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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장사리 문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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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리(진불) 학도병(3)
박문태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영덕)
Ⅱ. 큰 피해의 원인
장사 상륙작전은 적 후방 교란이라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그 작전의 성공은 당장 전멸해도 이상할 게 없는 악조건에서 부대원들이 엄청난 혈전을 벌인 끝에 이룩한 것이며, 작전의 구성이나 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애초에 상술되어 있지만 학도병을 전선에 투입시켰고 이는 소년병의 투입으로 현대 기준에서 전쟁범죄다.
자세한 상황은 보면 볼수록 참담한데, 부대원의 대부분은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으로, 훈련기간은 고작 2주에 불과했다. 즉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콩 튀듯이 흩어지거나 적군에게 항복하지 않은 것만 해도 용기가 엄청나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병력을 가지고 앞서 언급했듯이 수적으로 엄청나게 우세하며 전차와 포병의 지원을 받는 조선인민군 정예부대를 상대로 며칠간 혈전을 벌인 것이다. 지급된 전투복과 무기는 모두 노획물자였다. 당시 한국군에도 무기를 비롯한 물자가 모자랐고 노획무기는 적지에서 탄약을 노획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원이 미흡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부대의 유일한 지원장비는 LST 1척으로, 해당 함선은 상륙전용이라 원양항해에는 부적합하며 고작 1척으로 상륙과 이후 철수를 모두 담당해야 하므로 유사시 탈이 나기 쉬웠으며 이 점은 현실화되었다. 덕분에 상륙 초기부터 적의 집중사격으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고 그나마 없는 탄약과 장비를 망실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동행했던 구축함 엔디코트 함이 문산호를 선도하며 최대한 화력지원을 해 주어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였다. 유사시 지원대책에 대한 사전 준비가 사실상 전무했다.
당장 상륙선이 좌초하면서 무전기가 바닷물을 먹어서 상태가 영 안좋더니 곧 고장나서 공군의 지원이나 함포사격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예비로 쓸만한 함선도 없어서 문산호가 좌초되자 대신 이들을 구출할 함선을 찾아내는 데 시간이 걸렸으며, 구출에 나선 조치원호를 근접 호위할 전력도 매우 부족했다. 덕분에 조치원호 근방에 박격포탄이 떨어지면서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40여 명이 철수하지 못하고 포로가 된 것이다.
참전 용사들의 말에 따르면 출발 전에 육군본부 작전참모(강문봉)가 “너희들이 주인공으로서 국가를 살릴 수 있다.”는 말과 문산호 뒤를 따르는 수백 척의 배를 보고 영웅 된 기분이라고 생각했지만 해가 지고 난 이후에 다시 보니 따라오던 배가 한 척도 없었다고 한다. 3일간의 전투만 진행한다고 딱 3일간의 전투물자만 지급했다. 때문에 상륙 당시의 혼란 및 철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의 주력부대와 교전하는 막장사태가 벌어지자 식량과 탄약이 모자라게 된다.
이 상황에서 무려 4일간이나 버틴 것이 기적이다. 다행히 상륙 후에나마 미 해군의 95.2기동전단이 발벗고 달려와 화력지원은 물론 식량과 탄약도 일부 보급해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미 해군 순양함과 구축함의 지원이 없었으면 전투력이 빈약한 유격대대는 철수 준비가 완료되기 전에 북한군의 반격에 전멸했을 것이다.
해당 작전이 끝나고 서울을 탈환한 후 북진 작전이 시작된 시점인 1950년 10월 5일에서야 부대원들에게 입대명령과 036군번이 내려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그 때까지는 법적으로는 군번도 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싸운 셈이다. 부대원들은 장사 상륙작전이 끝나고 부산항에 도착한 후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가 창설돼서 자신들이 거기 속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이후 부대원들은 11월 말까지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서 적 패잔병 소탕 임무에 종사하다가 12월 19일 자로 서울에서 부대가 해체되고 일부 인원은 장교로 지원하고 대부분은 사병으로 2사단 32연대에 편입되었다. 당시 부상으로 입원해 있던 이명흠 부대장이 나중에 이를 알고 극력 항의했으나 조치는 되돌려지지 않았다.
