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2025년 4월 24일 한국금거래소 기준, 3.75g을 사려면 665,000원을 부담해야 한다. 2022년 6월 1일에 315,000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불과 3년 사이에 100%나 올랐다. 예전엔 아기 백일이나 첫돌에는 보통 금반지를 선물했는데 요즘은 너무 비싸 옷이나 장난감, 현금으로 대체되고 있다.
올해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이 주관한 군민참여강좌 중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귀금속제 장신구이다. 예나 지금이나 반짝이는 물건은 사람의 눈길을 끌게 마련이다. 특히 고분이나 왕릉을 발굴하면 가장 관심이 쏠리는 부분도 금은 장신구가 아닐까한다. 예전 권력층이나 부자들의 위세품이 요즘은 일반인들에게도 보편화되어 있다.
성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장신구 외에도 토기, 무기, 말갖춤 등이 있는데 대분(48호)이나 팔도분(53호) 같은 경우, 일제 시대에 조선고적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도굴되었고, 2021년과 2022년 재발굴 조사 당시 대분(48호분) 주변 석실묘에서 금제이식과 은제이식이 발견되어 대분에는 본디 많은 유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김재열 국가유산진흥원 남부조사1팀 파트장의 강의로 '성주 성산동 고분군과 신라의 귀금속제 장신구 문화'를 주제로 성산동 고분군 귀금속제 장신구의 종류, 신라 귀금속 장신구와의 유사성, 신라 귀금속 장신구 문화와 흐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고고학 용어라서 그런지 한자로 된 명칭이 많다.
성산동 고분군 발굴은 지금까지 크게 3차례로 나눠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1918년~1920년 일제강점기, 두 번째는 1986년~1987년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서 봉토분 5기를 발굴·조사, 세 번째는 2000년대 이후 사적 정비 발굴로 나뉜다. 그리고 2021년~2022년 48호분에 대한 재발굴이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고분에 대한 번호가 새롭게 부여되었는데 예를 들면 舊1호분은 56호분, 舊2호분은 57호분처럼 일제시대에 부여했던 번호를 전문가들이 체계적으로 고분군 전체를 조사하면서 재부여했기 때문이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귀금속제 장신구의 종류로는 세환이식(가는고리 귀걸이), 은제관식(은제관 장식), 허리띠 띠꾸미개, 띠고리, 띠끝장식, 장식대도, 금제 태환이식(금으로 만든 굵은고리 귀걸이), 은제 반지, 은제 팔찌, 환두대도(둥근머리 큰칼) 등으로 약 70여 개가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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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제 관식 |
| 먼저, 은제 관식은 56호분(舊1호분) 출토유물로 은제 조익형 관식(새날개형 관꾸미개) 계열로 무익형(날개 장식이 없는 형식)이다. 이는 경주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과 비슷한 모양으로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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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제 허리띠 장식과 장신구들 |
| 은제 허리띠 장식은 56호분(舊 1호)에서 출토된 은제 투조 삼엽문 과판으로 띠꾸미개 33점, 띠고리 1점, 띠끝장식 1점이 있다. 이 허리띠는 황남대총 남분 은제 허리띠 장식과 같은 계열로 보이고, 은제 역심엽형 허리띠 장식은 55호분(舊57호분)에서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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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제 팔찌와 반지 |
