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예천 형평사 사건 醴泉衡平社事件
4. 형평사 전국지사, 분사의 예천사건 대응 사례
1925년 8월 15일 대구형평지사 지사장 외 7명이 예천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천을 향하여 떠났다. 대구청년회 9개 단체는 동월 17일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예천사건을 토의하였다. 또 같은 날 예천사건 응원대를 거느리고 예천으로 왔다가 돌아간 형평사대구지사장 김경삼(金慶三)이 말하였다. “예천사건은 안동 서에서 검사가, 대구서署는 고등과장 등이 출장하여 조사하였고, 그 한편 폭행농민 주범은 안동건사국으로 넘어갔고, 지난 21일 안동서 열린 경북 제2지사 총회에서는 예천사건의 대책을 경성본부에 일임하기로 결의하였소” 그리고는 “왜관, 약목, 안동 등지의 형평대회는 예천사건으로 시끄러운 때이므로 당분간 중지를 시켰던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1925년 8월 15일 형평사 경북 제2지사인 안동형평분사에서는 회관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최후 1인까지도 예천시민에 대항할 것, 예천 사건이 해결될 때 까지 비용을 사원이 부담할 것을 결의하였다. 안동형평사는 이웃 예천사건을 매우 중대시 하고 자신들이 피해를 입은 것 같은 입장에서 이 사건해결에 임했다. 안동에는 경기, 충청, 전라 등 각지 형평사 대표들이 예천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모여들었으며, 예천사건에 대해 비밀리에 조사하기도 하였다.
1925년 8월 20일 충남 강경 형평분사에서 긴급총회를 열고 예천 사건에 대한 선후책을 강구하였는데, 만일 본부로부터 전문이 있는 때에는 대표자 7인을 특파하기로 하여 여비까지 준비하였다.
1925년 8월 20일 경남통영분사에서 임시긴급총회를 열고 본 사건을 적극적으로 항의 할 것, 생명 재산을 희생하여 도울 것, 응원대를 조직하여 출동할 것, 피해 형제의 구급책으로 의연금을 모아 보낼 것을 결의하였다.
1925년 8월 21일 마산형평조합에서 총회 때 예천사건에 대하여 회원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자 매우 분개하여 만일 예천노동회원이 다시 형평사원에게 압박을 가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마산형평조합원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예천에 가서 최후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그 관할인 웅천, 진해, 진동, 마산부내에 있는 사원들은 노소를 물론하고 모두 예천으로 가기로 하고, 박성화(朴性和)를 22일 예천으로 파견하였다.
1925년 8월 21일 안동 형평제2지사는 임시총회를 열고 예천사건 전말보고와 해결방침을 토의하였고 안동청년회 등 10개 단체가 연합하여 조사단을 조직하여 예천에 파견하였다.
1925년 8월 21일 전남 군산 14개 단체는 군산청년회관에서 대표자회의를 열고 조사원 2명을 선정하여 이 사건의 진상을 9월 5일까지 조사하여 강연회를 열어 보고하기로 하였다.
1925년 8월 24일 영양청년회에 오오회는 본 사건의 조사를 위해 조정식(趙鼎植)을 예천에 파견하였다.
1925년 8월 25일 대구의 10개 단체는 제2회 협의회를 열고 그 동안 진상을 조사한 결과 예천읍 농민을 선동한 책임은 예천노동회와 예천청년회라고 하고, 그 간부 중 악한 분자는 응징하라고 하였다.
1925년 8월 27일 충남 당진형평분사는 순성면 양류리 분사장 이주철(李周喆) 집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본 사건에 대하여 장시간 토의한 후 결사적으로 해결한다고 결의하였다. 익산형평분사는 본 사건 선후책을 위해 조명욱(趙明旭)을 예천에 파견하고 그 진상 보고에 따라 철저한 행동을 취하기로 결의하였다.
1925년 8월 29일에 임시총회를 열고 조사보고를 받는 한편 몇 가지 사항을 의결하였다. 가해자는 13인이라 보고하면서 예천청년회에 대한 의문, 노동회와 예천경찰서에 대한 의문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 대책으로 예천청년회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 노동회에 대해서는 경고문을 보내어 즉시 사죄의 회답이 없을 때는 역시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킬 것, 13명에 대해서는 신문지상을 통해 세상에 공포할 것, 경찰서에 대해서는 경찰부에 그 진상을 보고할 것 등이었다.
