽인데 그 끝자락에 진달래가 가까스로 몸을 의지하고 무더기무더기 자라고 있다.
봄철에 피는 꽃치고 반갑지 않은 꽃이 있을까마는 옛날 어렸던 시절에는 진달래꽃이 제일 반가운 꽃이었다. 배가 고팠던 때라 진달래꽃을 먹을 수 있어서 제일 반가웠는지 모르지만 진달래꽃을 한아름씩 꺾어다가 먹기도 하고 진달래꽃 암술을 입술로 부드럽게 녹여 서로 걸고 당기는 놀이도 하면서 봄날 기나긴 해를 진달래꽃 속에 묻혀 지냈다.
옛날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냈던 사람이라면 진달래꽃에 얽힌 추억 한두 가지 쯤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엔 농촌에도 진달래꽃이 예전만 같지 못하다.
진달래꽃은 다 자라야 겨우 어른 키를 넘기는 관목이라 하늘을 찌르는 교목 속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옛날에는 산들이 벌거숭이 산이어서 관목인 진달래가 야산이건 깊은 산이건 지천으로 피어났는데 지금 산은 숲이 무성하여 진달래가 발붙일 곳이 없어져 귀한 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주암정 바위 벼랑에는 지금도 봄철이면 진달래꽃이 예쁘게 피어난다.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벼랑이라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분홍색의 그 매력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이다.
이렇게 진달래꽃이 만발할 때면 주암정 옆에 해묵은 벚나무도 시샘하여 하얀 벚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내고, 마을 뒤의 복숭아꽃도 가을 단풍보다 더 붉은 꽃을 피운다.
예전엔 시골 어느 마을 어느 집엘 가도 살구꽃 한두 그루 없는 집이 없었는데 지금은 살구꽃도 진달래 만큼이나 귀한 꽃이 되었다.
주암정이 자리한 서중리 마을에는 이맘때쯤이면 예천처럼 많지는 않지만 살구꽃이 피어나서 이호우 님의 ‘살구꽃 핀 마을’이라는 시조를 생각나게 한다.
살구꽃 핀 마을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이호우 시조집>(영웅출판사.1955)
주암정이 있는 산북면 서중리는 외할머니를 닮은 포근함이 있다. 마을의 복사꽃 살구꽃과 더불어 주암정과 맞닿은 사과 과수원에서 사과꽃이 만발하면 주암정은 온통 꽃 속에 쌓여 별천지가 된다.
이백(李白)의 시구(詩句)에
桃花流水杳然去 복사꽃 시냇물에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라는 산중문답 마지막 두 구가 바로 이런 곳이 아닌가 한다. 이는 곧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인, 선경(仙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는데 주암정의 봄도 도화원기의 무릉도원 못지않은 많은 꽃이 만발(滿發)하는 승경(勝景)이다.
이런 빼어난 승경에 있는 주암정의 기문(記文)은 공의 후손인 채홍탁(蔡鴻鐸)이 지었다. 채홍탁의 주암정기(舟巖亭記)를 게재(揭載)한다.
舟巖亭記 熊淵之南有大巖 形如舟而治崖長繫 昔吾先祖上舍府君 嘗泝洄遊賞 題詠寄意 因以舟巖爲標號 竟未售志而早世 後之過此 巖遊此巖者 咸有人去名存之盛 日因門事而會 嗣孫宗鎭氏 愀然語余曰 大凡人於祖先尋常行過之處 猶尙保護其遺躅 或題刻焉建築焉 以表記念者多 況此巖先世之所寄意處 近在里閈之傍 起居動靜 無日不相接 則盍經始一屋 以寓羹慕 如甄氏思亭乎 余曰 是哉是哉 但各家綿力不能巨張 以至歷世而徒爲心上營者也 若復延陀 卽焉如夫明年如是 又明年亦如 是耶 乃卽輪議鳩聚若于物 適買隣里空廨棄地 取長釤 其垢輔其罅 室東西中於堂 間架偏狹 僅可以容膝始事於 壬午三月訖役於是年九月 盖遷就於時歲然也 醉中不稱意 者或有之 然憑欄而眺望 則天柱北屹 宛然掛萬丈布巾 錦江南注 依然褒一世錦纜 其他泉石之美 煙霞之勝 森列眼界者 足爲吾家 傳授之道一名區也 今此爲亭 只取苟完 不曰肯橫 然衛先之道 豈在屋之廣狹 惟在乎仰體遺志 思所以善繼善逑 是之爲無忝爾光 盖府君以剛明之志 通敏之學 因舟巖爲號者 豈從然也哉 嗚呼 府君以晟代經濟之材 能作巨川之舟楫 措一世盤石之安 是所分丙 而不幸中途奄殂 迄于今爲無窮之恨也 凡我諸仍 以祖先之 心爲心 守分飭行 不墜先緖 貽謨後晜 豈但以一亭之成 謂能事必耶 試觀夫巖形 雖若泛在奔波之上 厚重不遷 設有盪舟之力 莫可運動 又或漏船之世 永無沈履之慮 仰天秘此巖舟 曾待我上舍祖 而傳至于今日耶 凡登於斯 遊於斯者 毋徒以榱題之不甚華麗 園林之猶未廣闊爲心 第見其不隨波下上 又不與世浮沈 屹然若大河之中流砥柱 反以思此身之涉也 亦如此亭之載是巖 知所以不輕動 則可謂人與物相得 以是企望焉 不揆妄率略敍顚末以爲記 甲申九月 日 九代孫 鴻鐸 謹識
