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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金泉 芳草亭에 대한 考察(3)/이갑희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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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초정



金泉 芳草亭에 대한 考察(2)

이갑희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김천)


26. 이해 중수기(李垓 重修記)

 정자를 방초로 이름 삼은 것은 대체로 뜻이 있는 것이다. 선조 무덤의 아래에 방초가 뒤섞여 푸른 데 여기에 정자를 세워 옛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지은 사람도 선조(先祖, 祖考)이고 이름 붙인 사람도 선조인데 선조는 연성군(延城君) 6대손(홍길동)으로 집이 묘 있는 산 아래에 가까워 정자를 방초의 사이에 세우니 이 정자에 올라서 소나무 가래나무 우거진 무덤을 바라보면서. 이 풀을 완상하며 천지가 살리려는 뜻을 즐기면서, 선조를 사모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장소로 삼았으니 어찌 세상 사람들이 높은 곳에 올라서 뛰어난 경치를 취하는 것에 견주리오? 심신을 기른 곳이며 아침저녁으로 오른 곳이니 사람으로서 오르는 사람은 누가 감탄하며 완상하지 않으리오?

 이에 생각하니 우리 오봉공(五峯公, 李好閔)이 올라 바라보고 감회를 일으켜 뜻을 붙여 읊고 처마에 거니 이어서 차운(次韻)한 사람은 조현주(趙玄洲, 趙纘韓), 이만사(李晩沙, 李景義)이다. 그 나머지 사대부(士大夫)로 이 작품에 더하여 차운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전쟁의 불이 덮친 후에 집의 마룻대와 추녀 끝이 불타 무너져 문득 언덕과 밭이 되었었다. 자손들이 중수할 여가가 없는 것에 애통해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아버지와 형제의 재앙이 거듭되어 기업(基業)을 보전하지 못하니 집 없이 동서로 떠돌다 보니 뜻은 있으나 성취하지 못한 것은 형세였다. 우리 여러 자손에 이르러 또한 마땅히 선조의 뜻을 추모하여 선조의 사업을 이어 성취해야 하는데 다만 못난 사람의 상패가 이어 거듭되어 경륜을 이루지 못해 탄식하며 마음 아파했을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 여러 해가 되었다.

 다행히 우리 조수령이 와서 이 지방을 다스리게 됨을 만났는데 우리 옛정자가 중수되지 못한 것을 근심하고 그 선세의 남은 자취에 감개하여 나에게 중수를 부탁하였다. 조후는 현주(玄洲) 조찬한의 친손자이다. 현주의 문장은 모범이 되어 세상에 크게 이름을 날려 후세에 전할 만한데 또한 조고(祖考)와 더불어 일찍이 깊은 사귐을 맺어 준 시가 있다. 조후가 앞의 기록에 미루어 감회에 젖어 자취를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도리어 중수의 힘을 도우고 또한 글자 새기는 일을 살펴서 현판을 걸게 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게 하였다. 그 또한 육자(陸子)가 먼저 편 것이고 반생(班生)이 처음으로 서술한 것이로다.

 정성스러운 뜻이 이른 바라서 감동이 저절로 드러나 따로 여러 사촌들과 더불어 함께 힘을 다하여 재물을 모아 시냇가에 세웠는데 4칸으로 자손들이 길이 사모하고 같이 학업을 익히는 장소로 삼았으니 또한 대단히 다행한 일이다. 아 물(物)이 황폐해지고 일어나고 이루어지고 무너진 것을 무궁한 세월에서 찾아보면 옛날에 황폐해져 무너진 것을 지금 비로소 일으켜 이루었으나 정자가 다시 황폐해져 무너지게 되는 것은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또 일으켜 이루는 일이 후세에 이어질지 어찌 알리오? 그렇다면 이 시는 이 정자와 더불어서 썩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사년 음력5월 하순 불초 후손 이해가 삼가 기록하다.

