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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임진왜란시 소천전투(화장산전투)와 류종개 의병장(3)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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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 276-1, 1980년에 밖 안동묘에 있던 충신각을 현재의 위치로 옮김

임진왜란시 소천전투(화장산전투)와 류종개 의병장(3)


방유수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봉화)


Ⅵ. 소천전투에 활약한 의병장 류종개와 의병 장수들

❙의병장 류종개

 류종개(柳宗介,1558~1592)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유(季裕). 경상도 예안현 서면 가야리(現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 가야마을)에서 아버지 권옹(倦翁) 빈(贇)의 3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류종화(柳宗和)와 류종직(柳宗直), 누이 1명이 있었다.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 형제의 삼종제(8촌 아우)이다. 월천 조목(趙穆)선생의 문인으로 1579년(선조 12) 식년  진사시에 2등 14위로  입격하고 정9품 훈도(訓導)를 지내던 중 1585년(선조 18) 식년 문과에 병과 18위로 급제하였다. 

 급제 후 권지(權知:견습 관원)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정9품)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6품)의 관직에 있다가 1591년 부친상을 당하여 향리에 와 있던 류종개는 임진왜란으로 왜적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와서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40일 만에 평양성을 함락하는 등 파죽지세로 우리나라를 유린하는 것을 알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진중규약 16조와 군령 7조로 의병을 훈련시키며 전투에 대비하던 중, 왜군이 화장산의 전피현(箭皮峴:살부령)을 통과할 것을 예측하고 의병 6백을 매복하고 왜군을 일제히 공격하여 서전을 통쾌하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틀 후 왜적의 본대 3천여 명을 맞아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끝까지 결사항전하였으나 류종개 대장을 비롯한 600명 의사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의병장 류종개는 왜군에 생포되어 적이 항복을 강요하며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살가죽을 벗기는 고문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적장을 꾸짖으며 숨을 거두었다. 임진왜란 전투사상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한 의병장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향리의 사족들이 서로 들고 일어나 왜적과 싸워 영남일대의 왜적을 격퇴하였다. 사후 조정에서는 광해군 8년(1616)에 그의 충의(忠義)를 높여 통정대부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증직하고 충신 정려각을 상운면 문촌리에 건립하였다. 봉화 문계서원(文溪書阮) 경현사(景賢祠)에 제향되었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 마장들에 있는 류종개 의병장 묘소(봉화군 상운면 문촌리 산 17)


❙의병 장수들

 김인상(金麟祥,1557~1592) :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시백(時伯). 호는 학산(鶴山)이다. 임진년에 왜군이 쳐들어와 조선팔도와 삼경을 유린당하고 선조대왕이 피난길을 떠나는 국난시대를 맞이하였다. 글 읽고 앉아있던 시골의 올 곧은 선비로써 의분을 참지 못하여 부친이신 백암공에게 허락을 받고, 부인 배씨에게 부모님을 부탁한 연후에 풍산사람 류종개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류종개는 소천 노루골에서, 김인상은 춘양에서 왜군의 침입을 막고 있던 중 적이 대군을 몰아 한꺼번에 쳐들어옴에 끝까지 활과 창검으로 수많은 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마침내 왜적에게 생포되어 낯가죽이 벗겨지고 뼈를 쪼개 높은 나무에 머리를 거꾸로 매달아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적을 크게 꾸짖으며 36세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에 조종에서는 삼강록 충신전에 싣게 하고 풍산 상리마을에 정려각을 세우게 하였으니 고향 안동 풍산 상리마을 삼강당 칠정각에 공은 충신으로 여섯 분의 효자, 열녀와 더불어 위령제향되고 있으며, 선조께서는 친필로 창의 충절을 가리는 만사를 내려, 특별히 공의 기개를 후손에 영원히 귀감하였다.

