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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다완의 거장, 문경 도천 천한봉 선생에 대하여(1)/박윤일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6년 07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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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천 천한봉 선생(사진 도천도자미술관)



조선다완의 거장, 문경 도천 천한봉선생에 대하여(1)

박윤일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문경)


Ⅰ. 글머리에

  문경은 여러 가지의 향토 문화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차를 마시는 찻사발 도자기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문경은 찻사발을 널리 홍보하기 위하여 해마다 오월이 되면 대대적으로 문경찻사발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차를 작은 찻잔이 아닌 사발로 마시느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녹차 분말 가루를 큰 찻잔, 즉 사발에 반쯤 물에 타서 마시기 때문에 순수한 우리말로 찻사발로 부르는 것이다. 일본에서 조선의 찻사발은 국보 및 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대단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도 일본 상류 귀족층 차인들은 조선찻사발에 열광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조선찻사발을 오늘날 가장 완벽하게 재현하는 도예가가 문경의 도천 천한봉 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문경찻사발 축제의 중심이 되고 있는 조선찻사발과 도천 선생이 어떻게 조선찻사발을 재현하고 또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일본에서 조선찻사발을 얼마나 귀하게 취급되고 있는지 알아보면서 우리 향토문화의 소중함과 가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Ⅱ. 골동품 상인의 문경도요지 방문

 일본의 국보 및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조선다완이 아직까지 문경도자기와 관련이 있다는 기록이나 연구자료는 없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차인 및 언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큰 주목을 받은 찻사발은 당시 문경에서 재현한 도자기임에 틀림없다.
 
 이 1960년 후반기 및 1970년 초순경 한국의 경제사정은 대부분 먹고살기에 급급한 시기였다. 때문에 다소 삶의 여유가 있는 층의 일부에서 청자와 백자 같은 관상용 도자기를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찻사발, 즉 실제 찻그릇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우연히 찻사발이 일본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사정을 잘 알게된 신정희라는 부산의 골동품 상인이 문경에 찾아왔다. 그는 문경에서 찻사발을 재현할 수 있는 여러 도공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당시 문경에는 민기를 만드는 여러 도공이 있었지만 찻사발을 재현할 수 있는 도공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서선길과 화분과 요강을 만들고 있는 도공 천한봉을 만났다. 천한봉은 눈썰미와 손기술이 뛰어나서인지 이내 신정희가 원하는 찻사발을 만들어 내었다. 신정희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천한봉이 만들어낸 찻사발을 싸게 구입하여 일본에 가서 도자기전시회를 통해 팔았다. 

 전시회는 예상외로 대성황이었다. 그는 전시회를 통해 조선찻사발을 팔면서 자신이 직접 찻사발을 만든 도공인 것처럼 행세를 했다. 그런데 이를 알지 못하는 일본언론은 그를 환상의 다완을 재현한 주인공으로 대서특필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한동안 일본차인들이 열광하는 환상의 다완을 재현한 도공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별지2 신정희가 환상의 다완을 재현했다고 보도한 세계화보 기사

 그런데 그의 사기도공행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시회에 찾아온 다완애호가가 그에게 다완을 직접 성형해 볼 것을 주문했다. 이를 거절할 수 없자 전시장에서 설치한 물레 앞에 앉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의 물레 차는 모습은 매우 서툴렀고 이내 그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일본상인 배진수(裵晉手)로부터 형사 고소를 당하는 등 큰 법적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건 등으로 조령요의 공동경영자인 서선길, 천한봉, 신정희는 결국 결별하였고 각자 독립하여 가마를 만들어 나갔다.

 이때 헤어진 신정희는 관음리에서 조령요를 운영할 때도 성형은 꼭두바위에 사는 김성기 씨가 맡았고 경남으로 내려갈 때도 김성기 씨를 데려가서 한동안 도자기 가마를 운영한 것을 보면 그가 성형을 하지 못하는 도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남으로 내려가 운영한 가마의 이름도 문경에서 사용하던 가마이름 그대로 조령요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일본에서 알려진 가마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골동품 상인이던 신정희의 주문으로 문경에서 최초로 고려다완이 재현되었고 문경도자기가 일본에 알려지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도예가 천한봉의 회고에 따르면 신정희가 제안하여 만든 찻사발은 쯔쯔이즈츠 이도다완이라고 한다. 당시 신정희는 천한봉이 성형한 다완을 개당 100원씩 구입하였고 1일 생산량은 300개였다. 한 달 30일 중 성형하는 기간은 10일, 초벌과 재벌하는 기간은 20여 일이 되었다. 신정희는 초벌구이 들어가기 전에 수량을 파악, 다완 1점에 100원씩 계산하여 돈을 주었고 받은 돈은 서선길 씨와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고 진술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당시 물가는 쌀 한가마니가 15,000원이었다고 한다. 신정희를 만나기 전 서선길 씨와 천한봉 씨는 화분을 만들어 팔았는데 화분은 다완보다 10배나 힘든 작업이었기 때문에 신정희의 제안은 그들에게 매우 고무적이었다고 한다.