| 은제 반지와 팔찌는 52호분(舊58호분)에서 출토되었는데, 은제 반지는 은판을 손가락 모양에 맞춰 둥글게 말았고, 양끝이 살짝 떨어져 있어. 이와 비슷한 마감 방식이 금령촌 반지에서도 보인다. 은제 팔찌도 가늘고 납작한 은판을 둥글게 말아서 단순한 형태로 만들었으며 팔찌 양끝이 살짝 떨어져 있다. 이는 경주식 팔찌가 양끝을 이어 둥글게 만든 것과 차이를 보인다. 이는 성산동 고분군의 독특한 기법이며, 실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분을 위한 장례품으로 준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 미루어 5세기 후엽이나 6세기 초엽에 성주 성산동 지역의 현지 장인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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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제 태환이식 |
| 금·은제 귀걸이는 56호(舊1호), 52호(舊58호), 51호(舊38호), 54호(舊39호), 55호(舊57호), 49호, 48호(대분) 주변 석실묘 출토품이 있다. 이 가운데 56호와 52호 금제 귀걸이의 중간장식은 같은 소환입방체(작은 고리를 이어 붙여 만든 입방체)로 신라 귀걸이 중 초기 형식이며, 황남대총 남분에 이와 같은 귀걸이가 여러 개 부장되어 있다. 이로써 56호와 52호의 조성 연대가 근접함을 보여준다. 51호(舊38호), 54호(舊39호), 55호(舊57호)에서 출토된 금은제 세환이식(가는 고리 귀걸이)은 중간장식이 생략되어, 가는 고리 2개가 이어진 종류, 금피나 금봉으로 간단한 형태를 보이는 고리형 귀걸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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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최근 48호(대분) 주변 석실묘에서 발굴된, 금제 귀걸이 2점(금제 세환이식)과 은제 귀걸이 2점(은제 세환이식)을 살펴보면, 금제 세환이식은 굉장히 세밀하게 가공되었으며, 주환, 유환, 중간장식, 드림, 연결구가 이어진 구조로, 크기는 길이 6.1cm, 너비 2cm이다. 이는 신라 원통형 중간장식 계열로, 기본형인 황남대총 북분 귀걸이에서 점차 형식이 달라지는 금관총, 황오리 33호, 월성로 가5호, 미추왕릉전 4구역3호, 천마총, 은령총, 보문동 귀걸이처럼 발달형에 속한다. 이로 미루어 경주 중심권에서 제작되어 성주 성산동으로 이동해 제48호 주변 석실묘 주인공의 부장품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금제 세환이식의 연대는 금관총부터 천마총(5세기 후반~6세기 초) 사이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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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호분 주변 석실묘 발굴 금은제 세환이식 |
| 금제 세환이식은 경주식 물품과 공통된 외형, 기술, 장식 기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성주 성산동과 신라 중심지 양대 집단이 귀금속 장신구를 매개로 공통된 ‘신라식 위세품 체계’아래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음을 보여 준다.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초엽 신라 전역으로 경주식 귀금속 장신구 사용이 대거 확산되던 시기에 전해진 것으로, 성산동 고분군 조영 집단이 성주 지역권 중심세력임을 말해준다.
은제 세환이식은 중간장식이 없고 주환, 유환(2점), 드림만 있는 간략한 구조로, 크기는 길이 5.7cm, 너비 2.7cm이다. 이 귀걸이는 일반적인 신라 귀걸이와는 다른 ‘간이형 귀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드물게 출토되며, 경산지역 임당동 고분군 7B호·7C호, 경산지역 조영동 고분군 EⅠ-2호, 대구 시지, 경산 북사리 고분군, 경주 황남동 109호 세환이식과 황오리 14호 1곽 태환 이식이 있다. 성산동 고분군 51호(舊 38호분)에서도 같은 형식이 출토되었다. 경주 지역의 간이형 귀걸이는 앞서 황남동과 황오리에만 한정되며 대부분 중간장식을 갖춘 온전한 형태의 귀걸이 비중이 대부분이다. 간이형 귀걸이는 이례적 사례이다.
은제 세환이식은 신라에서 만들어 성산동으로 왔다기보다 성주 현지에서 활동한 장인이 만든 물품일 가능성이 크다. 은제 세환이식의 연대는 금관총에서 천마총 시기이다. 48호분보다 앞선 51호분(舊 38호분)에 같은 형식 귀걸이가 출토되어 앞쪽(금관총)에 위치시킬 수 있다.
