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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을 격퇴하고 고려를 구했으나 억울하게 죽임당한 김득배 장군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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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김광수 경북향토사연구회 이사

경상북도가 주최하고 경상북도문화원연합회와 문경문화원이 주관한 제33회 경북역사인물발표회 ‘구국의 영웅 난계 김득배 선생’이 6월 27일 문경문화원 강당에서 열렸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두 번이나 물리쳐 나라를 구한 명장들이 있습니다.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등 장군들입니다. 그 가운데 이들은 그 공에 대한 포상을 받기도 전에 하극상에 휘말려, 그 원인을 밝히지도 못하고 억울한 죽임을 당합니다.

총병관 정세운과 왕의 신임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은 홍건적을 무찌른 큰 공을 세운 정세운을 질시하여 거짓 밀서를 안우·이방실·김득배 장군에게 보내 총병관을 살해하도록 지시합니다, 왕의 밀서로 믿고 안우·이방실 장군은 총병관을 살해하지만 김득배 장군은 처음부터 이를 반대합니다. 김용은 왕을 알현하러 온 안우, 이방실 장군을 총병관 살해의 죄를 씌워 죽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있는 김득배 장군도 살려둘 수 없기에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됩니다. 김득배 장군은 도망쳐 선산인 산양현에 숨었으나 그 가족들이 붙잡혀 고문당하는 과정에서 사위의 말을 들은 아내가 숨은 곳을 알려줘 끝내 체포되고 맙니다. 김득배 장군이 억울함을 밝히기도 전에 상주에서 죽임을 당하고 효수됩니다.

정몽주는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간파하고 왕에게 청하여 김득배 장군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을 지어 그 죽음을 슬퍼합니다. 지공거였던 김득배 장군이 과거에 급제시킨 문생인 정몽주는, 홍건적을 격퇴한 공이 논의되지도 못하고 권력 다툼 속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김득배 장군을 추모합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공양왕 4년(1392년)에 이르러서야 이들의 누명이 벗겨지고 자손들이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려 공민왕 시절에 홍건적을 격퇴한 이야기와 그들의 공을 시기한 한 사람으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독자적인 고려 왕권을 세우기 위해 힘쓴 왕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시죠? 원나라의 내정간섭은 고려 후기 정점에 달했고 기황후(원나라에 공녀로 갔다가 왕후가 된 인물)의 권세를 등에 엎은 기철 등은 기고만장했습니다. 이런 친원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공민왕은 반원 정변을 일으켜 기철, 권겸, 노책 등이 모반했다는 명목으로 제거합니다. 이때 공민왕은 자신의 측근들을 모으는데 김득배도 중앙 정계로 불러들입니다. 이 일이 마무리되자 왕은 공신들에게 봉록과 작·전민을 하사합니다. 이때 김득배도 2등 공신으로 첨서추밀원사(정3품)에 오릅니다. 당시 원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홍건적 등 한족의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홍건적은 고려까지 침입하기에 이르고, 왜구의 침략도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1357년(공민왕 6) 음 8월 15일, 김득배는 서북면 홍두군왜적 방어도지휘사에 임명되는데 서북면 해안까지 왜구가 쳐들어왔고, 그 방어를 위해 홍두군(홍건적)과 왜적(왜구) 방어의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음)11월 20일에 공민왕은 추밀원직학사(정3품) 김득배를 서북면도순문사 겸 서경윤 상만호로, 전 호부상서 김원봉을 서북면 홍두군왜적 방어지휘 겸 부만호로 삼습니다. 김득배는 서북면과 서경(평양)에 대한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직임을 맡습니다.

1358년(공민왕 7) 음 6월 16일에 고려의 서북면과 동북면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자 서북면을 서경과 안주로 나누어 지휘자를 파견했는데, 참지정사 경천흥을 서경군민만호부 만호로 삼고 추밀원직학사 김득배를 부만호로 삼고, 참지정사 안우를 안주군민만호부 만호로, 추밀원부사 김원봉을 부만호로 삼습니다. 추밀원부사 정휘도 삭방도군민만호부 만호로 삼고 상장군 한방신을 부만호로 삼습니다. 이때 이방실은 편비로 출정합니다. 편비는 상황 전개에 맞추어 필요로 하는 곳으로 출정하는 장수입니다. 같은 해 8월 왕은 경천흥을 서북면도순문사, 한방신을 동북면병마사로 삼습니다. 경천흥(경복흥)이 서북면 전체를 총괄 지휘하고 김득배는 그 휘하에서 활동합니다.