亭以芳草爲名 蓋有義也 先態之下 芳草交翠 而亭於是 作故名 作之者祖考 名之者祖考 祖考以延城君六代孫 宅近墓山之下 亭立芳草之間 登亭 而望松楸 玩斯草 而樂生意 以爲慕先探貞之所 則豈世人登高取勝之比哉 心神所養 朝夕所躋人之登陟者 孰不歎賞 玆惟我五峰公登覽 起感寓咏懸楣 繼而次之者趙 玄洲李晩沙也 其餘士大夫之足是成者不可勝記 不幸兵燹之後 棟宇焚頹 庵成邱 二畝宜子孫襲傷重修之不暇 而家君兄弟禍重仍 基業不保 則靡室東西 有志未就者 商城勢也 逮余諸孫 亦當追先志肯構 而非但不食喪敗仍 經綸幕途 慨然心傷者有年 矣幸値我趙侯之來守是邦 惕我舊亭之不修 感其先祖之遺 屬余以重修 趙侯玄 洲之親孫也 玄洲之文章模楷大鳴於世 可傳於后 而亦與祖考早托深契 且 有所贈詩 趙侯追感前誌 不欲蹟 顧助重修之力 亦相雕篆之功 使之懸板 以永后 世 其亦陸子之先陳 班生之始述者乎 誠意所格 感動自發 別與諸從 幷竭力 財立溪邊 以四間爲 子孫永慕共業之所 亦甚幸也 噫 物之廢興成毁 相尋於無窮而 哲之 廢毁者 今始興成 則亭之復焉廢毁 亦不可知而又安知興成祥繼於后也 然則 玆詩與鼓亭而不朽也
歲己巳仲夏下澣不肖孫垓謹記

27. 이의조 중수기(李宜朝重修記)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긍구(肯構)라 하였으니 무슨 말인가? 대체로 선인이 지으면 후인이 중수(重修)하는 것은 곧 선인의 일을 이어 서술(敍述)하는 도(道)이다. 함(爲)이 있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우리 집안 방초정 같은 것도 이러할 뿐이다. 이 정자는 곧 우리 5세조가 창건한 것인데 이것으로 이름을 지은 것은 대체로 무극옹(無極翁)의 일반의사를 취한 것이다. 그 후 오봉공(五峰公:이호민)이 와서 올라 감회를 붙여 ”흰머리에도 남쪽으로 돌아올 계책 세우지 못하니 봄 산 소쩍새 소리에 부끄럽네(白頭未判南歸計 戆愧春山杜宇聲)라는 시구(詩句)를 지었다. 이런 까닭으로 후인으로 화답한 사람들이 또한 왕손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을 취하였다. 대체로 방초(芳草)는 한결같은데 오직 사람이 취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아(境) 정자(亭子)가 이루어지고 무너진 것이 여러 번이다. 저 처음으로 창건된 때로부터 내려오면서 대체로 몇 년 지났기에 숙종(肅宗 己巳 1689)에 중수(重修)하여 새롭게 하였으며 또 몇 년 지나 영조(英祖 丁未 1727)에 다시 무너져 대체로 또 중수(重修)할 계획을 하겠는가? 불행하게도 다음 해인 무신년(1728)에 집 재목이 병화(兵火)의 불로 타 버렸다. 병진년(1736) 에 이르러 남은 터가 큰물에 무너져 수 백년 번화(繁華)한 옛 자취가 겁회(劫) 큰 변화 가운데에 씻은 듯 사라지고 강산의 옛 집엔 푸른빛만 엇갈리어 쓸쓸하고 밤에 뜬 달 빈 산에서 시름겹게 하는데 슬프게 끊어지는 봄 소쩍새 울음에 꽃만 붉게 피었네. 길 가는 이 그윽한 길(幽) 길이(長) 묻힌 것 가리키며 탄식하네. 인간일 바뀜 아침 이슬 쉽게 마르는 것과 같음에 감회에 젖게 되네.

 이에 10여(餘) 집안 종족이 서로 도모(圖謨)하며 말하기를 “이 정자가 황폐(荒廢)해진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다. 만약 이어서 다시 세우지 않는다면 선조의 어둡지 아니한 영(靈)이 그 즐겨 내가 후손을 두었다고 말하겠는가? 하물며 또 정자가 허물어진지 60년이 되었으니 장차 회복(回復)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경영(經營)한 것이 6, 7년인데 제물이 대략 모이니 이에 비로소 지난 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올 봄에 공사를 마쳤다. 그 제도(制度)는 다섯 시렁(架)에 세 칸(間)인데 옛 터 수백보 북쪽에 있다. 높고 크고(輪) 성대(盛大)하여 꿩이 날고(飛) 새가 날아갈 듯하여(鳥革) 진실로 잠시 완상하였다. 그리고 또 선배(先輩)들이 시 지은 것을 처마 사이에 줄지어 거니 마치 옛 제도를 회복해서 새 빛이 나는 것 같으니 그 또한 다행한 일이다.

