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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장사리(진불) 학도병(1) / 박문태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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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사리 문산호


장사리(진불) 학도병(1)

박문태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영덕)

І. 잊혀진 영웅들, 장사리 학도병 이야기(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인천상륙작전 공신 학도병들!

 6.25전쟁의 초반인 1950년 9월 15일,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군을 교란하여 인천상륙작전의 승기를 잡기 위한 작전이 전개되었다. 서해안 인천과 정반대 방향인 동해안 포항 북쪽 약 25㎞ 지점에 위치한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북한군 점령지역인 그곳에서 전개된 성동격서(聲東擊西) 양동작전의 현장!

 장사상륙작전은 학도의용군으로 구성된 육본 독립 제1유격대대(대대장 이명흠 대위 추정) 772명이 중심이 되어 수행한 작전이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05시경 북한군의 공격으로 부대 수송을 맡은 LST 문산함이 좌초하고 다수의 탄약을 유실하는 등 작전 개시 초반부터 난관에 빠졌으나 악전고투 끝에 09시경 전 대대가 상륙하여 북한군 제2군단의 주 보급로인 7번 국도를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9월 19일 구조작전이 진행되어 철수할 때까지 139명 전사, 39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4일 넘게 방어를 지속할 수 있었다. 이 덕분으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낙동강 전선 동부 북한군 전력을 약화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장사 상륙작전은 서두에서도 언급한 성동격서(聲東擊西) 전술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손자병법 제6번)

 현재 장사상륙작전이 수행되었던 영덕군 남정면 장사해수욕장 한 켠에는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과 전승기념공원이 조성되어있다. 2018년에는 열차 동해선 장사역이 개통하면서 동해바다를 품은 휴양지가 되어 그 옛날 전쟁 신화와 함께 어우려져 있다.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육군본부 계엄민사부 동원과장 이명흠 대위가 편성한 독립 제1유격대대였다. 이명흠은 육사 5기 출신의 정훈장교로 개전 이후에는 각종 선무공작을 수행하면서 북한군의 유격전(게릴라전)을 경험했다. 

 당시 북한군에는 항일투쟁, 중일전쟁, 국공내전을 통해 유격전에 경험이 많아 이 작전을 수시로 구사하였다. 정규군의 전면 공격 이전에 유격대를 투입해 염탐을 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통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여러 차례 큰 곤경을 겪었다. 이를 절감한 이명흠은 개전 초부터 육군본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 작전교육국장 강문봉 대령에게 유격대 편성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육군 수뇌부가 유격대 편성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1950년 8월에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 풍전등화의 상황이 되자 공세를 꺾고 반격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유격전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이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되어 이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유격전도 불사할 준비가 된 한국 청년들의 호기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대통령의 뜻이 분명해지자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당시계급2스타)도 긍정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이에 육군은 육군본부 직할로 다양한 유격대를 편성하고 낙오병, 예비병력 등을 긁어모아 잡다한 단기 소규모 작전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강문봉 장군도 이에 맞춰 8월 중순에 이명흠이 희망하던 유격대 편성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병력자원을 조달할 지역이 경상남북도와 제주도로 한정되어 있었고 이 조차도 마구잡이로 징병하여 허겁지겁 훈련시켜 최전선 사단으로 보내기에 급급했다. 이런 마당에 영세한 유격대대 입장에선 별도의 경로로 모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명흠은 안강-기계 전투 도중 8사단 배속이 끝나자마자 대한애국단 단원 수 명을 거느리고 대구역 광장 등 대구 시내를 돌며 모병운동을 했다.

 당시 대구에는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었고 학교 역시 모두 휴교하여 청년 및 학생들이 다수 배회하고 있었다.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예상보다 많은 청년들이 자원을 했다. 그래서 이명흠은 특히 사상이 건전하고 키 크고 담력 있어 보이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병력을 선별했다고 한다. 

 이들은 8월 24일에 대구역에서 화물열차로 밀양역으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이들은 독립군 출신인 최윤동 전 의원이 독자적으로 모병한 청년들과 합류한다. 이렇게 모인 총 760명의 병력으로 1950년 8월 27일에 밀양에서 제1 독립 유격대대, 이른바 ‘명(明)부대’가 3개 중대 편제로 편성되었다. 여기서 확인된 학도병의 수는 677명이며, 나머지는 기간이 되는 정규 장교 및 부사관이다. 

 그러나, 당시 급박한 전황 속에서 보급 순위에서 밀리는 유격대대는 개인 화기조차 지급받지 못한 채 구보 등 체력단련과 정신교육 중심으로 밖에 훈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며칠 뒤 8월 31일에 이 부대는 강문봉 대령 지시로 부산의 육군본부로 이동하게 된다. 