1359년(공민왕 8) 정월에 김득배는 첨서추밀원사(정3품)에 임명되고, 8월에 동지추밀원사(종2품)로 승진합니다. 그해 음 11월 29일에 홍건적 3천명 남짓이 압록강을 건너 침략하고 돌아갔으나 도지휘사 김원봉이 숨기고 보고하지 않아 질책을 받습니다. 다음 날인 30일에 왕은 경천흥을 서북면 원수, 안우를 부원수로 삼고 홍건적을 방어하게 합니다. 같은 해 음 12월 8일, 홍건적은 모거경을 선두로 4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하고 부사 주영세와 주민 1천 명 남짓을 죽이고, 9일에 정주를 함락해 도지휘사 김원봉을 죽이고 인주를 함락합니다. 안우가 인주를 공격하자 홍건적은 달아났고 추격하여 30여 명을 베었다고 합니다. 12월 11일 수문하시중 이암이 서북면도원수, 경천흥이 부원수, 김득배는 도지휘사, 서경윤에 이춘부, 서경존무사에 이인임을 임명해 방어하게 했습니다. 이날 홍건적이 철주로 쳐들어오자 안우가 이방실, 이음, 이인우 등과 청천강에 진을 치고 공격하자 홍건적이 물러나 인주·정주에 주둔하였고, 왕은 안우에게 금대를 하사하여 치하했습니다.
12월 16일에 홍건적이 다시 철주로 쳐들어와 주변을 노략질하니 안우가 청천강에서 격파했고, 이를 뒤쫓다가 홍건적 정예병의 반격을 받아 패배해 천호 오중흥과 장군 이인우가 전사하고 사망자가 많이 생겨 정주로 물러나 주둔하였습니다. 경천흥이 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에 주둔했지만 홍건적을 두려워해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안우와 김득배의 부담은 커집니다.
12월 20일 도원수 이암이 서경에 이르지만 군사가 집결하지 않자 황주로 물러나고 안우도 청천강 일대에서 서경(평양) 일대로 후퇴하여 고려군은 황주에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12월 28일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고 29일에 왕은 주사충을 파견해 홍건적 내부를 염탐하게 했습니다. 왕은 도원수 이암을 해임하고 평장자 이승경을 도원수로 임명해 파견하고 전 참의찬성사 권적에게 승병을 주어 출정하게 합니다.
1360년(공민왕 9) 1월 초하루에 왕은 지문하성사 정세운을 서북면도순찰사로 삼고 1월 11일에 판사 김진에게 형부상서를 제수합니다. 1월 15일 김진과 환자 김현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경으로 가서 홍건적 300여 명과 맞서 100여 수급을 베었습니다. 1월 16일 상장군 이방실이 철화에서 홍건적 100여 명을 벱니다. 1월 18일 고려군 2만명이 생양역에 주둔하여 진공하려하자 홍건적은 의주·정주·서경에서 잡은 1만 명을 죽입니다. 1월 19일에 고려군이 서경을 공격하자 홍건적은 용강·함종으로 물러나 주둔합니다. 1월 29일 안우를 안주군민만호부 도만호, 이방실을 상만호, 김어진을 부만호로 임명합니다. 2월 2일 안우 등 고려군이 함종으로 진군했지만 패주하자 홍적이 쫓지만 동북면천호 정신계가 1천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맞아 싸우자 추격을 중지하고 물러납니다. 2월 15일에 다시 함종에서 전투가 벌어져 판개성부사 신부와 장군 이견이 전사하지만 홍건적 2만 급을 베고, 원수 심자와 황지선을 사로잡습니다. 남은 홍건적 만여 명은 증산현으로 물러났습니다.
2월 16일에 이방실이 정병 1천 기로 홍건적을 추격해 연주강에 이르렀고, 안우, 김득배, 김어진도 뒤를 이었습니다. 홍건적이 강을 건너다 수천 명이 물에 빠져 죽고, 남은 홍건적 30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달아납니다.
이처럼 홍건적의 1차 침입을 안우·이방실·김득배를 중심으로 막아냅니다. 왕은 3월 8일 출정군에게 연회를 베풀고 공을 치하하고, 3월 25일에 이승경은 충근경절협모위원 공신, 경천흥은 진충동덕협보 공신, 안우는 추충절의정란공신 중서평장정사, 김득배에게 수충보절정원공신 정당문학, 이방실에게 추성협보공신 추밀원부사를 제수합니다.
1360년(공민왕 9) 10월 정당문학 김득배가 지공거로, 추밀원직학사 한방신이 동지공거로 과거를 치러 정몽주 등 33인을 뽑습니다. 장원급제한 정몽주는 이로 인해 김득배와 한방신의 문생이 됩니다.
1361년(공민왕 10) 겨울로 접어들자 홍건적이 2차로 고려를 침입합니다. 음 10월 20일 홍건적은 반성, 사유, 관선생, 주원 등 십여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에 쳐들어왔고, 왕은 추밀원부사 이방실을 서북면도지휘사, 이여경을 동지추밀원사로 파견해 절령에 책을 세웁니다. 10월 26일에 왕은 참지정사 안우를 상원수, 정당문학 김득배를 도병마사, 동지추밀원사 정휘를 동북면도지휘사로 삼아 군사를 모읍니다. 11월 2일 홍건적이 무주에 쳐들어왔고, 이방실은 병력이 약해 물러나면서 순주, 은주, 성주와 양암, 수덕, 강동, 삼등, 상원 5현의 백성을 정령책으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이방실이 파견한 판사농사 조천주와 좌승 유계조, 대장군 최준 등이 박주에서 홍건적을 격파했고, 예부상서 이순이 태주에서 7급을 베고, 이방실이 지휘사 김경제와 함께 개주에서 홍건적 150여 급을 벱니다. 11월 8일 안우가 파견한 조천주, 정리, 장신보, 이원계, 홍선, 정선 등이 박주에서 홍건적을 공격해 100여 급을 베고, 이방실이 100기의 군사와 홍건적을 공격해 연주에서 20급을 베었습니다. 안우와 이방실이 지휘사 김경제와 휘하 군사와 함께 개주, 연주, 박주 등에서 홍건적을 연달아 격파해 300여 급을 베었고, 안우는 안주에 주둔해 왕에게 승첩을 올리고 왕은 안우를 도원수로 삼습니다. 그러나 홍건적이 11월 9일 안주를 습격하여 상장군 이음, 조천주가 전사하고 김경제가 사로잡힙니다. 11월 12일 참지정사 정세운을 서북면 군용체찰사로, 13일에 전 밀직제학 정사도, 김규를 파견해 절령책을 지키도록 하고 평장사 이공수를 파견해 죽전에 주둔하게 합니다. 16일에 평장사 김용을 총병관, 전 형부상서 유연을 병마사로 삼아 파견합니다. 다음 날 새벽 홍건적 만여 명이 책문을 공격하여 돌파하니 고려군이 무너져 대패해 안우와 김득배 등이 단기로 달아나 돌아옵니다. 11월 18일 안우가 병력을 수습해 총병관 김용 등과 금교역에 주둔하고 김용은 좌산기상시 최영을 보내 군사 파견을 요청합니다. 왕은 위급함을 알고 피난하자 인심이 흉흉해졌고, 홍건적 선봉이 홍의역에 이르러 개경을 위협합니다. 11월 19일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명덕태후와 함께 남행합니다. 어가는 사평원, 광주, 경안역, 이천현에 이르자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합니다. 11월 21일 상주판관 조진이 병력 1,400명을 데리고 와서 대장군 김득제(김득배의 동생)로 하여금 거느리고 왕을 호위하게 하였습니다. 11월 25일 음죽현, 28일에 충주에 머물렀다가 12월 15일 복주(안동)에 이르러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습니다.12월 19일 총병관 정세운을 중서평장사로 삼아 복주를 출발해 출정합니다.
1362년(공민왕 11) 1월 17일 안우, 이방실, 황상, 한방신, 이여경, 김득배, 안우경, 이귀수, 최영 등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개경 동교에 주둔하고 총병관 정세운의 명령에 따라 진군해 개경을 포위하고 총병관 정세운은 물러나 도솔원에 주둔합니다. 1월 18일 새벽 눈비가 내려 홍건적의 수비가 소홀한 틈을 타 권희가 수십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니 홍건적이 혼란에 빠졌고, 모든 고려군이 사면에서 공격하니 홍건적의 두목 사유, 관선생을 베고 일십여 만명의 적의 수급을 베었습니다. 남은 잔당에게 퇴로를 열어주자 일십여 만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도주하고 고려군은 대승을 거둡니다. 이 전투에서 선봉에 선 사람은 안동사람 권희였고, 개경성 사면에서 총공격을 지휘한 사람은 안우․이방실․황상․한방신․이여경․김득배․안우경․이귀수․최영이었습니다.