금제 귀걸이는 석실 매장부 북벽 쪽에서 2점이 서로 떨어진 채 발견되어 본래 부장 위치에서 이탈됐음을 보여주고, 은제 세환이식은 매장부 남벽 중앙에 가지런히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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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진 가암리 금동관 |
| 성산동 고분군 상설전시실에는 1976년 2월 9일, 벽진면 가암리에서 도굴꾼에 의해 발견된 가암리 금동관을 홀로그램으로 만나볼 수 있다. 가암리 금동관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대략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이 위쪽에 부착되어 있고, 아래쪽 원판에는 18개의 달개가 있는데 달개 끝에 달린 장식용 드림은 사라지고 없다. 이 금동관은 전 고령금관과 비슷하며 신라식 금관보다 가야 금관에 가까운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도굴꾼에 의해 발견되어 이에 대한 제작 배경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수지형 대관은 신라 관 문화의 표지 물품이다. 傳 경주 교통 금관은 1973년 도굴범에 의해 발견됐으며, 현존하는 금관 중 가장 오래된 금관으로 알려졌으며,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간단한 형식에 달개 장식이 있지만 곡옥은 달려있지 않다. 미완의 의장을 갖춰 신라 수지형 대관 시원기를 보여주고 있다. 황남대총 남·북분은 신라에서 가장 큰 무덤으로, 1975년 발굴된 신라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금관이 정형화 단계로 접어든 모습을 보이며 황남대총 북분의 대관은 의장 발달 단계로 진입한 것으로, 금동과 함께 금제가 제작되며 새롭게 교호 입식(녹각형 입식)이 추가된다. 신라 최상위 복식 독점물인 신라 금관의 상시 이용이 황남대총 북분부터 나타나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 금관으로 강도높은 의장 발달이 진행된다. 금관총은 1921년 일제강점기 때 동네 아이들이 구슬을 가지고 노는 것을 신기하게 여긴 일본인에 의해 발견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山자 모양이 아래로 3개 겹쳐진 입식장식이 앞과 양 옆에 부착돼 있으며, 이사지왕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으나 기록에 나타나지 않아 금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금령총은 1924년 발굴됐으며 山자가 아래로 4개 겹쳐진 입식장식이 앞과 양옆에 부착되어 있다. 이 금관의 주인은 키가 110-120cm로 추정되는 어린아이로 보이며, 부장품에서 금구술(金鈴)이 발견되어 금령총으로 불린다. 서봉총 금관은 1926년 스웨덴 칼 쿠스타프 황태자가 일본 방문시 금관 발굴 이벤트에 참가하여 발굴한 금관에 봉황장식이 있어 서봉총으로 불린다. 천마총은 1973년 우리나라 고고학자가 발굴했으며, 이 금관은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장식이 달려 있는 최고로 발달한 금관이다. 천마총·금령총 다음 시기 금관이 발굴되지 않아, 그 후 금관의 발달과정을 현재로선 알 수 없고, 다음 발굴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금동제 퇴화 형식 대관은 신라 수지형 대관의 마지막 시기임를 알려준다. 신라식 의장의 이형적 변화, 형태 생략과 왜곡, 금공품의 희소성이 사라진 철과 동제 대관이 등장한다.
4세기 중후반 수지형 대관 시원 형식의 금관이 등장하고, 5-6세기 수지형 대관 신라식 양식이 정립되며, 금관 발달기를 맞는다. 6세기 중반 위세품과 복식 구성품으로써 귀금속제 수지형 대관 역할은 끝나며, 7세기부터는 지역 사회의 종교 의례 물품으로 일부 사용된다.
조익형 관식과 모관을 살펴보면, 신라식 관식은 전식 양쪽에 익형 입식이 결합된 조익형 관식이다. 금은제 관식이 부착된 황남대총 남분이 신라식 조익형 관식의 완비 시점이다. 이후 황남대총 북분 관식에 은제이며 눈모양 무늬가 표출된 새로운 형식이 등장하며 이 형식은 신라 지역 사회에서 넓게 쓰였다. 모관은 백화수피와 귀금속제가 함께 쓰이고 황남대총 남분에 같은 형태와 기법으로 만든 금은제 원정형 모관이 부장됐다. 조익형 관식과 함께 황남대총 남분 시점이 신라식 모관 완비기임을 보여 주며, 금관총, 천마총 금제 모관으로 갈수록 의장성이 한층 고조된다.
신라 귀걸이 구조는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신라만의 독자적 특색이 있다. 5세기 중반 황남대총 북분에 고구려산 태환이식이 부장됐는데, 귀걸이 각 부분을 땜질한 일체식 구조가 고구려 계열 기술이며, 신라권 출토품 중 귀걸이 연결고리, 드림이 일체로 부착된 의성 탑리Ⅰ곽, 천마총(목곽 상부), 계림로 14호 귀걸이가 고구려 기술이 신라화한 사례이다.
신라의 독자적 고안 귀걸이로는 세환 귀걸이 원통식 중간 장식과 태환 귀걸이 구체-반구체 조합식 귀걸이를 들 수 있다. 원통식 중간 장식은 반구형 상하 장식에 원판을 끼운 구조로 초기 간소한 형식이 황남대총 북분에 부장돼 점차 장식성이 고조되어 금관총, 천마총, 보문동 고분 기간에 유행한 주력 장식이다. 태환 귀걸이 구체-반구체 조합식 귀걸이는 구체 아래 반구체를 추가한 의장으로 초기형은 황오리 14호Ⅰ곽 태환·세환 귀걸이에서 사용됐고, 다음 황남대총 남·북분 태환이식 전용 의장으로 완비되며, 금관총, 천마총, 보문동 합장분 태환이식 순으로 발달한다.
