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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임진왜란시 소천전투(화장산전투)와 류종개 의병장(2)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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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 충렬사 전경(봉화군 소천면 현동길 39-10)


임진왜란시 소천전투(화장산전투)와 류종개 의병장(2)


방유수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봉화)


Ⅳ. 소천전투 양상

 1592년 음력 7월 26일, 진중약속 16조목과 군령 7조목으로 훈련을 마친 의병군 600명은 침입해오는 일본군 3000명을 격퇴하기 위해 출정했다. 의병군은 봉화 쪽에서 울진 방향으로, 내륙에서 바다를 향해 동진(東進)하며 노루재를 넘었다. 일본군은 남에서 북으로 진군한 침입군이다. 

 일본군들은 부산에서 한양으로, 다시 평양과 함경도로 갔다. 그러므로 일본군은 상주에서 안동을 거쳐 동진하여 봉화로 침입해야 상식에 부합한다. 즉, 일본군과 맞서 싸우려는 내성의병은 적들과 반대 방향으로 행군해야 하므로 서진(西進)이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일본군은 동해를 등진 채 서진하여 봉화로 쳐들어 왔다. 이 일본군은 한양에서 강원도로 진입한 후 원산에서 해안선을 타고 남하(南下)해온 모리 요시나리(삼길성,森吉成)가 지휘하는 일본군 4군의 침입이었다. 

 그들은 삼척을 거쳤고, 이윽고 울진에 닿은 후 1대는 계속 남진(南進)하여 영해로 남하하고, 2대는 태백산맥을 따라 십이령을 넘어 안동을 향해 서진했다. 그래서 이를 막기위한 의병군이 동진을 하기위해 전피현(箭皮峴)을 넘었던 것이다. 

 1592년 음력 7월 26일 류종개, 임흘, 김중청, 윤흠신과 아우 윤흠도, 김인상, 김성일의 조카 김철, 권경 등 600명 의병들은 화장산 살피재(전피현,箭皮峴)와 노루재, 목비골 일원에 매복한 채 적들을 기다렸다. 3000명이나 되는 일본군은 조총 등 신무기로 무장한 정예군인데 반해 의병군은 무기도 변변하지 못한 농민군이었지만, 죽음을 불사하는 의로운 기운 하나만은 우리 의병이 적들보다 훨씬 드높았다. 일곱 가지 군령 아래 훈련을 해온 의병군이었다. 게다가 이 의병군을 제외하면 노루재로 출동하여 적과 맞서 싸울 만한 군대가 달리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윽고 첫 전투가 벌어졌다. 적의 선봉대가 앞서 나타났다. 매복하고 있던 의병군은 적들을 기습하여 선발대 수십명을 섬멸(殲滅)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적은 많고 우리는 적었다. 7월 29일, 적의 본대가 몰려왔을 때는 이미 중과부적이었다. 류종개 의병장은 의병들에게 말하기를 “구원병은 오지 않는다. 적(敵)은 숫자가 많으나 사기가 꺾여있고 우리는 사기충천(士氣衝天)되어 있으며 적을 공격하기 좋은 위치에 있어서 능히 적을 물리칠 수 있다”, “나의 육신은 이미 나라에 바치기로 했으니 어찌 목숨을 아끼리요” 하고는 의병들을 독려하였다. 

 600명 의병들은 1600명이나 되는 왜적을 척살했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으로 화장산, 노루재를 지킨 의병군의 사흘에 걸친 전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결코 허망한 전몰은 아니었다. 아니, 의병군의 사흘에 걸친 장렬한 전투와 죽음은 그 이후 경상북도 북부 지방을 지켜내는 밑거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향후 경상도 전역의 전쟁 흐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3000명 중 절반인 1600명을 화장산, 살피재, 목비골 등지에서 잃은 일본군은 전투력이 급감했고, 사흘 동안의 시간을 번 덕분에 1천여 명의 군대를 조직하는 등 전투 준비를 갖춘 안동의 안집사 김륵 등을 누를 여력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영해로 내려간 일본군도 영해부사 한효순, 군관 장립, 박언국 등의 활약에 막혀 더 이상 남쪽으로 진군하지 못했다. 

 결국 왜적들은 경상도 북부 일원에 대한 침범을 포기한 채 강원도로 돌아갔고, 강원도 내륙 깊숙한 곳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다. 삼강행실사적에 따르면 많은 군사를 잃은 일본군들은 분풀이를 하느라 류종개, 윤흠신, 윤흠도, 김인상, 권경 등 전사한 아군 장수들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머리를 하늘에 매달았다. 아직 죽지 않은 아군은 불로 몸을 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병장 류종개는 왜군에 생포되어 적이 항복을 강요하며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살가죽을 벗기는 고문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적장을 꾸짖으며 숨을 거두었다. 임진왜란 전투사상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한 의병장이다. 

