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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릉칡소(사진 경상북도 울릉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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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 칡소
Ⅰ. 소의 기원과 한반도 유입
현재 가축으로 키우는 소는 2만 년 전 인도에서 출현한 이래 유라시아, 북아프리카, 인도에서 각각 야생종으로 분포한 오록스(Aurochs; Bos primigenius) 종으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전해진다. 소에 대한 가장 오래된 인류의 기록은 구석기시대인 약 17,000~15,0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Cave of Altamira)과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Lascaux Caves)의 벽화로 여겨지고 있다.
이 벽화에 묘사된 들소는 현재의 소와 모습이 거의 동일하며 벽화 표면에는 돌이나 화살을 맞은 흔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구석기인들이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기 위해 사냥 대상인 소를 그리고 돌이나 화살 등을 쏘아 맞추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몹시 거칠고 사나우며 힘이 센 들소는 강력함의 상징이며 가장 좋은 사냥감이었으므로, 원시인들은 소를 사냥하러 나가기 전 이러한 의식적인 행위를 통해 두려움을 없애고 용감하게 사냥에 임했을 것이다.
선사시대 이후 농경사회에 접어들면서 소는 인류에게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초식동물인 소는 개 다음으로 가축화되었으며 그 시기와 장소는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7,000년 전쯤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추정된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현재의 이라크, 시리아, 이란 등의 중동지역으로 이곳의 도시 유적들에서 많은 수의 소뼈가 발견되었다. 유럽에서는 기원전 2,800년 전으로 추정되는 스위스의 호반(湖畔) 유적이 소의 가축화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소는 중국 북부와 한반도 등지에서 약 2,000년 전부터 가축화되어 농경과 짐 운반 등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반도의 소는 시베리아 등지에 서식하던 유럽원우(Bos Primigenius) 계통이 중국 북부를 거쳐 이동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야생종은 중국 남부에서 인도원우의 야생종과 교잡을 이룬 후 한반도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우, 중국 황우, 연변 황우의 생명공학 및 유전학적 연관성에서 증명되었다. 이후 소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도 건너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시아로 들어온 소의 시조 격으로 여겨지는 유럽원우는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육우인 보스 타우러스(Bos Taurus), 계통과 어깨 부위에 견봉이 있는 아시아원우(Bos Namadicus)의 후손인 보스인디커스(Bos Indicus) 계통으로 분류된다. 이외에도 버펄로(Buffalo), 가얄(Gaual), 바이손(Bosom), 야크(Yak) 등이 있다.
Ⅱ. 우리 역사 속 고대 사회의 소
삼국시대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소를 사육하고 활용한 정황이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것, 이동 수단으로 삼는 것, 제례에 활용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서에 나타난 우경의 첫 기록은 신라 지증왕 때이다.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농사를 권장하도록 명하니, 비로소 우경(牛耕)이 시작되었다.”
위 삼국사기는 지증왕 3년(502) 지증왕이 지방의 관리에게 명령하여 우경이 본격화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우경이 시작된 시기는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도 가평 이고리 출토 보습(원삼국시대 추정)이 비교적 이른시기 우경 관련 유물로 확인되며, 집안(集安), 무순(撫順), 평양 등 고구려 지역에서도 다양한 철제 보습이 발견되었다. 특히 357년 축조된 고구려의 안악 3호분 벽화에는 코뚜레를 한 소가 그려져 있어 당시 소를 순복시키는 기술이 발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6세기 이전 경상도 지역 고분과 유적에서 우경 관련 유물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신라 지증왕 이전에 우경이 도입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4세기 후반 신라에 선진 문물을 전파했던 고구려에서 우경을 농사에 활용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5세기경에는 신라에도 우경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5세기에 신라에 우경이 보급되었다고 본다면, 당시 신라와 활발하게 교류했던 백제에서도 그와 비슷한 시기나 그보다 이른 시기에 우경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향촌 지배를 위해 작성한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에는 촌락의 호구는 물론 사육하는 소나 말의 사육 두수까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원경(西原京: 지금의 청주)의 관할 아래 있던 사해 점촌의 경우 인구 147명의 마을에 소 사육 두수가 22마리나 되었는데, 촌민 6~7명당 소 한 마리 정도의 비율을 보여 소 사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사육한 소는, 우경, 운송수단, 고기 등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소가 이동 수단으로 활용된 사례는 고구려에서 비교적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고구려에서 수레는 말이 끄는 것과, 소가 끄는 것으로 구분되었는데, 남성은 주로 마차를 탔고, 여성은 우차를 타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한다. 또한 3세기 무렵 진한 지역에서 사람들이 우마(牛馬)가 끄는 수레를 탔고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년(438)에는 백성들에게 우차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리는 등 신라지역에서도 소를 이동 수단으로 활용한 정황이 확인된다. 물론 사람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편하게 이동시키는 데에도 사용했을 것이다.
소를 제례에 활용하는 일은 상고시대부터 행해졌고, 삼국시대에도 이어졌다. 우선 고구려에서 소를 제례에 활용했던 경우를 찾아보면, 북송 때 편찬된 사서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 신부를 맞이하며 이를 기념하고자 소를 죽여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며, 또 당나라 때 편찬된 『한원번이부(翰苑蕃夷部)』에 따르면 고구려는 전쟁을 앞두고 큰 규모의 제천행사를 거행할 때 소를 잡아 발굽이 갈라지는 여부를 보고 길흉을 점쳤다고 한다. 고구려인들은 점을 친 후에 잡은 소를 하늘에 제물로 바치는 제천행사(祭天行事)를 거행하며 며칠 밤낮을 춤추고 노래하며 신을 기쁘게 하고 음식을 나누는 축제를 벌였다. 점을 친 후에 하늘에 제물로 바쳐진 소로 만든 음식은 연회에 참석한 이들에게 귀한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소를 함부로 도축하면 노비가 되는 처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소고기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웠다. 이외에도 나주 복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소뼈와 많은 수의 제사 용구들은 백제에서도 소가 제례에 활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신라 왕실은 제례를 담당하는 제전이라는 관직을 설치하고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준비토록 하였다. 『삼국사기』의 잡지(雜志) 제사조(祭祀條)에 따르면, 신라는 매년 12월에 신성(新城) 북문(北門)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해가 풍년이면 대뢰(大牢)를 잡고 흉년이면 소뢰(小牢)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대뢰는 소를, 소뢰는 양이나 돼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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