귀걸이는 복식 구성품으로 신체(귀)에 부착돼 사용하며, 귀걸이 착용 실례는 신라 석조물과 회화 자료에서 추측할 수 있다. 경주 서악동 문비석의 신장상, 석굴암 본존불 둘레 부조상 가운데 십일면관음보살상, 천부상과 보살상, 영주시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의 연도 서벽에 그려진 역사상에도 귀걸이 장식이 그려져 있다.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반 경주 인왕동 668-2번지 9호 석곽묘에 백제산 금제 드리개가 출토됐다. 똑같이 생긴 드리개가 월성 해자 라구역에서도 수습된 바 있다. 드리개 중간식과 드림을 잇는 금실을 휘감아 매듭짓는 마감법이 백제 기술이다. 두 드리개는 공구체를 사용했으며, 같은 시기 등장한 신라 공구체식 귀걸이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후 6세기 초엽 황남동 106-3번지 귀걸이는 무령왕 귀걸이 제작법과 같으며, 십자 모양 장식판을 상하 대칭 접합해 만든 방식으로 신라권 계보를 찾기 어렵고, 금관총, 천마총 기간 신라와 백제 교류 과정에서 유입된 백제 기술이 신라화한 사례로 보고 있다.
가장 오래된 신라 금속제 팔찌는 4세기 중반 포항 마산리 149-4번지 적석목곽묘의 청동 무문 팔찌다. 5세기 초엽 경산 임당 7A호 금동제 무문 팔찌가 그 뒤를 이으며, 황남대총 북분에는 다양한 기법의 중실·중공식 팔찌가 사용돼 신라식 팔찌 기본형이 갖춰진다. 이후 장식성이 발달된 팔찌가 금관총, 천마총, 보문동 합장분에 부장된다. 노서동 215번지 금제 팔찌는 백제 계열 용 문양이 들어간 예로, 백제 무령왕비 다리작명 은제 팔찌 용 무늬와 연결된다. 신라와 백제 팔찌 착용법은 차이가 있는데, 백제인은 왼손에 은제 팔찌 1쌍, 오른손에 금제 팔찌 1쌍처럼 한 손에 같은 종류 팔찌를 착용하고, 신라인은 좌우에 금제·은제·구슬류 팔찌를 함께 착용하는 복식을 보인다.
신라 반지는 윗면을 마름모꼴로 살짝 넓히고 이곳에 장식을 넣는다. 신라 반지는 화형(꽃형, 황남대총 남분, 포항 냉수리 고분), 각목 선문(금관총), 각목 능형문(금령총), 무문 반지로 나뉜다. 그중 화형반지는 금 알갱이와 청색 유리를 감싸 높은 장식성을 보여준다. 신라식 반지의 표지 유물이며, 황남대총 남분 기간에 기본 의장이 완비됐다. 복식으로써 신라 반지는 여러 개를 부장하는 특징이 있으며, 반지 4-8점 이상을 손가락에 각각 착용한 경우가 많다.
신라 귀금속제 허리띠 장식은 가장 긴 시간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에 등장해 통일신라까지 신라 복식의 주요 구성품이다. 각 시기를 대표하는 형식을 통해 외부 허리띠 문화를 수용하고 다시 신라화하는 과정이 드러난다.
투조 엽문, 용문 과판식 허리띠 장식은 외부 세력의 영향력이 작용한 사례로, 가장 오래된 신라 귀금속 허리띠 장식은 쪽샘 L17호 출토 중원식 금동제 투조 용문 과판이다. 다음으로 5세기 전반 중국 삼연 계통이 신라화한 경산 조영동 EⅢ-2호, 울산 하삼정 고분군 나 석곽묘 115호에서 출토되었다. 황남대총 남분에는 고구려 계통의 금동제 투조 용문 과판이 부장됐다. 4세기 중반부터 5세기 전반에 중국, 고구려 문물이 직간접적으로 수용된 신라식 허리띠 장식이 등장했다.
투조 삼엽문 과판식 허리띠 장식은 황남대총 남분에 다수 부장됐다. 이는 신라 형식이 완비됨을 보여주며 금허리띠는 금관과 함께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에 부장됐으며, 신라 최상위층의 복식으로 사용된다. 그 하위는 은제 투조식 삼엽문 허리띠 장식이 자리한다.