1362년(공민왕 11) 1월 22일 고려군이 홍건적을 가까스로 무찌르고 개선하려할 때 안우, 이방실, 김득배 삼원수가 ‘왕명’이라는 교지를 받들어 총병관 정세운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김용은 정세운과 왕의 신임을 질투하던 사이로 안우, 이방실, 김득배에게 왕명을 사칭해 교지를 내려 정세운을 죽이라고 밀명을 내립니다. 안우와 이방실은 정세운이 홍건적을 두려워해 진격하지 않고 김용 문서가 이와 같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자 김득배는 정세운을 체포해 데려가 왕의 결정을 듣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안우와 이방실은 군명을 받들어야 한다며 술자리로 정세운을 불러 장사를 시켜 죽입니다. 이는 제장들이 개경성을 포위 공격할 때 정세운이 멀찍이 떨어진 도솔원에 주둔한 것과 공민왕의 최측근으로 전투 경험이 없음에도 고속 승진한 것에 불만을 품었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던 차에 정세운을 죽이라는 왕명이 내리자 안우와 이방실이 받들었고, 공민왕은 2월 25일 복주를 출발해 27일 상주에 머뭅니다. 이때 삼원수를 체포하도록 지시합니다. 2월 28일 안우가 함창현에 이르자 왕이 파견한 유탁이 안우에게 술을 올립니다. 2월 29일 안우, 안우경이 상주 행궁에 나아가 왕을 알현하려 하자 김용이 목인길을 끌어들여 안우를 중문으로 유인하여 문을 지키는 자가 무기를 내려쳐 안우를 죽임니다. 김용은 왕명을 받아 “안우 등이 불충하여 정세운을 천살해 안우가 이미 죽었으니, 김득배, 이방실을 잡는 자는 3등을 뛰어넘어 등용한다”고 방을 붙입니다. 같은 날 이방실이 상주 행재로 가려고 용궁현에 이르자 박춘이 왕명을 전하려고 하자 이방실이 꿇어앉았고 오인택이 검을 뽑아 이방실을 쳤다고 합니다. 이방실은 엎어져 혼절했다가 소생해 달아났는데 정지상이 검으로 이방실을 죽였다고 합니다.
김득배는 기주(풍기)에서 안우, 이방실의 처치를 듣고 도망해 산양현 선영 곁에 숨습니다. 처자가 잡혀 국문을 당하고 동생 김득제는 화산으로 유배되자 사위 조운흘이 장모인 김득배의 아내에게 고초를 당하지 말고 은신처를 말하라고 설득하여 결국 실토하고 맙니다. 3월 1일 김유, 김춘, 정지상, 성원규 등이 김득배(51세)를 체포해 목을 베어 상주에 효수했습니다.