 이로부터 뒤로 우리들이 이 정자에 올라서 이 이름을 돌아보는 자(者)가 거의 선조의 뜻을 추모하고 거슬러 염옹(濂翁:周敦頤)의 화육(化育)을 체득(體得)한 참 즐거움에 미치고 남은 시(詩) 운(韻)에 읍(揖:挹)하고 오봉(五峰:李好閔) 노인이 선조 무덤 생각한 지극한 뜻을 상상한다면 외물(外物)과 더불어 모두 봄을 느끼는 덕(德)이 즐겨 일어날 것이고 고향 생각하는(首丘初心) 어짐(仁)이 나의 감회(感)로 일어나 학문을 닦고 반성(反省)하는 자료가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다만 정자(亭子)를 다시 세움이 다행되지 않겠는가?

 대체로 우리 후손들이 또 우리들이 오늘의 뜻을 이어서 대대로 이 정자를 지킨다면 무너지면 새롭게 하고 또 무너지면 또 새롭게 해서 무궁한 세월에 미친다면 그 선조의 사업을 이어 성취하는 도(道)가 거의 옛 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고 길이 오는 세상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아 내 뒤에 오는 사람은 그 서로 더불어 힘쓸지어다.
숭정후 세번째 무신(1788) 음력 3월 5세손 의조가 삼가 기록하다

書云肯構 何也 蓋先人作而後人修 卽繼述之道也 有寫者亦若是若 吾家芳草亭者是己 坫亭也卽我五世祖考所創 而名以是 盖取無極翁一般意思也 其後五峰公來登寓感 有白頭未判南歸計 暫愧春山杜宇聲之句 是以後人之和之 者亦取王孫不歸去之義焉 夫芳草一也 惟在人所取之如何矣 噫 亭之成毁者累矣 自夫刱始以來 凡幾年而重新於肅廟己巳 又幾年後毇於英廟丁未 蓋又爲重修計 也 不幸翌年戊申 屋材燼於兵燹 逮于丙辰 遺址於大水 數百年繁華古蹟蕩然於 劫灰滄桑之中 江山古宅鞠爲蕪草 東風吹又生 寂寞古庭之交翠 夜月愁空山 凄斷 春鵑之啼花 行路指點嘆幽逕之長理 人事大謝感朝露之易唏 於是乎 十餘門族相 聚而謀曰 玆亭之廢 吾輩之責也 若不繼修 先祖不昧之靈 其背曰 余有后哉 況又 亭毁之周甲 將回乎 遂與同心協力經營者六七年 而財略聚 酒以始役於前秋 竣事 於今春 其制五架而五間 在古址數百步之北 輪焉免焉翬飛鳥革 固爲苟完 而又以 前輩題詠 烈揭於楣間宛然復古制 而生新色 其亦幸矣 自是以後 吾輩之登斯亭而 顧斯名者 庶乎追善志而溯及乎濂翁體化育之貞樂 揖餘韻而像想乎峰老懷先隴 之意 則與物皆春之德樂生丘首之仁莫非我感發修省之資矣 然則豈但亭之再修 之爲幸也哉 凡我後昆又繼吾輩今日之志 而世守此亭 毁則新之 又毁則又新之 以 及乎無窮則其爲肯構之道 庶無愧乎古人 而永有辭於來世矣 嗟 余後來之人 其相 與勉之哉
崇禎三戊申暮春五世孫宜朝謹記


28. 이수호중수상량문(李遂浩重修上梁文)

 능히 2, 3대에 겨를이 없어 하지 못한 일을 마치니 거의 후손의 작은 정성을 다한 듯하고 60년 이미 황폐된 정자를 다시 세우니 오히려 선조의 남은 자취 느껴지네. 여러 해 동안의 계획 며칠이 되지 아니하여 이루어졌네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6대 조부는 교목 세가로 벼슬한 화려한 문벌이네 오봉선생 문희공의 삼종족이고 삼조(三朝) 명신(名臣) 연안군(延安君)의 5세손이네 당세의 공명 사하여 귀족과 부유한 집 영화에서 높은 자취로 멀리 떠나 선조의 무덤 지키며 푸른산 소나무와 가래나무에 만년 절개 붙였네. 