누암리형 및 황룡사형 허리띠는 6세기 전반부터 7세기 중반 새로운 허리띠 장식을 보여준다. 누암리형은 신라 전통적 요소에 백제적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경주 보문동 고분에는 고식 삼엽문 과판과 신식 누암리 과판이 함께 부장돼 과도기적 변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7세기 누암리형은 다시 황룡사형 허리띠 장식으로 교체되는데 종래와 다른 청동제 주조의 제작 방식 변화와 부품 형태, 문양, 착장 방식이 전반적으로 달라진다. 중국 수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차이점이 커서 신라인의 창안으로 보기도 한다.
통일신라형 허리띠 장식은 당나라식 또는 통일신라형으로 불리는 띠장식이 사용된다. 과판과 띠끝장식 파편이 한 덩어리로 주조된 상태가 남아 있다. 이 기간 신라 경주지역에서 통일신라형 과판 생산과 유통이 이뤄졌음을 보여주며, 통일신라 전역으로 확산된 후 동제와 철제 비중이 늘어나는 퇴조기 양상을 보인다.
신라 복식에서 금동신발은 독특한 역할을 한다. 다른 귀금속제 장신구는 착용이 가능하지만 금동신발은 충격에 취약한 귀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바닥에 영락을 촘촘히 매달아 애초에 보행과 착용을 의도하지 않은 구조이다. 즉 장례에 쓰일 목적으로 준비된 복식이다. 황남대총 남분 시기 신라식 금동신발 의장이 완비된다. 금동신에 ‘ㅗㅜ’ 무늬를 투조하고 영락을 과도하게 부착한 것이 신라 금동신의 특징이다. 이후 무늬가 생략된 형식, 금동신 앞이 살짝 솟은 형식으로 변화한다. 금동신발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 공통으로 쓰이나 각 나라의 의장마다 다르다. 고구려 금동신은 바닥에 못장식이 박혔다. 백제나 신라는 서로 닮은 외형이나 백제 금동신은 ‘ㅗㅗ’문양, 신라 금동신은 ‘ㅗㅜ’문양이 사용된다. 금령총 옆 식리총에서는 백제 금동신발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백제에서 만들어져 신라와 교류하면서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쌍두화, 가르빙가, 연꽃무늬 등이 화려하다.
신라 귀금속 장신구 문화와 흐름을 살펴보면, 현존하는 신라 귀금속 장신구는 금·은·금동으로 제작한 대관, 모관, 관식, 귀걸이, 반지와 팔찌, 허리띠 장식, 금동신발이 주종을 이룬다. 고구려, 백제, 가야, 중국, 일본 장신구와는 뚜렷이 구별되며, 끊임없는 외래 문물 수용과 신라화를 통해 신라 고유의 신라식 양식이 성립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신라 왕경의 장신구는 주변 여러지역 집단에 깊숙이 파급되었고, 성산동 고분군 집단에도 사용되었다. 관식, 귀걸이, 반지, 팔찌, 허리띠 장식이 발굴되어 성주권 유력 집단인 성산동 고분군 조영자들과 경주 집단의 위세품 교환 체계가 가동된 결과로 보인다.
48호분의 재발굴을 통해서도 보였듯이 유적의 발굴은 새로운 유물의 등장과 또 다른 해석을 불러온다.성주 성산동 고분군의 발굴은 종료되지 않았고, 앞으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상.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유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무슨 재료로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당시의 시대상은 어떠했을지 상상해보고, 유물이 어떤 점이 같고, 다른지 알아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이번 주말 가까운 박물관을 찾아보는 건 어떠세요?
♣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용산동6가 168-6) (02-2077-9000)
♣ 국립경주박물관 경상북도 경주시 일정로 186 (054-740-7500)
♣ 국립대구박물관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 (053-768-6051)
♣ 계명대학교 성서캠퍼스 행소박물관 대구 달서구 달구벌대로 1095 (053-580-6992)
♣성주 성산동고분군 전시관 경북 성주군 성주읍 성산4길 37 (054-930-8385)
이상으로 5월 14일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에서 진행된 2025 군민참여강좌 세 번째 강의내용을 정리했습니다. 내용이 사실과 다를 경우, 수정 가능합니다(이메일 joy8246@naver.com). 내용과 관련된 참고문헌은 싣지 않습니다. 이점 양해바랍니다.<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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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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