 임 흘(任屹,1557~1620) :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탁이(卓爾). 호는 용담(龍潭), 부라산인(浮羅山人), 구방재(求放齋), 양심재(養心齋), 주일헌(主一軒) 임흘의 선대는 송나라 소흥부 자계 출신의 명문이다. 1557년(명종 12)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배위는 진성이씨이다.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었으나, 얼마 후에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내성 용담으로 내려왔다. 아마도 내성으로 내려온 것은 모친의 가계와 관계가 있는 일일 것이다. 임흘의 부친은 임태신(任泰臣)이다. 배위는 봉화금씨인데, 임흘은 셋째로 출생하였다. 임태신은 1531년(중종 26)에 출생하여 1592년(선조 25)에 타계하였다. 자는 형길(亨吉)이다. 

 풍천임씨는 원래 송나라 소흥부 자계 사람인 임온(任溫)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후인인 임주(任澍)가 송나라가 망하고 나서 원나라 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왔다가 귀화함으로써 반도에 살게 되었다. 그는 고려 조정에서 어사대부를 역임하였으며, 풍천이라는 관향을 하사받았다. 임흘의 할아버지는 임건(任楗)인데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문인이다. 함양군수를 역임하였다. 임흘의 증조부는 임유겸(任由謙)인데,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소간공(昭簡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해동명신록에 이름을 올렸다. 임흘의 고조할아버지는 임한(任漢)인데, 수안군수를 지냈고, 이조판서를 증직으로 받았다. 

 임흘이 봉화로 내려오는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5년 전의 일이다. 그는 봉화로 내려와 용담이라는 호를 쓰며 산간 생활을 즐겼다. 영천(현, 영주)으로 자주 나아가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에게 배웠다. 박승임은 퇴계 이황의 문도이므로 박승임을 통하여 퇴계의 재전 제자가 된 셈이다. 박승임의 가르침에 감흥을 받은 임흘은 스승에게 몽매기(夢寐記)라는 시를 지어 바쳤다.

선생님 곁에는 봄바람만 불어들었어라
언제 다시 고요한 방에 같이 앉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으랴
그리운 이 마음은 돌아갈 곳 없누나
행여나 꿈에라도 뵈올 수는 없을까

 스승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가득한 시라고 하겠다.

 임흘이 한강 정구를 스승으로 모신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한강 정구는 예학에 관심이 많았고, 임흘 역시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예학에 몰두하였다. 정구는 임흘에게 “나는 그대와 같이 예를 좋아하는 사람과 늘 더불어 논의하지 못함이 애석하다.”는 글을 주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의 발발은 임흘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여 준다. 임흘은 유종개와 더불어 창의하여 내성병을 이끌고 적과 맞선다. 유종개가 내성의진의 대장, 임흘이 부장이었다. 살부령 전투에서 적의 매복에 걸려 대장 유종개를 비롯해서 유흠신, 유흠도, 김인상, 권경 등이 전사하고, 임흘은 김중청과 간신히 빠져 나와 살 수 있었다. 

 임흘은 흩어진 의진을 규합하여 대장이 된다. 김용이 좌부장, 이화가 우부장이었다. 임흘과 김중청이 수습한 살부령에서 살아남은 의병 세력에 김용이 이끌고 온 1백여 명의 병졸, 김용의 아우 김철이 거두어 온 승병 50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규모의 의진이었다. 이러한 규모의 의진으로써는 적과의 전투를 효과적으로 진행시킬 수 없었으므로, 임흘은 나중에는 자신의 의진을 이끌고 근시재 김해의 막하에 들어가 싸움을 계속하였고, 1593년에 근시재 김해가 경주의 진중에서 타계하자 망우당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가 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흘은 문경전투와 당교전투에서 일정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이 후 부친상을 당하여 귀향해서 임흘의 의진 생활은 끝이 난다.

 김중청(金中淸,1566∼1629) : 자는 청지(淸之). 이화(而和), 호는 구전(苟全), 본관은 안동이고, 봉화(奉化)에서 살았다. 태사(大師) 선평(宣平)의 후손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몽호(夢虎)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병인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통하여 선생이 그를 매우 인물감으로 여겼다.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임진(1592)년에 류종개(柳宗介) 공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고, 경술(1610)년에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리에는 본현의 의병장이 되었다. 일찍이 천추사(千秋使)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조정에 나아갔을 때 황태후(皇太后) 상을 만났다. 