 그러므로 이에 다섯그루 회화나무 언덕에 정자 짓고 방초라는 이름으로 현판 걸었네. 무슨 까닭으로 방초라는 이름 지었는가? 만물과 봄을 같이 누리는 마음이 있어서네. 어찌 뜻 붙인 뜻 없겠는가? 양쪽 언덕 푸른 빛 엇갈리는 빛 사랑해서이네. 호수가에 무성하여 어렴풋이 앵무주의 천년 전 풍경같고 창문 앞에 푸르고 푸른 것은 주부자(주돈이)의 일반의사 보는 것 같네. 저 조산의 구름과 수도산의 눈은 이 아침 저녁의 기이한 장관이고 아미산의 소나무와 굴대의 단풍같은 이 이에 가을 겨울의 아름다운 경치이네. 띠 같은 감수에 밝은 모래 흰 돌 보이는데 여울 아래 여울 십리의 길이네. 남쪽 상인 북쪽 손님 가는 사람이고 오는 사람이네. 있는데 이르니 나담에 크게 비치는 고기잡이 등불에 밤빛 나타나고 날 따뜻한 우평에 목동 피리 소리에 봄소리 들리네. 

 이런 까닭으로 현주의 조학사의 맑은 읊음 계찰의 남긴 한 그려내고 만사의 이시랑의 높은 읊음 친척의 기쁜 정 말하여 다 하네. 고태수의 오언 같은 것은 백세에 전해져 없어지지 않으리 장상사의 절구 8경을 말하여 남음이 없네. 그러나 언덕과 골짜기 쉼게 옮겨지고 황폐해지고 일어남에 운수가 있네.  저 누른 원숭이해의 병란에 불에 미쳐 집 재목 이미 바뀌어 병화에 타다 남은 재 되었네. 붉은 용해에 터에 물이 넘쳐 남은 터가 또 따라서 상전벽해가 되었다. 빈산엔 밤마다 다만 옛날 소쩍새 소리 드리는데 옛 물가에는 해마다 다만 당시의 방초만 돋아나네. 부로들이 탄식하고 애석해함 있는 줄 아니 어찌 자손들이 경영함이 없겠는가? 

 이에 숭정 뒤 세 번째 정미년을 만나니 테세의 일갑이 돌아온 것이네. 봉산의 북쪽에서 아름다운 재목 모으니 어찌 사 십리 실어 옮기는 수고로움 꺼리리오? 응봉의 동쪽에 길지를 점쳐 잡아 이로부터 6.7년 경영한 뒤이네.  정미년에 황폐해져 정미년에 일으키니 세워짐과 무너짐이 때가 있는 것이 아닌가? 6세의 일을 6세에 이루니 이에 선조 사업 이어 서술함 그치지 않음 알겠네. 옛 자취 선명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자세히 실려 있으나 옛날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었는데 날아갈 듯한 높은 정자 높은 언덕에서 우뚝하게 보이는데 앞도 확 터졌고 뒤도 열렸네. 여기에 살며 여기에서 즐기는 건 이제부터 시작이니 반드시 올라 임하여 보는 사람 많을 것이고 높고 크고 성대한 모습 옛 모습과 어떠한가? 더 못하거나 나은 모습 없지 않으리. 세칸을 다지어 고하니 육위 상량 송(頌) 이에 펴네

아랑의 허수아비 대들보 동쪽으로 던지니
화문의 아침해발 가득 붉네
봉우리 구름 무심히 나오지 아니하는데
영롱한 상서로운 빛 마음 속에 다 하는 것 같네

아랑의 허수아비 대들보 서쪽으로 던지니
일어나 응봉 보니 낙조가 나직하네
곳곳의 밥 짓는 연기 거리 감도는데
펄펄 나는 새는 숲으로 날아들어 깃드네

아랑의 허수아비 대들보 남쪽으로 던지니
경호의 봄물 푸르기 쪽빛 같네
물가 안개 흩어져 다하는 곳 모래 위 갈매기 잠들었는데
밤마다 맑은 빛 달이 못에 가득하네

아랑의 허수아비 대들보 북쪽으로 던지니
맑은 시내 한 굽이에 글방 있네
여러 학생들에게 말하니 모름지기 부지런히 독서하라
뒷날 영화 옛날 일 아는 힘으로 헤아려져서이네

아랑의 허수아비 대들보 위쪽으로 던지니
은하수 가로로 천길이나 밝게 도네
자부 선인 부를 수 있을 것 같으니
광한루 누각 멀리서 서로 향하네

아랑의 허수아비 대들보 아래쪽으로 던지니
산 아래 마을 있고 호수가에 밤이 드네
한 곡조 농부 노래 한가로운 흥겨움 넉넉하니
주인 또한 고기 잡고 나무 하는 사람이네

