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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 |
|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정석원)는 2월 8일 9시 40분부터 11시까지 고령군 대가야문화누리 가야금홀에서 2.8독립선언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2.8독립선언은 고령군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반민특위 위원장이었던 영주 김상덕 선생의 독립운동 시발점이 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는 2019년부터 매년 이 행사를 진행해 왔다.
이날 행사에는 이남철 고령군수, 김명국 고령군의회 의장과 이달호·성원환·유희순·이철호 의원, 기세원 고령교육장 등 관내 단체에서 참석하였다. 또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종손인 여인성 씨, 애국지사 우곡면 유족회 박재일 씨, 선생의 문중인 경주김씨 기재공파 김영신 종손, 선생의 출생지인 대가야읍 낯질노인회에서 선생을 기억하는 고향 여러 어른신들도 참석하였다.
광복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장 외 많은 관련단체에서 화환과 축전을 보내왔다.
프로젝트 2.8의 식전공연을 시작으로 정석원 사업회장의 기념사, 이남철 고령군수와 기세원 고령교육장의 축사, 정석원 사업회장의 특강, 만세삼창, 신독립군가 합창 순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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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석원 회장(사진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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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에서 정석원 사업회장은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 있고, 대한민국은 지역과 이념의 차이로 의한 갈등과 분열이 심각한 사회”라며 “이러한 급격한 변화와 갈등이 상존하는 사회일수록 정체성을 찾고 역사속에서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더 없이 소중하고, 오늘 2.8독립선언 행사가 바로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우리의 마음 속에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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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사를 하고 있는 이남철 고령군수(사진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 |
| 이남철 고령군수는 축사에서 “그동안 김상덕 선생의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많이 가려져 있었다.”며 “지금부터라도 숭고한 뜻이 잘 드러나도록 노력을 하겠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잘 받들어 대한민국이 올바로 설 수 있도록 함께 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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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사를 하고 있는 기세원 고령교육장(사진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 |
| 기세원 고령교육장은 “2·8독립선언은 학생들에게 의미있는 역사로, 젊은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보여준 희생과 독립, 민주주의, 정의·평등·인류애의 가치는 이어가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며 “이 기념식이 학생들에게 항일독립운동의 회고에 그치지 않고, 미래세계로 나아가는 정신적 지침으로 계승하고, 미래지향적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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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덕 선생(사진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 |
| 김상덕 선생 약력
◼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김상덕 선생은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출신으로 1919년 일본 유학생 시절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이 일로 옥고를 치르고 그는 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김상덕은 1944년 임시정부의 문화부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을 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1948년 제헌국회 때 고향인 경북 고령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구성되고 친일파의 처단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반드시 거쳐가야 할 과정이었다. 김상덕은 반민특위의 위원장으로 선출돼 해방 직후 민족의 과제였던 친일 청산의 과업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 김상덕 선생 연보 약력 1891.12.10. 고령군 대가야읍 저전리 558번지(저전2길)에서 출생. 1896. 내산서당(乃山書堂)에서 이두훈 선생의 훈도를 받음(~19세). 1917. 경신중학교 졸업. 합천 출신 강태정 여사와 혼인. 일본 와세다대학 경영학부 입학. 1919.2.8.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실행위원으로서 독립선언식을 주도함. 투옥되어 재판을 받고 징역을 살다가 1920년 2월에 석방됨. 1920.4.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됨. 1922.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함. 1923. 상하이 <국민대표회의>에 개조파의 일원으로 참가함. 1924. <상해청년동맹회> 활동 후 만주로 이동. 사회주의자들과도 협력함. 1925. 정의부 집행위원에 선출됨. 1926. 고향에 있던 부인 강태정 여사를 길림으로 모셔옴. 1928. <시사연구회> 책임자로 선임되어 민족운동가의 통합을 위해 노력함. 1930. 만주에서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여 무장투쟁을 지도함. 1933. 난징으로 이동. 신익희, 윤기섭 등과 함께 <신한독립당> 상무위원으로 참여. 1935. 독립운동 단체가 결집한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및 재정부장에 선임됨. 해방될 때까지 <민족혁명당>을 지킴. 1937~1939. 난징 함락. 임시정부와 함께 무한과 계림을 거쳐 중경으로 이동. 1939. 부인 강태정 여사 별세. 막내딸 병사. 아들 김정륙과 딸 김길성은 순자화위안 에서 김규식 선생의 부인 김순애 여사에게 의탁함. 남매는 고아원에서 2년간 살기도 함. 1940. 중경에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결집한 <한독당>에 참여. 김규식 선생을 보좌함. 1941. <민족혁명당>과 함께 임시정부에 합류. 1942.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임됨. 1943. 의정원 학무위원장에 선임됨. 1944. 약헌(約憲) 수개위원(修改委員)으로서 <대한민국 임시헌장> 완성에 공헌함. 1945. 임시정부 문화부장으로서 김구 주석 내각의 국무위원이 됨. 해방을 맞아 김구 주석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 1진으로 귀국함. 1946. 김구, 김규식, 이승만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함. 