1925년 9월 16일 안동 화성회가 회관에서 월례회를 열고 예천사건에 대한 조사전말과 처리전말의 보고가 있었다.
1925년 9월 22일자 영양군 어느 기자는, 예천청년회가 선동하였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① 1925년 8월 10일 청년회평의원회의 때 기자 참석을 거절하였고, 그 날 밤에 농민을 선동하여 형평사를 습격, 많은 피해자를 냈다
② 청년회 총무 정종덕(鄭鍾德)을 형평사원이라고 하였고
③ 예천사건의 피고 황인한, 황복강 등이 압송하는 자동차 안에서 고함하기를, “예천의 청년들아! 너희의 죄로 이와같이 되었은즉 안동가서 변호사를 대어주지 않으면 청년회의 비밀을 다 말하겠다”라고 하였고
④ 동 23일 청년회간부회의에서 형평사건에 대한 토의 중 배형복(裵炯福)이 배후에 주모자의 선동자가 있어 그러한 것이 아니냐고 말한 즉 회원이 모두 저지하였고
⑤ 이 사건의 주모 및 선동자가 예천청년회원이 다수인이고
⑥ 형평사 기념총회에 청년회장이 내빈으로서 형평사를 모욕하였고
⑦ 각 사회에서 조사원은 물론 반성하라는 경고문을 30여 통이나 보냈고
⑧ 제3회 형평사를 습격할 때 “안동 화성회 간부 김남수(金南洙)가 달아난 것을 청년회원들이 자전거로 추격하였다”라고 하였다.
당시 1925년 8월 9일 예천사건 이후, <조선일보><동아일보>에 보도된 사례를 보면,
경남 8개 지·분사 진주·마산·통영·웅천·진해·진동·창령·함안, 경북 6개 지·분사 대구·안동·경산·고령·영천·하양, 충남 8개 지·분사 청양·홍성·부여·강경·당진·조치원·보령·예산, 충북 2개 지·분사 청주·음성군 감곡, 경기 4개 지·분사 개성·장호원·여주·안성, 강원 4개 지·분사 강릉·원주·양양·화천, 전라도 지방 3개 지·분사 군산·익산·황등로 총 35개 지역의 지·분사가 예천분사에 대해 지원과 결의를 밝혔다. 자료의 한계에도 이것은 전국 대부분의 형평지·분사가 예천분사를 지원한 것으로, 곧 전 형평사가 참여했다.
❙전국 형평지사·분사의 결의내용
대구형평지사 지사장 외 7인 예천에 파견하여 문제해결 강구 (동아일보)1925.8.17
경산형평분사 임시총회 응원대를 조직하여 예천으로 출발 (조선일보)1925.8.19
청양형평분사 (조)1925.8.19
개성형평분사 (조)1925.8.19
강릉형평분사 (조)1925.8.21
홍성형평분사 (조)1925.8.21
원주형평사 긴급총회
① 진상조사를 위한 조사위원 파견② 별동대 조직(홍성 7명, 강릉 5명, 양양 5명 등 50여 명) (조)1925.8.21
양양형평분사 (조)1925.8.21
형평사 경북제2지사 (안동) 경기·충청·전라 등 각지의 형평사 대표 모임
① 최후의 1인까지 예천시민에 대항 ② 비용은 사원이 부담 (동)1925.8.18·22·23
경북형평청년회 임시총회
① 선동자 사회적으로 박멸 ② 총본부의 명령이 있으면 결사 적으로 예천에 갈 것 ③ 경북형평청년회원 모집 (조)1925.8.30
진주형평사 예천사건 대응코자 경남 각지분사에 형평대회 개최 통지 (조)1925.8.23
웅천형평분사 (조)1925.8.26
진해형평분사 (조)1925.8.26
진동형평분사 (조)1925.8.26
군산형평분사 (조)1925.8.23
부여형평분사 (조)1925.8.27
장호원형평분사 (조)1925.8.27
충남지사대표자회의 총출동 결의 (조)1925.8.29
강경형평분사 긴급총회 대표자 특파 (동)1925.8.23
여주형평지사 긴급총회 응원대 조직 파견 결정 (조)1925.8.23
청주형평지사 긴급총회 응원대 조직 파견 결정 (조)1925.8.23
마산형평사 “결사대를 조직해 최후까지 싸울 것”을 결의
① 예천형평사원 위문 ② 실태조사위원 파견 (동)1925.8.26 (조)1925.8.26.