 공이 문장과 경술(經術)로 동류들의 추중을 받았다. 혼조(昏朝)를 만나 조정에서 벼슬할 마음이 없었으나, 거듭 어버이의 뜻을 어기고 애써 녹봉으로 봉양하는 일을 하게 되었으며, 스스로 ‘구차하게 보전한다.’는 의미의 구전(苟全)이란 호를 한 것도 바로 그 뜻을 표현한 것이었다. 만년에 한가로이 시골집에서 생활하면서 생도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즐겼다. 숭정(崇禎) 기사년에 세상을 떠났다.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가 현재는 송록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윤흠신(尹欽信, ~ 1592) : 본관은 예천으로 춘양에 살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흠도(欽道)와 더불어 자진하여 의병장(義兵將) 류종개(柳宗介)의 군(軍)에 참여하였다. 소천(小川) 전투에서 전사(戰死)하였으며 정려(旌閭)되었다. 이때 전사한 윤흠신의 목없는 시신을 전장에서 부하가 발견하고 그 시신을 업고 진평동에 와서 동네사람에게 장례를 치러줄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 본인도 죽거든 장군님 발 아래에 묻어줄 것을 말하고 자결하여 그 부하도 윤흠신 묘 아래에 묘를 썼다고 한다.

윤흠도(尹欽道,1567~1592) : 본관은 예천으로 춘양에 살았다. 자는 홍지(弘之), 별동(別洞) 상(祥)의 후손이자 윤흠도의 동생으로 융경(隆慶) 정묘년에 태어났다. 풍류가 고매하고 재능이 비범하였다. 임진년에 형 흠신(欽信)과 더불어 참의 류종개, 처사 임흘과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형제 모두 전몰했다. 뒤에 관직이 추종되고 정려(旌閭)되었다. 단곡(丹谷) 곽진(郭晉)이 지은 공의 정려문에서 “형제가 함께 처사 물암(勿巖)에게 수학했다.”하였다.

금 은(琴 ????,1533~1592) : 봉화인으로 자는 여임, 호가 고암인데 계의 손자로 일찍이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 진세하였다. 그는 청량산의 용운정사에 머물면서 문장에 대해 논의할 때 조리 정연하게 사례를 들어 심오한 학문의 밑바탕에 근거하여 퇴계에게 문의하자 선생이 극찬하시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또한 효자로서 세간에 널리 알려졌고, 형제와 친우간에도 우애가 돈독 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문객인 류종개 대장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창의 종군하다가 소천전투에 참가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선조는 금은의 공을 높이 인정하고 공조참의의 증직을 내렸다.

권현수(權賢秀,1564~1592) :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자는 탁이(卓爾)로 태사의 후손이고 이차자 극수원종공(二次子 克秀原從功)이며 증(贈) 형조참의(刑曺參議) 언기(彦紀)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종형 판관(判官) 충남(忠男)과 함께 의장종사관(義將從事官)으로 류종개의 휘하에서 분전하다가 장렬히 순국했다. 저서로는 낙양세교(洛陽世橋)가 있다.

권 경(權 檠) : 군관으로 참여함


Ⅶ. 임란의병전적지 '충렬사'가 '육백의총(六百義塚)'으로 지정되기를 바라며

 류종개 의병장 등 600의병의 눈부신 전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봉화 충렬사는 찾아오는 군민이나 답사자가 별로 없는 것일까? 아니, 소천전투에 대해 아는 이가 드문 것일까? 왜 임란의병전적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면서 봉화군과 임란의병선양회와 유족회는 봉화 임란의병전적지 충렬사를 '국가사적' 으로 지정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현재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재청의 관리를 받는 금산 '칠백의총'과 남원에 있는 '만인의총'의 관리 실태를 알아본다.

 문화재청 칠백의총 관리사무소는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번지에 있다. 금산 칠백의총(錦山七百義塚)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의병장 조헌(趙憲)선생과 의승장 영규(靈圭)대사가 이끄는 칠백여명의 의병이 조국 강토를 지키기 위해 만오천여 명의 왜적과 싸우다 모두 순절하자 그분들의 유해를 함께 모셔놓은 곳이다.