미군정 이 설치한 <과도입법의원>에 당선되어 각종 입법 활동에 종사함. 1947. 경신중학교 제11대 교장 취임. 1948. 5.10 총선에서 고향인 고령에 출마하여 당선됨. 제헌의회 헌법기초위원으로 서 제헌헌법을 제정하는데 공헌함. 1948.9.29.~10.12 제헌의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김상덕 선생을 위원장으로 선임함. 1949.6.6. 이승만의 하수인 친일경찰(내무차관 장경근, 중부서장 윤기병)의 반민특위 사무실 테러. 다음날 김상덕 선생은 위원장직을 사퇴함. 1949.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하여 공소시효를 8월 31일까지로 제한함. 1950. 5.30 총선에서 고령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함. 1950.7월. 6.25 전쟁 중에 북한군에게 납북됨. 임시정부 요인으로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김봉준, 유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등도 함께 납북됨. 조소앙과 함께 숙청됨. 1956.4.28. 별세. 묘소는 평양 룡궁동 소재 재북인사묘역에 있음. 1990.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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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사진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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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1진 귀국(사진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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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독립선언서
조선청년독립단은 아 2천만 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4천 3백년의 장구한 역사를 유한 오족은 실로 세계 고민족의 하나이라. 비록 유시호 중국의 정삭을 봉한 사는 유하얏스나 차는 양국왕실의 형식적 외교관계에 불과하얏고 조선은 항상 오족의 조선이고 일차도 통일한 국가를 실하고 이족의 실질적 지배를 수한 사 무하도다. 또 합병 이래 일본 조선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반하야 오족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 대한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습용하여 오족에게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등을 불허하며 심지어 신교의 자유, 지업의 자유까지도 불소히 구속하며 행정, 사법, 경찰 등 제기관이 조선민족의 사권까지도 침해하며 공사간에 오인과 일본과의 우열의 차별을 설하며 오족에게는 일본인에 비하야 열등한 교육을 시하야서 오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일본인의 사용자로 성케 하며 역사를 개조하야 오족의 신성한 역사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하고 능모하며 소수를 제한 이외는 정부 제기관과 교통, 통신, 병비 등 제기관에 전부 혹은 대부분 일본인을 사용하야 오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국가생활에 지능과 경험을 득할 기회를 부득케 하니 오인은 결코 여차한 무단전제 부정, 불평등한 정치하에서 생존과 발전과를 향유키 불능한지라. 그뿐더러 원래 인구과잉한 조선에 무한으로 이민을 장려하고 보조하야 토착하니 오족은 해외에 유리함을 불면하며 정부의 제기관은 물론이고 사설의 제기관에까지 일본인을 사용하야 일단 조선인의 부를 일본으로 유출케 하고 상공업에도 일본인에게만 특수한 편익을 여하야 오족으로 하야금 산업적 발흥의 기회를 실케 하도다. 여차히 하방면으로 관하야도 오족과 일본과의 이해는 상호배치하야 기해를 수한 자는 오족이니 오족은 생존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노라. 최후 동양평화의 견지로 보건대 위협이던 아국은 이미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의 건설에 종사하는 중이며 중화민국도 역연하며 겸하여 차후 국제연맹이 실현되야 다시 군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할 강국이 무할 것이다. 그러할진대 한국을 합병한 최대이유가 소멸되었을 뿐더러 차로부터 조선민족이 무수한 혁명란을 기한다면 일본에게 합병된 한국은 반하야 동양평화의 요란하고 화원이 될지라. 오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오족의 자유를 추구할지나 만일 차로써 성공치 못하면 오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야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야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는 열혈을 유할지니 어찌 동양평화의 화원이 아니리오? 오족은 일병이 무하니 오족은 병력으로써 일본에 저항할 실력이 무하도다. 일본이 만일 오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오족은 일본에 대하야 영원의 혈전을 선하리라. 오족은 구원히 고상한 문화를 유하얏고 반만년 간 국가생활의 경험을 유한 자라 비록 다년간 전제정치하의 해독과 경우의 불행이 오족의 금일을 치하얏다 할지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의 선진국의 범을 취하야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오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이 유할 줄을 신하노라. 자에 오족은 일보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오족에게 자결의 기회를 여하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이면 오족은 생존을 위하야 자유의 행동을 취하야써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
재일본동경조선청년독립단 대표 최팔용, 윤창석, 김도연, 이종근, 이광수, 송계백, 김철수, 최근우, 백관수, 김상덕, 최근우, 백인수, 서춘
결의문 1. 본단은 일한합병이 오족의 자유의사에 출치 아니하고 오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야 대회의 결의로 오족의 운명을 결할 기회를 여하기를 요구함. 3. 본단은 만국평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오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우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야 일본에 주재한 각국대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해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함. 우위원은 기히 파견된 오족의 위원과 일치행동을 취함. 4. 전제항의 요구가 실패될 시에는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을 선함. 차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오족이 기책을 임치 아니함.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이상으로 김상덕 선생 기념사업회의 자료를 정리하였습니다. 김상덕 선생은 2011년 2월 8일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신 바 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분들의 애국정신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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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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