 소천 화장산 전투로 왜군의 피해도 커서 사흘이 지나고 왜군은 결국 노루재를 넘지못하고 다시 십이령을 넘어서 울진현으로 철수를 하자 류종개의 장인 금문순(琴文苟)과 그의 형 금종직(琴宗直)을 포함한 법전, 춘양, 소천 백성들은 화장산, 노루재 등지에서 죽은 의병 600명의 시신을 수습했으나 부패가 심해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어서 한꺼번에 땅에 묻고 장사는 의관장(衣冠葬:죽은 사람의 옷으로 대신 장사를 치루는 것)으로 지냈다.


Ⅴ. 충렬사가 세워지기까지의 과정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류종개 의병장을 통정대부 예조참의로 증직하였으며,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8년(1616)에 정문(旌門)을 내리고 충신각(忠臣閣)을 세웠다. 또, 화장산에는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600명 의병의 넋을 기리는 정려각(旌閭閣)을 세우고 토지를 하사한 후, 감관(監官) 1인과 산지기 12명을 배치하여 충신각과 정려각을 관리하게 하였다. 충신각은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276-1번지에 있다. 봉화 현감 박태적(朴泰迪)은 1703년 12월부터 1708년 5월까지 4년 6개월간 현감(縣監)재직중 현민들에 구휼선정을 베풀고 참의 류종개(柳宗介)의 묘비(墓碑)가 없으므로 그 충절을 애석하게 여기며 상운면 문촌리 산 17번지 마장들에 류종개 의병장 묘지의 치산과 묘비를 건립하였다. 

 봉화에서 울진방향 36번 국도를 따라가다 임기삼거리에서 법전면 방향에서 소천면 방향으로 터널을 넘지않고 노루재 옛길을 넘으면, 고개가 거의 끝나가는 곳 우측에 있는 '임란의병전적기념비'를 만나게 된다. 도로가 급하게 굽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관계로 발견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기 아주 십상인 지점이다. 임란의병전적기념비 둘레에 일곱기의 돌탑이 쌓여 있어 특별히 이채롭다. 돌탑들은 오가는 나그네들이 쌓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이곳 돌탑들은 기념비를 건립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노루재 전투 때 전몰한 선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추모탑들이다. 안내판에는 “400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이곳에 봉화 군민의 뜻을 모아 기념비를 세우고 정성어린 돌을 하나씩 올려 북두칠성형의 적석봉(積石峰:돌로 쌓은 봉우리)을 쌓았다”라고 건립 내력을 소개한 뒤 “매년 추념제(追念祭)를 올리고, 이곳을 봉화 제일의 성역지(聖域地:성스러운 땅)로 보존해 나갈 것이다” 하고 각오를 밝힌다. 봉화군수와 봉화문화원장이 기념비와 돌탑들을 세운 때는 1985년 12월 27일이다. 

 그 이후 이곳의 기념비와 돌탑만으로는 의병군을 제대로 기릴 수 없다고 생각한 봉화군에서는 소천면 소재지에 '봉화 임란의병전적지'를 새로 조성 성역화 했다. 사당인 충렬사는 물론, 기념관, 전사청, 외삼문, 내삼문, 관광안내소 등을 두루 갖추어 웅장한 면모를 뽐내는 전적지이다. 

 성역화 사업은 정부의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부터 4년간에 걸쳐 추진하였으며, 14,471㎡의 부지에 국비 17억9천만 원, 도비 4억8천3백만 원, 군비 11억7천2백만 원 등 총 34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사당, 전시관 등 총 7동 259.02㎡의 건물과 석축, 토석담장, 마사토 포장, 의총, 사적비 등 부대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2011년 8월 27일에 준공식 및 위패봉안 고유제를 올렸으므로 임란의병전적지 충렬사는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봉화군과 임란의병 유족회 주관으로 실시되는 추모행사는 봉화군 소천면 화장산, 살피재, 노루재, 목비골 일대에서 전투가 있었던 전 날인 매년 음력 7월 28일 충렬사에서 개최된다. 경상북도 북부의 일부 지역을 '복받은 땅'으로 만들었고, 일본군이 더 이상 진격을 포기한 채 다른 곳으로 이동하도록 만듦으로써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꾸었다고 선조 수정실록이 평가한 소천전투는 대단한 의의를 지닌 싸움임에 틀림 없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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