안성형평분사 간부회의
① 선발대 현장파견 ② 응원대파견 (조)1925.8.24
통영형평분사 임시긴급총회
① 예천사건 적극적 항의 ② 전생명·전재산을 제공 ③ 응원대 조직출동 ④ 의연금수집 (동)1925.8.25
형평사 경북제2지사 임시총회
① 예천사건 진상보고 ② 해결방치 토의-경성본부에 일임키로 (동)1925.8.26·27
익산형평분사
① 예천사건 선후책 강구 ② 위원특파 후 진상보고에 따라 행동키로 (동)1925.8.31
당진형평분사 임시총회
① 예천사건 결사적으로 해결 ② 비용은 유력사원이 선불 (동)1925.9.5
창령형평분사 (조)1925.8.27
영천형평분사 (조)1925.8.29
하양형평분사 (조)1925.8.30
조치원형평분사 (조)1925.8.29
보령형평분사 (조)1925.8.29
화천형평분사 (조)1925.8.29
고령형평분사 (조)1925.9.5
함안형평분사
① 위원의 예천파송 후 사실보고에 따라 행동 ② 총본부의 처리방법 원조 (동)1925.9.8
황등형평사 창립대회 예천사건과 같은 경우, 목숨으로서 최후를 기한다 (동)1925.10.12
음성군 감곡형평분사 (조)1925.12.15
Ⅲ. 예천의 백정
1. 아전문화가 성행했던 지역
예천은 조선시대 이래 유학이 장려되고 이에 따라 학문이 성행했다. 고려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 15세기 초까지 예천의 토성이민(土姓吏民)은 임.윤.권(林·尹·權) 씨 이다. 이들은 여말선초 중앙에 진출하여 정치계에서 고위직으로 국가경영, 학문 교육 등에서 큰 활약상을 보였으나, 조선 15세기 이후에는 재지사족으로 지방(地方) 이족(吏族)의 신분을 가지고 오랫동안 이방 행정을 담당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근대에 들어서서도 이들 성씨의 영향 아래 읍치가 이루어졌다. 그 기득권은 근대로 이어졌고 개화기와 일제시대에도 일반 평민이나 천민에 비해 제도적 수혜를 누렸다. 일부는 친일적 권세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였고 봉건제 하의 반상 신분의 파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에 백정들의 신분 평등 주장에 이들 기득권 양반계층은 일반농민을 선동하여 반형평운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 때부터 삼국의 접경지역의 영향으로 강인한 주민들의 성격과 집단적 아집이 강한데다 우리끼리 뭉치는 단결력이 유별난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글로벌 시대 큰 약점이자 작은 강점이 될 수도 있는 부문이다. 이러한 지역적 정서를 감안해보면 1920년대 예천에 거주한 백정들의 수가 도내에서 두 번째로 많았다고 하나 그 세력은 미미할 수 밖에 없었다.
예천 백정들의 신분타파와 인권평등의 형평사 운동은 그 수적인 장점에도 불구하고 분사 결성 이후의 활동은 미약했던 것이다. 특히 반형평 단체인 예천노농회나 예천청년회의 백정들에 대한 '식장습격' 사건은 이미 예상되었던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조선시대 예천의 행정은 세습 아전들의 행정이었고 사건 당시까지도 기득권층인 그들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옛 군청 관아 동편으로 조선시대 아전들이 동족집단으로 살았다는 설이다. 노상·백전리 등은 황·장·박의 세습 아전 집거지라고 하며, 그 다음의 아전 세력이 3개 성씨인데 김·이·임이라고 지역사에 밝은 고로들이 전하는 말이다. 이들 6개 성이 읍치의 주류였다.