 칠백의총은 1963. 01. 21. 국가에서 사적으로 지정 1975. 12. 19. 문화공보부 직속기관으로 칠백의총 관리소 신설(대통령령 제7890호) 1999. 05. 24. 칠백의총 관리소 직제 제정-대통령령 제16347호(문화재청과 그 소속기관 직제)이며, 현재 칠백의총 관리사무소는 소장 1명, 서무직 5명, 관리직 13명, 학예직 13명 등 총 32명이 관리하고 있다.

 문화재청 만인의총 관리사무소는 전라북도 남원시 만인로 3번지에 있다.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년)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관·군 1만여 의사들의 호국의 얼이 서려있는 성스러운 곳이다.

 만인의총은 1963. 01. 21 사적으로 지정, 1982. 07. 15 전라북도에서 남원시로 관리 이관, 1987. 01. 01 남원시에서 전라북도로 관리 이관, 2016. 05. 10 전라북도에서 문화재청으로 관리가 이관되었다. 현재 만인의총 관리사무소는 소장 1명, 총괄팀장 1명, 서무직 4명, 관리직 5명 등 총 11명이 관리하고 있다.

↑↑ 충신각 정려기(만력44년, 광해8년, 1616년)

 칠백의총과 만인의총 관리실태를 확인한 바, 결론적으로 봉화임란의병 전적지를 찾는 지역 사람이나 답사자가 많지않은 것은 임란의병전적지의 명칭이 ' 충렬사'로 되어 있으며, 진입로가 충렬사 인근에 있는 대각선원인 '대각사' 진입로와 같이 되어있어 '임란의병전적지'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건물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사찰의 건물이라고 착각하기 쉽고, '임란의병전적지'라는 현충시설 표지판도 따로 표시되지 않고, 교통표지판에 작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도 경찰서 교통단속기에
가려서 쉽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충렬사'란 명칭은 이순신 장군 현창사업과 관련하여 전국에 수없이 많이 있어서 '임란의병전적지'라고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바, 남원의 '만인의총', 금산의 '칠백의총'처럼 봉화 충렬사도 '육백의총(六百義塚)'으로 명칭을 개칭하고, 봉화군에서는 '국가사적'으로 지정받아 문화재청에서 관리토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류종개 충신각 안내판

 충렬사에는 '임란의병전적지' 현충시설표시와 '충렬사' 안내판을 세우고, 상운면 문촌리 산 17번지 마장들(馬場坪,마장평)에 있는 류종개 의병장 묘지 입구 도로변에도 '류종개 의병장 묘소'  안내판을 세워서 지역민과 봉화를 찾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군민들의 회의 및 교육시에 향토문화유적 현장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공무원과 군민들이 인식토록 하여야 한다. 봉화교육청에서도 지역 학생들에게 향토사 수업의 일환으로 현장학습 기회를 제공하여 지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널리 알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금산 의병들은 칠백의총 명칭으로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어째서 같은 임진왜란 때 전사한 봉화 600의병들은 육백의총 명칭도 받지 못하고, 국가에서 관리해주지도 않으며 표지판도 제대로 된 게 없는가 생각해 보면서, 상운면 문촌리에 있는 류종개 의병장 충신각과 묘소를 문화재로 지정을 받을 수 있도록 봉화군과 군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우려야 할 것이며, 비문이 마모된 류종개 의병장의 묘소에 새로운 비석이 세워지기를 기대하면서 '충렬사'의 명칭도 '육백의총(六百義塚)'으로 불려지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1. 노영구 국방대학원 교수의 논문 인용
2. 오마이뉴스 정만진 시민기자 기사 인용
3. 선조수정실록 인용
4. 나무위키 인용
5. 봉화임진왜란의병전적기념비 인용
6. 임란의병전적기념비 인용
7. 유교넷 인용
8. 칠백의총 홈페이지 인용
9. 만인의총 홈페이지 인용 끝.


이상으로 임진왜란시 봉화 소천전투(화장산전투)와 류종개 의병장의 글을 마칩니다. 금산 칠백의총, 남원 만인의총처럼 류종개 의병장과 함께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장렬히 전사한 분들을 기리는 충렬사가 봉화 '육백의총'으로 불려 많은 분들이 그 거룩한 뜻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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