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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니체, 존재(存在) 철학에서 생성(生成) 철학으로6 이재성(계명대)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2년 0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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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존재(存在) 철학에서 생성(生成) 철학으로6

이재성(계명대)

31. 귀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이 ‘초인’(超人, Übermensch)이다. 스스로를 해석 주체로 세워가는 인간, 그렇게 함으로써 절대적‧초월적 진리에의 믿음과 그 파멸로 인한 절망이라는 양극을 무효화시키는 인간, 그가 바로 초인이다. 초인은 가치들의 가치를 해석하고, 새로운 가치들을 세워나가는 해석적 주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초인은 ‘인간을 초월한 포지션’을 가리킨다. 

니체는 뱀 대가리를 수없이 물어뜯어 내뱉는 고난의 밤들을 버텨 내고, 마침내 새로운 리라를 얻는 자, 그가 곧 초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마침내 영원회귀를 기쁘게 긍정하게 된 인간, 삶을 기쁘게 긍정하게 된 인간은, 이미 ‘인간’ 그 자체를 넘어 초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인간이 원숭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높은 경지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초인이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지 또한 어떻게 하면 초인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니체는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 별로 없다. 

“나는 너희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인간을 초극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이제까지 모든 존재는 자기를 능가하는 무엇인가를 창조해왔다. 너희는 그 위대한 조수의 썰물이 되길 원하며 인간을 초극하기보다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가? 인간에게 원숭이란 어떤 것인가? 하나의 웃음거리 또는 괴로운 수치이다. 그리고 초인에겐 인간 또한 바로 그러할 것이다. 하나의 웃음거리 또는 괴로운 수치인 것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32. 니체는 초인은 ‘이런 것이다’가 아니라 ‘이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초인은 구체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인간의 초극’이라는 운동성 자체일 것이다. 즉 초인이란 ‘인간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무리와 같은 존재자=노예’라는 것에 고통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감수성,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심연 위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기도 힘들고 가는 도중에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한 점은 인간은 다리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이 사랑받을 수 있는 점은 그가 하나의 과도이며 몰락이라는 점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3. 지금까지 우리는 힘에의 의지가 목표하는 것은 자신의 고양과 강화라는 사실을 보았다. 이제 제시되어야 할 ‘궁극의 가치’는 힘에의 의지를 최고도로 실현하는 가치이어야 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최고의 가치들처럼 힘에의 의지를 약화하거나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여금 자신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고양하도록 내모는 가치이어야 한다. 

이런 가치는 피안이나 미래와 같은 신기루를 통해서 힘에의 의지를 단순히 위로함으로써 그것을 현재의 연약한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최대의 시련에 직면케 함으로써 단련시키는 것이어야 하다. 

힘에의 의지는 자신을 극도로 고양하기 위해서 그러한 최대의 시련, 자신이 극복해야 할 최대의 장애를 정립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에게 최대의 시련이 되는가? 그것은 바로 근대에 대두되고 있는 허무주의의 사건이다. 

생이 아무런 확정된 목적도 갖지 않는 것으로 드러날 때 생은 인간에게 최대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삶의 의미를 확신하고 있을 때 어떠한 고통도 감수할 수 있다. 이때 인간은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의연히 견디며 자신에 대해 긍지를 가질 수 있다. 

인간은 향락과 안락을 추구하는 존재 이전에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생이 아무런 목표도 없이 자신을 반복할 뿐이라는 극단적 허무주의의 상태야말로 힘에의 의지에게 최대의 시련이 되는 것이다.


34. 생이 의미도 목적도 없이 영원히 회귀한다는 사상은 신의 죽음 이후에 근대인이 처한 허무주의 상태를 영구화하고 이를 통해서 허무주의를 극단으로 몰고 간다. 이렇게 허무주의가 극단적인 형태를 취함으로써 허무주의는 인간을 하나의 궁극적인 결단의 상황에 직면케 한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영원회귀(永遠回歸, ewig wiederkehren) 상태를 최대의 무게에 비유한다. 이것은 약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갖는다. 영원회귀의 사상은 그것이 갖는 엄청난 무게로 우리를 분쇄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견디고 흔연히 긍정할 때 허무주의 극복을 위한 전환점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영원회귀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인수할 때 인간은 지상의 삶의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힘, 즉 최고의 힘을 얻게 된다.