 이들은 부산 문현동에 위치한 육군본부에서 숙식하며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된다. 이곳 부대원들은 당시 정식 군번은 받지 못하지만 임시로 강문봉 명의의 ‘육본직할 유격대원’이라는 대원증을 발급받는다. 그리고 유격전에 필요한 간단한 소화기 사용법 및 교량, 토치카 등의 파괴 방법 등을 교육 받았다. 

 후방에서 적으로 위장할 때를 대비해 북한 출신 대원들을 교관으로 삼아 북한군 군가도 학습 하였다. 이때 훈련에 이용된 화기들도 대부분 모신나강 소총과 PPSh-41 기관단총, 맥심 기관총 등 노획된 북한군 무기들이다. 물자 부족이 그 이유였으나 표면적으로는 유격전 도중 적의 보급물자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1. 작전발동과 활용 출동준비

 1950년 8월 말, 인천 상륙작전의 결행이 결정되자 유엔군 및 한국군은 여러 기만작전을 동시에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서해안에서 군산 기습작전이 준비된 것과 마찬가지의 작전을 동해안에서도 결행하려고 했다.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군산상륙작전의 내용은 이러하다. 

 인천 상륙작전 2일 전인 9월 13일에 웨어(James H. Wear) 소령이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직할 침투중대(Raider Company)와 영국 해군의 자원병들로 이루어진 혼성 특수부대가 영국 해군의 방공호위함 HMS 화이트샌드베이(Whitesand Bay)의 지원을 받아 군산 인근 해안에 공격을 감행한 소규모 양동작전이 있었다. 이 작전에서 미군은 해안 방어부대의 반격을 받아 3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곧장 퇴각하였다. 
 
이와 같이 소규모 특수부대가 동해안 요충지에 치고빠지기 식의 작전을 하자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미군은 제8군 직속으로 새로 창설된 레인저 중대(Ranger Company)를 투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점검 결과 이 부대는 아직 훈련이 되지 않아 실전 투입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는다. 대신 유엔군 총사령부에서는 한국군 육군본부를 통해 영덕~포항 등 동해안 전선을 담당한 제3사단에서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상륙작전을 펼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문제는 9월 초에 포항 일대의 전선이 북한군 제2군단을 상대로 절체절명이었다는 점이다. 일단 영천·신녕 방면에선 북한군 제766부대와 제8사단, 제12사단, 제15사단 병력들이 연이어 전선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고, 동해안 쪽의 북한군 제5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계속 압박을 가해 경주와 영일비행장으로의 돌파구를 뚫기 직전에 있었다. 국군 3사단으로서는 1개 대대 차출도 곤란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안은 한국 육군 입장에서도 매우 매력적이어서 그냥 포기하기는 아까웠다. 이때 육군에서 주목한 것이 제1유격대대였다. 일설에는 제3사단에서 예하 병력을 빼내기 곤란하자 대신 유격대대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도 한다. 편성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제1 유격대대를 부산의 육군본부로 불러들인 것도 이런 양동작전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강문봉은 이러한 작전 내용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가 9월 10일 무렵에야 이명흠을 호출하였다. 강문봉은 이 자리에서 뜬금없이 포항 북쪽 약 25㎞지점에 위치한 적 후방인 장사 해안에 상륙하라 는 지시를 내린다. 

 이명흠은 이제 막 2주 남짓밖에 훈련을 받지 않은 이 부대가 상륙작전을 수행하는건 무모한 짓이라고 항변하였다. 하지만 강문봉은 전선에서 차출할 정규부대는 전혀 없는데다가 포항 지구 전선을 압박하고 있는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력을 꺾기 위해서는 후방 보급 차단이 불가피하다며 무조건 실행을 명령하였다. 당시 인천상륙작전 준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던 이명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륙작전이었지만 육군본부가 다음의 작전명령 제174호로 출동을 정식 명령했으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명령서(군사극비)