 엎드려 바라건데 대들보 올린 뒤에 호수의 산에 생기 일어나고 바람과 달 다정하게 느껴지길 인걸은 땅 신령함에서 나오니 바라건데 영재 배출되길 신이 돕고 하늘 도와 모름지기 이 정자가 길이 전해지길

克竣二三代未遑之事 庶竭后昆之徽誠 重建六十載己廢之亭 尙感先祖之遺躅積年之計 不日而成 竊惟我六代祖考 喬木世家 簪纓華閥 五峰先生文僖公 三從族 三朝名臣延安君五世孫 謝當世之功名 遠高蹟於朱門桃李 守先人之 丘墓 寄晩節於碧山松楸肆乃 築亭於五槐之原 揭額以芳草之號 何以命 名也 有萬物同春之心 豈無寓意乎 愛兩岸交翠之色 萋萋於湖上 怾是鸚鵡洲 千載風景 靑靑於窓前 如見朱夫子一般意思 若夫 烏山雲修道雪是朝暮之奇 觀 峨嵋松屈臺楓乃秋冬之佳景 一臺鑑水明沙白石 上灘下灘十里長程 南商 北客 去者來者至有 螺潭大照見夜色於漁燈 牛坪一暄開春聲於牧笛 景色 滿目 題詠盈楣 是意 玄洲趙學士之淸吟 畵出季子遺恨 晩沙李侍郞之高咏 說盡親寂懽情 若乃 高太守之五言 傳百世而不朽張上舍之絶句 說八景 而無餘 然而 陵谷易遷 廢興有數 逮夫黃猿之兵燹 屋材己化爲劫灰 亦 龍之懷襄其 址又從而桑海 空山夜夜之開昔日之子規 古渚年年但其當時之芳 草知有父老之嗟惜 詎無子孫之經營 玆値崇禎之三丁 乃周太歲之日甲於 是 鳩聚美材於鳳山之北 詎憚四十里轉輪之勞 龜卜吉地膺峰之東 自是六
七年經紀之後 丁未之廢 丁未而作 非興毁之有時 六世之事 六世而成 乃知 繼述之不己 班班蹟 詳載於輿地 古有今無 翼翼高亭 特見於崇阿 前豁後暢 居斯樂斯 自今爲始必多臨觀之人 輪焉免焉 與舊如何 不無損益之制 三間告 訖 六偉斯陳

(兒郞偉) 抛樑東 花門朝日滿簾紅 崗雲不是無心出 瑞色玲瓏如盡中
(兒郞偉) 抛樑西 起看膺峰落照低 處處炊煙繞巷陌 翩翩飛鳥投林棲
(兒郞偉) 抛樑南 鏡湖春水碧如籃 渚煙散盡沙鷗宿 夜夜淸輝月滿潭
(兒郞偉) 抛樑北 淸溪一曲有書塾 寄言諸子須勤讀 異日榮華稽古力
(兒郞偉) 抛樑上 昭回雲漢橫千丈 紫府先人如可呼 廣寒樓閣遙相向
(兒郞偉) 抛樑上 山下有村湖上夜 一曲農家閒興足 主人亦是漁樵者
伏願上梁之後 湖山生色 人傑地靈 庶見英才之輩出 神助天佑 須使斯亭地永傳


Ⅴ. 방초정 앞 최씨담(崔氏潭)

 방초 이정복의 부인인 화순최씨가 투신한 못으로 알려진 이 연못(일명:崔氏潭)은 방초정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못 안에는 작은 동산을 배치하여 우리나라의 전통 정원양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1975년 이 연못을 준설하던 중 못 안에서 출토된 충노석이비(忠奴石伊碑)는 원래 주인인 절부화순최씨 비각 앞에 설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지나는 방문객들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Ⅵ. 나가면서

 지금까지 보물 제2047호인 방초정에 대하여 기술하였는데 주변의 문화재 등은 지면관계로 다 기술하지 못하였으며 기회가 오면 다시 상세하게 기술코자 약속을 드리며 이 글을 작성하는데 드론 사진촬영에 적극 협력하여 주신 김천향토사연구회 김진도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끝


<참고문헌>
한필원, 「한국의 전통마을을 가다」, 북로드, 2009.
김천시사편찬위원회, 「김천시사」, 1999.
김천시 삼원기획, 「김천 방초정 정밀실측조사보고서」, 2022.
송기동, 「김천의 누정」, 한국국학진흥원, 2015.

이상 '김천 방초정에 대한 고찰'을 모두 마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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