 문경이 찻사발의 고장으로 알려지게 된 배경에는 세계적인 일본의 보도기자 구와바라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정희를 고려다완을 재현한 인물인 것으로 잘못 알고 보도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 취재한 사실을 알게 되자 당시 조령요에서 신정희 씨는 다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파는 사람이고 실제 재현한 도공은 천한봉이라고 정정보도하였다. 이로 인해 문경의 도천 천한봉 선생이 일본에서 저명 도예가로 급부상하면서 문경도예역사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구와바라 기자가 쓴 세계화보 기사에 따르면 문경에서는 신정희와 서선길, 그리고 천한봉이 조령요라는 도요를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때 조령요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은 천한봉이었고 이를 일본으로 가져다 파는 사람이 신정희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신정희는 한때 구와바라 기자가 세계화보에 보도한 “환상의 다완을 재현한 도공”이라는 기사에 힘입어 일본에서 화려하게 이름을 날렸다. 구와바라 기자는 정정기사를 쓰면서 신정희 씨와 같이 있는 천한봉 씨는 너무나 겸손하고 말이 없어서 그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문경도자기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에 관련 일본기사 원본을 그대로 복사하여 별지1, 2로 첨부한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천한봉과 서선길은 신정희와 결별하였고 천한봉은 독립하여 문경요를 개설하였다. 운 좋게도 얼마 후 일본다완에 아주 조예가 깊은 한 일본스님이 어디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왔다. 그는 일본에서 아주 유명한 교토 대각사의 주지 사꾸라가와 스님이었다.

 그는 천한봉에게 고려다완이라는 도자기 책자를 보여주며 일본차인들이 열광하는 다완을 만들어 볼 것을 주문했다. 이에 천한봉은 몇 차례 연습 끝에 그가 제안한 다수의 고려다완을 재현하는데 성공하였다.

↑↑ 별지1 1932년 천한봉을 보도한 세계화보 기사


 스님은 천한봉이 성공적으로 재현한 다완을 일본에 가져가 전시회 등을 열어주며 판매토록 지원해 주었다. 당시 일본 언론은 환상의 다완을 재현하는 도공이 한국에 나타났다고 그를 대서특필하였다. 당시 일본 상류층에서는 다도가 매우 유행하였기 때문에 고려다완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이로 인해 문경의 찻사발이 더욱 더 일본에 알져지고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신정희가 문경에서 경남 양산으로 내려가서도 문경의 도공 김성기를 물레장으로 데려가고 조령요(鳥嶺窯)라는 가마명을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조령요는 당초 문경의 서선길, 천한봉이 사용하던 가마이름이다.

 박홍관이 저술한 「사기장이야기」에는 문경찻사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964년 부산에서 고미술상을 하는 신정희가 신휴철 씨를 만나 당시 요강을 만들고 있는 이상택이 운영하는 도자기 공장을 찾아갔다. 그는 다완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다완을 주문하였는데 불량이 너무 많이 나와서 실패하고, 1965년경 단양 방곡에 있는 김윤태 씨를 다시 찾아갔다. 도예가 김윤태 씨 집에는 서동규 씨와 모흥락 씨가 일을 하고 있었다. 신정희와 신휴철 씨는 김윤태 씨에게 다완 사진을 주문을 하였다. 

 그러나 김윤태 씨에게 재현을 의뢰한 다완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정희 씨는 단양과 갈평을 오가면서 김정옥 씨의 부친 김교수에게 찾아가 다완제작 주문을 하였으나 필요도 없는 찻사발을 무엇하러 만드느냐고 핀잔을 하여 다완 재현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신정희는 다시 그가 원하는 찻그릇을 재현하기 위하여 단양 방곡과 문경을 오갔는데 조령요를 운영하는 서선길 씨 집에서 화분을 만들고 있는 천한봉 씨를 찾아가게 되었다.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흐름은 대한민국 다완을 재현하는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서선길 씨는 배(요장)는 가지고 있었지만 함께 배를 저을 이가 없던 차에 배를 저을 사공 천한봉 씨를 만났다. 그런 와중에 뱃머리에 앉아서 배의 방향을 가늠해 줄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3번째 사공 신정희였다.
 3인의 뱃사공은 숙련된 손을 가진 천한봉 씨와 든든한 작업배경을 가진 서선길 씨, 찻그릇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감정(鑑定)능력을 가진 신정희로서 이들은 한국의 다완의 명맥을 다시 잇고 재현할 수 있는 환상의 팀이었다.