2. 예천 백정집단 거주지역
1960년대 예천초등학교 전경
조선시대 예천지역 백정들의 집단거주 지역은 일제 강점기까지 존치했던 서본리 도축장 인근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산시당골 가는 길 왼편 주거지역으로 보면 된다. 산시당골은 예천초등학교 뒤, 세광빌라 앞 갈림길에서 흑응산성길로 접어들어 올라가는 길이다. 이 골은 옛 향사당과 향현사가 있었던 골이다. 예천향교는 지금의 송대언덕으로 이전하기 전, 즉 조선초 김겸 군수가 이건하기 전에는 이 향사당골에 있었다고 전한다.
또 보문면 모리(某里) 40여호의 갓바치들이 산 집단 거주지역이었다. 지금은 그들이 마을을 다 떠났다. 시선과 인식이 두려웠고 자식들의 혼사길이 막힐 정도로 아직까지 천민에 대한 인식은 유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 인식이 잔존하는 방증의 사례다. 전문가들은 곧장 그 마을 이름을 알고 싶어 하고, 그들과 인터뷰라도 해서 그 무엇에 대한 채록을 하고 싶어 하나, 건드리기 싶지 않은 부분이라 필자는 모동으로 처리한다.
향·소·부곡으로 동로소와 고림부곡이 조선조 기록으로 남아 있으나 그곳에 백정들이 집단거주했다는 구전은 듣지 못했다.
Ⅳ. 예천 형평분사 사건의 의의(意義) 및 결론(決論)
1920년대 초에 예천에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나자 유교적 보수색채가 강한 당시의 예천에서는 양 계층의 충돌이 충분히 예상되는 것이었다. 1894년과 1895년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실시하면서 제도적으로는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예천사건 당시인 1925년에는 아직까지 백정에 대한 사회적인 처우와 차별은 여전히 잔존한 상태였고, 사실 신분적 차별은 8.15 광복 직후까지 그 의식이 남아 있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해 차별 의식이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1925년 8월 9일 예천형평사 기념식 행사장 난입 사건을 계기로 형평사운동은 이전까지 지향했던 백정들의 신분향상 운동이라는 성격에서 벗어나, 조선청년총동맹 및 조선노농총동맹 등 각종 청년·사상·노동 단체와 제휴하면서 일반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형평운동의 특징은, 권력적·신분적 투쟁이었으나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여 백정들의 천민의식을 완전해소하기에는 시대적 상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사회주의 각 단체인 조선총동맹을 비롯하여 각 청년단체, 각 노동 23개 단체 등에서 신분 해방을 위한 본 사건의 지원과 결의가 일부의 분위기를 반전키는 하였으나 사회 일반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문제에는 공감대 형성이 미비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500년 봉건사회에 남아 있었던 제도와 인식을 민주적으로 불식시키고자 하는 활동은 정당하였고 인권운동으로 평가받고자 노력하였다는 점은 높이 사야 한다.
예천의 형평사기념식장 사건이 일어나자 계층타파를 주장하던 각 사회운동단체는 형평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지역별, 단체별 강연회 등을 통해 형평운동을 선전하고 일반인들을 계몽하는 등 강력한 지원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형평운동단체는, 1926년 9월 임시대회에서 사회주의운동의 분파투쟁의 영향으로 미증유의 내부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1927년 1월에 일어난 고려혁명당사건(高麗革命黨事件)에는 장지필·서광훈(徐光勳) 등 중앙 간부가 연좌되면서, 이후의 형평운동에 급진파·온건파의 대립 격화를 초래했다. 형평사 조직은 이후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같이 해체되고 말았다.
예천반형평사 사건을 계기로 형평사 내부적으로는 조직을 다지고 결속력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회운동단체와는 지원과 여론 조성 등에서 연계활동이 가능하여 사회적 이슈를 만들고 이를 해결하는 데 노력하였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따라서 예천형평사분사 창립 제2주년기념식 행사장에서 있었던 사건은 형평사운동에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고, 이로 인한 백정들의 사회적 분위기와 차별철폐에 기여한 바 크다 하겠다.
※ 조선의 형평사 운동에 관한 내용을 2023.9.7. 21:00∼22:00 진주MBC에서 주관 제작하여 서울 MBC에서 방영했다. 이때 예천의 형평사 습격사건이 일부편성되어 방영되었다. 필자가 그 형평사집회 습격사건에 관해 인터뷰 했다.
<참고문헌>
예천군지 1988, 2004.
예천대사전 8권 장병창, 2001.
일제 강점기 동아, 조선일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