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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꽃
이 정 록
3월이 하순으로 접어들 무렵이면 산비탈 양지바른 곳에는 진달래 꽃망울이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우수 경칩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산골짝 응달에는 잔설이 남아 있는 터라 완연한 봄을 느끼기에는 조금은 이른 때이다. 진달래꽃이 피어날 때 벌과 나비들의 활동이 미미하여 벌과 나비보다는 아이들이 먼저 진달래꽃을 반겨 주곤 했었는데 지금 농촌엔 진달래꽃을 반겨줄 그리고 진달래꽃을 꺾어줄 아이들이 없다.
진달래는 우리 땅 어디든지 자라지 않는 곳이 없다. 한때는 국화로 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 민족과는 너무도 친숙한 꽃이다. 진달래는 관목 성질이 강하여 다 자라야 고작 어른 키를 겨우 넘을 정도다. 대다수 나무는 기름진 땅에서 잘 자라지만 진달래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진달래가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특성이 없었다면 하늘을 찌르는 아름드리 교목들 그늘에서 어찌 살아남을 수가 있었겠는가?
진달래는 개량하지 않은 그 자체만으로도 꽃으로서의 충분한 가치가 있다. 야생 그대로의 진달래를 정원에 심어도 다른 꽃에 뒤지지 않는 매력을 발산한다. 또한 진달래는 줄기를 꺾어주면 도장지(徒長枝: 웃자란 가지)가 자라 오히려 더 많은 꽃을 피우는 얄궂은 특성이 있다. 진달래는 햇가지 끝에 꽃눈이 달리는 성질이 있는데 가지를 꺾지 않은 나무는 약 전정이 되어 햇순의 자람이 저조하여 가녀린 가지 끝에 한두 송이 빈약한 꽃이 피지만, 가지를 꺾은 나무는 강 전정이 되어 도장지가 강하게 발생하여 튼실하게 자란 햇가지 끝에 여러 개의 꽃눈이 생겨 탐스러운 꽃을 피워낸다.
진달래는 봄에 피는 꽃치고는 일찍 피는 꽃이며 일찍 피는 꽃이 대체로 빈약한데 진달래꽃은 풍성한 편이다. 진달래꽃과 비슷한 철쭉은 진달래보다 늦게 피어나고 꽃 색깔이 더 짙기는 하나 어둡고 칙칙한 느낌이 있고 꽃받침 부근에 끈적끈적한 진이 있어 조금은 역겨운 꽃이다. 진달래꽃은 짖은 분홍 색깔의 꽃잎이 투명하면서도 화사하고 일견 순수하다. 진달래꽃은 사람이 먹을 수 있어서 참꽃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철쭉꽃은 먹을 수가 없어서 개꽃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 산야에 피어나는 꽃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꽃이 진달래꽃만은 아닐 터인데 진달래꽃은 진달래라는 본래의 이름보다는 참꽃으로 더 많이 부르는 꽃이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밀양아리랑의 한 구절이지만 지금은 이런 시대가 아닌 어쩌면 동지섣달에 제철보다 더 많은 꽃을 접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세월 탓에 진달래꽃이 관심 밖으로 밀려난 지도 한참 된 것 같다.
하지만 꽃이 귀했던 시절에는 진달래꽃은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꽃이었다. 진달래꽃이 필 때 쯤에는 진달래꽃에 반해서 깊은 산 속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 말이 생겨났는지 몰라도 진달래꽃에는 꽃 귀신이 산다고도 하였고 또 얼굴이 뽀얀 문둥이가 진달래꽃을 먹고 사는데 아이들이 다가가서 꽃을 따면 잡아서 간을 내어 먹는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의 얘기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진달래꽃을 아름아름 따다가 입술이 파래지도록 꽃잎을 따 먹고 진달래꽃 암술을 서로 걸고 당기는 놀이를 하면서 해가 저물도록 진달래꽃 속에 묻혀 살았다. 진달래꽃이 풍성했던 그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치고 진달래꽃에 얽힌 추억이 한둘 정도 없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진달래꽃은 꽃 색깔이 밝은 분홍을 띠지만 밝은 분홍빛 속에 아주 엷은 보랏빛을 살짝 머금고 있어 어찌 보면 애틋해 보이는 꽃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진달래꽃을 두견새와 연결하여 두견화라고도 한다. 촉나라 임금 두우라는 왕이 위나라에 멸망당한 후 복위를 꿈꾸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한 맺힌 넋이 두견새가 되었다고 한다. 촉나라 망제(望帝)의 넋인 두견새가 그 맺힌 한을 긴 밤을 꼬박 새우며 피를 토하면서 울었는데 울다가 목 매이면 토한 피를 다시 삼켜 목을 적셔가며 울고 또 울었다는……. 그 한 맺힌 피가 땅에 떨어져 진달래 뿌리에 스며들어 꽃잎이 핏빛처럼 붉어졌다는…….너무도 애절한 사연과 연관된 꽃이다.