35. 극단적 허무주의로서의 영원회귀의 상태를 극복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피안적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이러한 허무주의의 상태로부터 손쉽게 도피하려 하지 않고 허무주의 상태를 철저하게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긍정을 통해 그전에 허무주의 상태였던 것이 이제는 허무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생의 최고 상태로 나타난다. 

극단적 허무주의 상태에서 영원회귀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실은 공허한 무이며 그 어떤 것도 무가치하며 따라서 아무래도 좋다는 의미를 갖는다. 반면에 허무주의를 극복한 상태에서 영원회귀는 모든 것은 의미로 충만해 있고 모든 순간이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며 아무래도 좋은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핀다. 존재의 연령은 영원하다. 모든 것은 부서지고 모든 것은 새로 결합된다. 존재의 동일한 집은 영원히 재건된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다시 서로 만난다. 존재의 원환은 영원히 자신에게 충실하게 회전한다. 매 순간에 존재는 시작된다. (...) 중심은 도처에 있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6.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에서는 생성하는 존재자의 밖과 위에 존재하는 모든 목적은 파괴된다. 이렇게 초감성적인 참된 세계가 제거됨으로써 형이상학에 의해서 가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감성계의 가상적인 성격도 소멸해버린다. 그것은 형이상학이 그것에 부여한 무의미한 혼돈이라는 성격, 가상적인 성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생성하는 세계가 절대적으로 긍정됨으로써 세계에 그 전에 투입되었던 초감성적인 목적이나 죄, 섭리 등의 이념들은 의미를 잃고 세계는 이제 충만한 ‘영원한 원환’으로서 규정된다. 힘에의 절대적인 의지는 영원회귀 사상을 자신이 가능조건으로써 요구한다.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순간 우리는 힘에의 최고의 의지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로서의 인간의 삶은 이제 더 이상 그것 위에 존재하는 어떤 목적에 관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목적 없이 흐를 뿐인 무의미한 생성도 아니다. 힘에의 의지는 이제 피안적인 유토피아든 아니면 근대의 세계관에서처럼 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유토피아든 어떠한 유토피아도 지향하지 않으며 그것은 오직 그때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에 철저할 뿐이다.


37. 니체는 자신의 생철학(生哲學)을 통해 고통과 악을 극복할 수 있는 궁극적 방안은 고통과 악을 자신의 삶과 힘에의 의지의 고양을 위해서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주창한다. 강한 자는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지상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사랑하는 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애’를 외친다. 

모든 종류의 철학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의 지배를 벗어난 운명과의 화해를 목표로 한다. 운명과의 화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되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운명과의 진정한 화해가 아니라 운명으로부터의 도피(플라톤주의와 기독교)나 운명을 합리화하는 운명과의 타협(헤겔), 운명과의 무망한 대립(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이란 형태로 시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운명과의 화해를 가능케 하는 사상이 영원회귀 사상이다. 영원회귀 사상을 통하여 인간은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운명을 그 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사회적 환경의 변혁에 모든 것을 걸었다면,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이라는 연옥불의 통과를 통한 인간 내면의 변화에 모든 것을 건다.

“환경과 외부적 원인의 영향력에 대한 학설은 부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적인 힘(die innere Kraft)이야말로 무한히 우월한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영향인 것처럼 보이는 많은 것도 사실은 내적인 힘의 순응에 지나지 않는다. 엄밀하게 동일한 환경도 정반대로 해석되고 이용된다. 사실 자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천재는 외적인 발생 조건으로부터는 설명될 수 없다.”(『힘에의 의지』)

이상으로 6편의 연재를 모두 마칩니다. 

↑↑ 이재성 계명대(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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