Ⅲ. 잘못 알려진 부분
1. 상륙일 2010년대 이전에는 9월 13일 부산항 출항, 9월 14일 장사해안 상륙으로 알려졌으나 2010년대 이후 1차사료들이 많이 발굴되면서 원래 작전계획은 9월 13일 출항, 9월 14일이 맞지만 당시 태풍으로 작전일이 하루 연기되어 실제로는 9월 14일 부산항 출항, 9월 15일 장사해안 상륙으로 정립이 되었다. 영화 장사리 보기전 곡 봐야할 실제 생존자들의 기록 – 27분부터 상륙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2. 작전 참가 인원수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등과 언론 기사에서 772명은 순수 학도병 인원수이고 지휘관인 국군 장교 및 기간병까지 합치면 독립 제1유격부대 인원수가 800명대로 알려졌지만 독립 제1유격부대의 총인원수가 772명으로 학도병 인원수는 700명대 초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3. 작전의 목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남보람 박사는 장사 상륙작전이 인천 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잘못된 이해라고 지적하였다. 양동작전이 성립하려면, 장사 상륙작전으로 인해 주공점인 인천의 방어태세가 약화되거나 어느 쪽이 주공점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어 혼란에 빠뜨리는 효과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천과 장사동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서로 영향을 줄만한 여지가 없었다. 장사동 상륙부대 격퇴에 동원된 북한군 부대들은 애초에 인천에 투입될 수 없는 부대들이었다. 그리고 장사 상륙작전의 규모는 누가 보더라도 인천 상륙작전에 비해 매우 작고, 상륙 지점의 전략적 가치도 크게 차이가 나서 주공점을 오해할 여지가 없었다. 만약 인천 상륙작전에 영향을 줄 의도가 있었다면, 두 작전이 같은 날(9월 15일) 시행된 것도 말이 안 된다. 예컨대 앞서 이야기 한 군산 습격작전은 인천 상륙작전 이틀 전에 시행되어, 인천에 증원될 수 있는 병력들이 군산 방향으로 전환되는 기만 및 교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소규모 공격으로 북한군 지휘부의 정세 판단에 혼란을 줄 목적이었다면 군산 습격작전처럼 하루 이틀이라도 먼저 실시되어야 했다. 따라서, 장사 상륙작전은 인천 상륙작전이 아니라 뒤이어 전개될 미8군의 낙동강 전선 돌파작전을 위한 후방 교란작전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실제 위에 인용한 육본 작전명령 제174호도 이러한 취지로 작성되었다. 군사학적으로 엄밀히 따지자면 이러한 남보람 박사의 지적은 타당하다. 다만 일반인들은 인천 상륙작전이라 하면 인천 상륙과 낙동강 전선 돌파를 포함한 유엔군의 역습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심지어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도 위에 인용한 전후 서한에서 보듯이 이러한 맥락에서 장사 상륙작전을 “인천 상륙작전을 지원하여 수행한 작전”이라 평했다. 이러한 넓은 의미의 인식에서 본다면 100% 잘못된 평가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Ⅳ. 잊혀진 영웅들?
1997년 3월 6일 해안을 순찰하던 해병대 수색대가 좌초된 문산호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잊혔던 ‘장사 상륙작전’이 밝혀진 것으로 표기하는 뉴스 기사들이 있으나, 사실은 영덕군과 ‘영덕 장사 상륙작전 유격 동지회’가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문산호 인양작업에 착수하고 해병1사단 수색대원 12명이 수색 작업에 투입된 것이다.<1997년 3월 조선일보 뉴스 기사>
또한, 학도병 대부분이 전사한 전투, 전문가들도 잘 모를정도로 잊힌 전투 등으로 뉴스기사들에 묘사되고 있으나 국방부의 기록물이나 언론의 출판물, 심지어 1980년대 반공만화물에서 까지 장사 상륙작전에 대한 서술과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일반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긴 하지만 전문가들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수준의 완전히 잊힌 작전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정확한 철수인원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640~725명 등으로 엇갈린다. 640명 귀환은 해군본부의 작전경과보고서에 담겨진 내용이다. 당초 840여 명의 상륙병력 중에 39명의 포로를 비롯해 상륙 및 철수 과정에서 1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상륙 후 지상전에서 발생했을 사망자, 미 해군 헬리콥터로 후송된 일부 중상자 등을 감안하면 640명 귀환 쪽이 더 현실적인 숫자로 보인다.
2019년 해당 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 개봉되었다. 김명민(이명흠 역)과 메간 폭스(가상의 종군기자 매기 역)가 주연으로 나온다. 상륙작전 유적지에 묘가 하나 있는데 그 묘는 가묘이고, 발굴한 유해들은 모두 대전 국립 현충원에 안장돼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022년 6월 23일 방영분에서 ‘작전명령 174호 - 돌아오지 못한 소년들’이라는 제하로 소개되었다. 영상에서 당시 전투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이 나와 그날의 일을 설명해준다.
현재 문산호의 상륙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에 장사상륙작전 전승 기념관이 세워졌다. 장사 상륙작전 철수 이후 문산호는 좌초되었던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2016년에 국방TV에서 장사 상륙작전 특집을 촬영할 당시 문산호를 찾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단은 세월의 흐름으로 부식되고 붕괴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당시 인근 주민들의 증언으로 그때 문산호에서 있던 기름을 빼가거나, 부품 몇 개를 떼서 가져갔다고 하니 아마 그렇게 잔해만 남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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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장사리 앞 바다의 문산호 잔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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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호는 비록 군에 징발됐지만 선원들은 여전히 민간인이었는데, 본 작전에서 인민군에게 피격되면서 선장 등 선원 여럿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현재 침몰한 잔해의 인양 혹은 해상 공원화가 추진 중 해변의 천년송 아래에는 수많은 유골을 수습하여 2기의 묘가 있다. 200고지 자락에 귀신나오는 집이라고 하여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있다. “무심한 세월속에 파도는 일고 천년송 가지마다 눈물 맺혔네 더 넓은 백사장에 젊은 꽃피워서 조국의 꽃 되었네 영웅되었네!”
Ⅴ. 마무리
현재는 UN 아동권리협약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이를 금지하는 국제법이 없어 장사 상륙작전에 700여 명에 가까운 중,고등학생들을 학도병으로 투입했다. 그들의 훈련기간은 고작 2주에 불과했고, 이들에게 3일간의 전투만 진행한다고 3일간의 전투물자만 지급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조선인민군 정예부대를 상대로 4일간이나 버티며 혈전을 벌였다. 이들의 전투는 기습적인 인천상륙작전을 당한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방어태세 약화에 기여한 공은 실로 크며, 이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 정신은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본고는 작성자의 견해를 담고 있으며, 다른 연구자들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장사리(진불) 학도병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