 이들이 활동한 연대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조령요 화분공장(1966~1969): 서선길, 천한봉
∙ 조선다완 재현(1969~1972) : 서선길, 천한봉, 신정희

 그들은 모두 다완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다가 세 사람은 함께 동업하기에 곤란한 어떤 문제가 발생하여 각자 새 출발하게 되었다.

 서선길 씨는 문경읍 털목 고개에 진안요를 만들고 천한봉 씨는 문경요라는 가마를 열었다. 운 좋게도 천한봉 씨는 다완에 조예가 깊은 일본 대각사(大覺寺) 사꾸라가와 스님이 찾아와 일본에 다완 판로가 만들어졌으며, 일본에서 훌륭한 다완 재현 능력을 인정받고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신정희 씨는 관음2리에서 당시 문경 관음리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던 김성기(1929~ 2003) 씨를 물레장으로 두고 작업을 해오다가 홍수를 만나 가마가 떠내려가자 김성기 씨를 데리고 경남 통도사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성기를 물레장으로 고용한 것은 당시 그가 도자기 성형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역사는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걸어온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천한봉과 신정희, 두 거장은 이런 말을 남겼다.

신정희 "천한봉 씨 만큼 현장에서 진실되고 성실한 작업을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는 분명 이 나라 사기장으로서 길이 남을 훌륭한 인물이다."

천한봉 "신정희씨는 문경에서 고려다완을 재현하는 일을 최초로 기획하였으며 우리나라 찻그릇이 해외(일본)에서 높은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일등공신이다."

 천한봉 씨는 당시 일본의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신문, 세계화보 그리고 일본 국영방송 NHK 등에서 고려다완을 재현한 한국 최고의 도공으로 연일 매스컴에 특집으로 보도되며 일본차인들에게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60년도 후반부터 70년대의 문경에는 천한봉 외에도 양근택, 김교수, 김성기, 김정옥, 김윤태, 서선길 등 얼마간의 도공은 있었으나 거의 찻사발을 재현하거나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당시 찻사발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문경에는 다완의 가치를 아는 도예가가 없었고 또 다완을 찾는 수요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천한봉이 당시 다완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기술한 바와 같이 골동품상인 신정희 및 일본 대각사 사꾸라가와 스님에 의해서다. 이들의 제안에 따라 다완을 재현한 것이다. 재현한 다완이 이들을 통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 도자기 바이어들이 문경을 드나들게 되었다. 

 당시 문경의 도예가 중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한봉 씨 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33년 강제노역으로 일본에 끌려간 부모님에게서 동경에서 태어나 14년간 일본에 살았기 때문에 일본어를 비교적 무리없이 알아듣고 구사할 수 있었다. 당시 문경의 다른 도예가들은 일본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찻사발의 가치를 거의 알지 못했고 언어문제로 판로를 개척하지 못해 찻사발은 거의 만들지 않았다.

 이처럼 문경의 찻사발은 신정희 씨 및 일본 대각사 사꾸라가와 스님, 그리고 이들의 제안에 따라 이를 도천 선생이 재현하여 일본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바이어들이 조선다완을 구하기 위하여 문경으로 몰려왔고 이 소문을 듣고 전국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는 많은 도예가들이 다른 도자기에 비해 고가로 판매할 수 있는 다완을 만들기 위하여 문경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러한 경위로 문경이 찻사발의 고장으로 유명해지자 문경시에서는 1999년도부터 전통찻사발축제를 개최하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찻사발을 홍보하는 정책을 전개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찻사발축제가 성황리에 개최되어 내려오고 있다. 초대 찻사발추진위원장이 천한봉이라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면 문경찻사발이 일본에 알려지기 전 문경도자기의 역사는 어떠한 지 알아보기로 한다. 찻사발축제 이전 문경은 관요가 아닌 민요지로서 일본 차인들이 열광하는 소박한 찻사발을 만들 수 있는 토양이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역적 역사적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 문경찻사발 축제이다. 따라서 문경찻사발 축제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이 글은 저자의 개인적인 저술로 학계의 일반적인 이론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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