웅연의 남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모양이 벼랑을 다듬어 배를 길게 메어놓은 듯하다. 옛날 우리 선조 상사(上舍) 부군(府君)이 일찍이 시내를 거슬러 오르며 노닐고 즐기면서 시를 지어 읊조리고 자신의 뜻에 기인하여 이로써 주암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버리셨다. 그 후에 이 바위를 찾아와 유람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람은 가고 없고 이름만 남은데 대한 감회를 가지게 되었다. 뒷날에 집안 일로 인하여 모임을 가졌는데 사손(嗣孫)인 종진(宗鎭)씨가 슬픈 기색을 띠고 나에게 말하기를 ‘대개 사람들은 선조께서 평소에 다니던 곳이라도 오히려 그 유적을 보호하기 위하여 혹 글씨를 새기고 집을 지어 기념을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이 바위는 선대(先代)의 뜻을 기탁한 곳이고 마을 곁에 가까이 있어서 집을 나서거나 집안에 머물러도 날마다 접하지 않는 날이 없으니 조그마한 집이라도 지어 조상을 향한 사모의 정을 진씨(甄氏)의 사정(思亭:조상을 사모하는 정자)처럼 해야하지 않을까?’ 하니 내가 말하기를 옳도다. 옳도다. 다만 각 집안이 힘이 약해 크게 베풀 수 없어서 때가 지나도록 그저 마음으로 계획할 뿐이었다. 만약 다시 시일을 끌면 어찌 내년이 올해와 같고 또 후년이 이와 같은 것임을 어찌 알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곧바로 의논하여 약간의 재물을 모아서 마침 인근 마을의 빈 관청과 버려진 땅을 매입하여 짧은 목재는 버리고 긴 것은 취하고 때를 깎아내고 틈을 채웠다. 동서로 방을 두고 가운데 마루를 두었는데 칸이 너무 비좁아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을 정도였다. 임오년 3월에 일을 시작하여 이 해 9월에 공사를 마치니 대체로 그때의 형편에 따라서 짓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취중(醉中)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가 혹 있으나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천주봉이 북쪽에 솟아있어 완연히 만길의 돛을 걸어놓은 듯하고 금강이 남쪽으로 흘러들며 닻줄이 되어 뻗어있다. 그 밖의 자연(泉石)의 아름다움은 안개가 드리운 경관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니 우리 집안에 전해지는 하나의 이름 있는 구역(名勝)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지금 이 곳에 정자를 세운 것은 그런대로 갖춤(苟完)을 취한 것이지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선조를 위하는 방법이 어찌 건물의 넓고 좁음에 달려 있겠는가? 오직 유지를 우러러 채득하며 잘 계승할 길을 생각하면 이것이 이른바 ‘너희 선조를 욕되게 함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 된다. 대체로 부군의 분명한 의지와 달통하고 명확한 의지를 가졌으니 주암으로 인하여 그것을 아호로 삼은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아 부군은 밝은 시대에 나라를 경영할 재목으로 큰 강을 지나갈 배와 노가 되어 한 시대를 안전한 반석에 둘 수 있었으니 이것이 공의 본분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중도에서 갑자기 돌아가셨으니(1675년 43세) 지금껏 무궁한 한이 되었도다. 모든 우리 후손들은 선조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아 본분을 지키고 행실을 삼가서 선조가 남긴 법도를 실추시키지 아니하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니 어찌 다만 정자 하나를 지은 것으로 일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저 바위(舟巖)의 형상을 잠시 살펴보면 비록 사납게 출렁이는 물결 위에 떠 있는듯하나 중후하여 옮겨지지 않으며, 설령 배를 육지로 옮길 정도의 힘이 있더라도 움직일 수 없다. 또한 혹 배에 물이 세는 시대가 될지라도 영원히 가라앉을 염려가 없다. 그렇다면 하늘이 이 바위배(舟巖)를 은밀하게 숨겨 두었다가 일찍이 우리 상사(上舍:蔡翊夏) 선조를 기다려 오늘에 전한 것이 아니겠는가? 대저 이곳에 오르고 이곳에 노니는 사람들은 한갓 서까래가 그다지 화려하지 않음과 원림이 광활하지 못함을 마음에 두지를 말고 다만 물결을 따라 아래 위로 흔들리지 않고 또 세상과 더불어 부침(浮沈)하지 않으며 우뚝하여 마치 큰 강(中國 黃河) 중류의 지주석(砥柱石) 같음을 보라. 돌이켜 이 몸이 세상을 건너감도 또한 이 정자가 이 주암에 실린 것과 같음을 생각하고 가벼이 움직이지 않는 까닭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물이 모두 제자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이러하기를 바라노라. 망령되고 경솔함을 헤아리지 않고 간략히 전말을 서술하여 기문으로 삼는다. 갑신년 9월 일 9대손 홍탁 삼가 기록한다.
채홍탁은 주암정기에서 주암정의 입지와 건립배경 및 선조인 주암 채익하를 기리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선조인 주암 채익하의 유지를 받들어 행실을 삼가서 선조가 남긴 법도를 실추시키지 아니하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함을 가슴 깊숙이 담아두고자 하였다.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