몇 년 전 장릉 참배를 간 적이 있었다. 그 때가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봄날이었다. 산 굽이굽이를 돌 때마다 붉게 피어난 진달래꽃을 보자니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예전처럼 날 좀 보소” 이렇게 애절한 몸짓하는 듯했다. 그때 우리 일행은 차창 밖 먼발치에서 청령포를 보았을 뿐 관풍헌에도 들르지 못했다.
단종대왕께서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하시던 중 홍수로 강이 범람하자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 생활하실 때 동쪽의 매죽루에 자주 오르셨는데 두견새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대왕의 처지에 비유하여 자규사(子規詞)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매죽루(梅竹樓)였던 것이 자규루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자규루로 부른다. 두견새를 한자로 자규(子規)라고 하는데 단종대왕의 시 구절 중에 “봄철 두견새 울 때에는 자규루(子規樓)에 오르지를 마라”라는 구절이 있다. 이 시 구절을 의식해서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우리 일행은 자규류에 오르지를 못했다.
진달래꽃은 이렇게 애달픈 꽃만은 아니다. 삼월 삼짇날 집안에만 갇혀 지내던 여인네들이 이날 하루 가까운 산을 찾아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솥뚜껑을 걸고 찹쌀가루로 화전을 부쳐 먹으며 화전놀이를 하던 꽃이 바로 진달래꽃이다.
진달래꽃으로 담은 술을 두견주라 하는데 운양집(雲養集)에 따르면 고려 개국 공신인 복지겸(卜智謙)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면천에서 휴양하였는데 그의 딸이 날마다 아미산에 올라 아버지의 병을 고쳐달라고 치성을 드렸다 한다. 치성 백 일째 되던 날 밤 꿈속에서 신선이 나타나 아미산에 피어있는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어 백일을 숙성하여 아버지께 드리면 병이 낫는다고 하여 딸이 신선이 시킨대로 하였더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진달래꽃은 이렇게 효심이 담긴 꽃이기도 하며 또한 진달래꽃으로 꽃다발을 만들어(이 꽃다발을 여의화장(如意花杖)이라 함) 과거 볼 선비를 이 꽃다발로 치면 장원급제하고, 마음에 둔 여인을 이 꽃다발로 치면 여인의 사랑을 얻게된다는 영험한 기운이 서린 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농촌엔 진달래꽃을 반겨줄 그리고 진달래꽃을 꺾어줄 아이들이 없다. 산에 피어나는 진달래꽃도 예전만 같지 못하고 해가 갈수록 빈약해지고 초라해지고 있다. 언제 또다시 산등성이마다 진달래꽃으로 가득해지고 제철을 만난 아이들이 진달래꽃을 아름으로 꺾어다가 꽃무덤 속에 묻혀 지낼 때가 올 것인지.
지금 아이들은 산에서 진달래꽃을 만나지 못하고 소월의 <진달래> 시 속에서 또는 이흥렬의 <바우고개> 노랫말 속에서나 만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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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록(시인 겸 수필가)
안동대학교 인문대학 한문학과 졸업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석박사 통합과정 수료 한국문인협회 회원(시, 수필) 국가기록원 문경시 민간기록 조사위원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연구원 문경문화원 근현대인물사 편집위원 경북향토사연구회 부회장 겸 편집국장 문경시사(聞慶市史) 편찬위원회 조사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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