 육본 작명 제174호, 육군본부 경남부산, 4283 [15].9.10.16:00
 (1) 적 약 2개 사단 [16]은 포항(1234-1461) 안강(1220-1455)선을 점령하고 계속 남침을 기도하고 있 음.
 (2) 아군 제3사단은 차 적에 대하야 맹렬한 섬멸을 전개하고 있음.군은 일부 부대를 이동하려 함.
 (3) 육본 직할 유격대장은 예하 제1대대를 D일 H시 P장소에 상륙을 감행시켜 동대산(1225-1493)을 거점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제1군단 작전을 유리하게 하라.
 (4) 세부는 작전교육국장으로 하여금 지시케 함.
 …(후략)…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 원문 보기 (국가기록원) 
 위의 명령서 내용에서 보듯 명령서에 시간과 장소는 적시하지 않았고, 이후 구두로 9월 15일에 장사 해안에 상륙하도록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부대는 9월 12일부터 본격적인 출동준비에 들어갔고 작전 불과 2일 전에서야 제1군단으로부터 전투물자를 지급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9월 13일, 출동 전날에 작전을 위한 부대 재편성이 있었다. 기만작전의 성격상 이 부대는 대대급임에도 불구하고 ‘사단’으로 위장(당초 3개 중대, 이후 180명씩 4개 중대로 편성되어 있던 각 중대는 ‘연대’로 호칭하였다. (1중대→제28연대, 2중대→제29연대, 3중대→제32연대, 5중대[18]→제37연대))하였으며, 정규 장교인 지휘관들에게도 모두 임시 계급을 부여해 이명흠 대위는 ‘임시 소장’ 계급을 달았고 각 중대장들도 임시 대령(또는 중령) 계급을 부여받았다. 

 9월 14일에는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정식 출정식까지 거행하였다.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하는 부대들의 경우 보안을 유지하며 조용히 빠져나간 데 반해 이들의 출정식에는 무려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해 육군본부의 고위 장교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출정식 이후에는 육군본부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뒤 트럭을 타고 부산항 제4부두로 이동했다. 이것도 일부러 백주대낮에 대로를 따라 실시하여 시민들의 환송까지 받을 정도였다. 

 편성된지 3주밖에 안 되는 학도병 중심의 대대급 부대의 출정을 사단급 부대의 대규모 작전이라고 의도적으로 과시하면서 역정보를 흘리려는 성동격서라 할 수 있었다. 기만술책은 부두에서도 계속되었다. 부두에는 미군 병력도 대기하고 있었는데, 대대는 탑승할 문산호를 지정받은 뒤에 미군과 번갈아 승선과 하선을 수차례 반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역시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북한 간첩들에게 장사 상륙작전이 사단급 한국군 병력 뿐 아니라 미군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작전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기만술책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최종적으로 16시까지 모든 조치들이 완료되어 출항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기만까지 신경 쓴 그럴듯해 보이는 작전 이면의 지원 내용은 형편없었다. 무엇보다 상륙작전 성공에 필수적인 화력 지원이 매우 부실했다. 당초에 유격대대의 투입을 제안한 제3사단은 훈련이 부실한 이 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미 육군에서도 1개 전차중대와 1개 전투공병소대를 참여시키고 미 해군은 강력한 예비포격을 퍼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과 낙동강 전선의 방어에 역시 전력이 대거 투입된지라 유엔군 총사령부는 이 요청을 단칼에 거절한다. 게다가 막강한 화력의 중순양함~구축함 다수를 이끌고 동해안 포격지원 임무에 투입된 미 해군 95.2기동전단(Task Group 95.2)은 9월 15일에 삼척을 포격할 것을 명령한다. 

 이 바람에 (미군 레인저를 이용한) 상륙작전 논의 초기부터 관여되어 있던 95.2기동전단 전단장 하트먼(Charles C. Hartman) 소장은 아예 상륙작전이 취소된 것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대신 미 해군은 글리브스급 구축함 USS 엔디코트(Endicott)(DMS-35) 함 1척만을 지원해준다. 만약에 상륙 당일 삼척 포격 대신에 95.2기동전단이 일부라도 추가 지원에 나섰더라면 장사 상륙작전의 결과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란 점에서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LST 문산호에 탑승한 병력은 본래의 제1 유격대대 병력 외에도 육군본부에서 통신지원차 파견한 제51통신대 소속의 통신병 12명, 문산호 선원 42명, 해군 헌병 5명이었다. 또한 육군본부는 대대의 부족한 실전경험을 보완하고자 개전 시 제1사단 12연대장이었던 전성호 현역 대령을 전술고문으로 임명하고 연락병 3명을 배속시켰으며, 과거 국민혁명군 출신으로 실전경험이 있던 박영선을 정략고문으로 임명하는 등 총 3명의 민간인도 탑승시켰다. 미 해군 소속으로는 엔디코트 함에서 통신을 위해 파견한 연락장교 1명(해리슨 중위)과 부사관 1명(쿠퍼 상사), 통역 1명이 탑승했다. 이들 총 841명이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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