김득배의 문생인 직한림 정몽주는 왕의 허락을 얻어 김득배의 시신을 수습하고 제문을 지어 장사 지냅니다.

“아아 하늘이시여! 나의 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아 하늘이시여!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듣건대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은 하늘이요,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사람입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긴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이치이며,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긴다는 것 또한 무슨 이치입니까? 지난날에 홍건적이 난입하자 <주상께서> 어가를 타고 피난가시니 나라의 운명이 마치 실에 매달린 듯이 위태로웠습니다. 오직 공께서 앞장서 대의大義를 부르짖으시니 온 나라가 호응하였고, 몸소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삼한三韓의 대업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무릇 지금 사람들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잘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누구의 공로입니까?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로로 덮어주어야 옳습니다. 죄가 공보다 무겁더라도 반드시 죄를 자복시킨 뒤에 처형해야 옳습니다. 어찌하여 전쟁터에서 흘린 땀[汗馬]이 마르지 않았고 개선하는 노래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침내 태산 같은 공로를 도리어 칼날의 피가 되게 하였습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에게 묻는 것입니다. 나는 그의 충성스럽고 장한 혼백이 천추만세토록 반드시 구천九泉의 지하에서 눈물을 삼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아! 운명이란 것이 어찌 이러합니까? 어찌 이러합니까?” 『⾼麗史』 권113, 列傳

이처럼 안우, 이방실, 김득배 장군은 전쟁이 끝나자 포상과 표창대신 차례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작업들이 각 지역이나 문중을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상주문화원에서 2016년 문충공 김득배, 상산군 김득제, 낙성군 김선치 등 삼형제를 중심으로 ‘삼원수에 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위의 내용은 학술발표회 내용을 정리하여 수록한 것입니다. 이날 박승대 경상북도문화원연합회장의 개회사, 신현국 문경시장을 대신한 부시장의 환영사, 이정걸 문경시의장과 김삼균 상산김씨대종회장의 인사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김득배 장군의 생거지에 대한 문경출생설이 제기되어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는 ‘난계 김득배 선생 생거지 검증’을 주제로 발표했습니다. 『고려사』, 『태조실록』, 『씨족원류』, 『신증동국여지승람』, 『상산김씨대동보』, 『경북상주지리지』등 문헌자료와 상주문화원 ‘제9회 상주문화와 역사인물학술대회’ 발표 자료, 김제군부인 김제조씨 비문 및 인터넷 자료 등을 종합 검토해 마을 이름의 어원을 살펴 상산(상주) 출생설에 대해 문경 출생설을 검토하고, 특히 김선치 벼루의 출토지로 알려진 예곡과 벼루 뒷면에 적힌 ‘명선치년십이名先致年十二’라는 글자를 통해 김선치의 형인 김득배의 거주지를 헤아려보고, 문경시 흥덕동 깃골설을 검증하여 ‘문경인 김득배’의 위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연구한 결과를 이야기했습니다.

김득배 장군의 출생과 성장에 대해서는 본고 뉴스별곡 2025년 5월 3일자 기사 ‘비운의 고려충신 김득배 장군, 칠백년만에 제자리 찾아 생거지비 세우다 ’https://www.newsbgok.com/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973&idx=10634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김창현 고려대학교 전 연구교사가 ‘난계 김득배의 생애와 업적’을 주제로 김득배 선생의 가계와 문신으로 공민왕을 보좌하기 위해 원나라까지 배행했던 것과 공민왕과의 인연, 공민원의 배원혁명에 조력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 홍건적의 난을 격파하는 과정, 삼원수의 정세운 살해 사건으로 삼원수가 격살되기까지를 시간순에 따라 설명했습니다.

세 번째로 윤용혁 공주대학교 명예교수가 ‘고려망 홍건적 격퇴의 영웅 김득배, 추승과 현창’을 주제로 발표하였습니다. 김득배 장군의 활약과 비극적 운명, 문경 인물로서의 김득배 장군과 ‘김선치 벼루’의 발견, 조선조에 들어와 삼원수를 비롯해 고려시대 백성에게 크게 공이 있는자 16인으로 선정되는 재평가로 숭의전에 배향된 사실, 안우, 이방실 장군에 대한 각 지역의 현창 사업과 기념물을 소개했다. 그리고 김득배 장군과 관련된 주요 유산으로 경기도 연천군 아미리의 연천 숭의전, 경기도 파주시 성동리 소재 파주 고려통일대전, 경북 상주시 낙양동의 상주 김득배 유허비, 경북 문경시 흥덕동 소재 문경 김득배 생거지비, 문경시 점촌3동 소재 김득배 생거지 표지석, 상주박물관에 있는 낙성군 김성치 벼루와 벼루집, 벼루 관련 문적, 경북 상주시 외남면 신상리 소재 옥성서원, 경북 김천시 어모면 구례리 소재 김천 김득배 단소와 제단비 그리고 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에 위치한 대승사 부속암 윤필암의 창건 설화와 관련해 설명했다. 문충공 현창 사업에 대해 지역민들의 인식과 공감대 형성, 문중과 연고지 지역의 연대, 추모제의 정비와 내실화 등에 대해 상세하게 짚고 있습니다.

↑↑ 좌측 두 번째 이창근 회장(사진 김광수 경북향토사연구회 이사)

마지막으로 이창근 난계김득배장군 기념사업회장은 ‘난계 김득배 장군 기념사업회의 발자취’를 주제로 발표하였습니다. 난계 후손과의 인연과 그동안의 연구과정, 행사 진행 과정에서의 어려움과 생거지비 건립 및 기념사업회 발족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행사를 마무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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