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子子孫孫 이어온 外孫奉祀 400년(1)
홍영선
군위 서북쪽 20여리에 군위읍 대흥동에 거주했던 고성 이씨가 안동에서 군위로 입향(入鄕)한 이후 현손(玄孫)대에서 후손이 끊어져서 같은 고을 외손인 남양 홍씨 후손들이 대대로 외선조의 4대 봉사를 이어 왔으며, 지금은 시제(時祭)를 받들고 산소를 성묘하며 관리하고 있다.
경상도내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 외손봉사하는 가문이 곳곳에 있는 사례를 상고하며 1592년 임진왜란 이전에는 후사(後嗣)를 위한 입양제도(入養制度)가 성행하지 않았는지? 그 연유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후사(後嗣)가 없으니 자연 가계가 민멸(泯滅)되고 후대에 이어오는 미담으로 전해올 뿐이다.
다행히 본고에서는 외손들이 문헌을 남겨 두었으나 자세히 전하는 선비가 없으니 현대인에게 조상의 아름다운 미덕을 전도(傳道)하는 의미에서 우선 각종 문헌을 통하여 후손이 없는 고성이씨 가계와, 외손봉사하는 남양 홍씨 두 가문의 내력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고성이씨 안동 정착과정1)
고성(철성) 이씨가 안동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영산(靈山) 현감을 지낸 이증(李增)이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의 산수(山水)가 아름다움을 보고 부의 도성(都城) 남문(南門) 밖에 우거(寓居)한 뒤에, 성동(城洞), 법흥동(法興洞)으로 이거(移居)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증(李增)은 세조 때 좌의정 용헌(容軒) 이원(李原,1287~1367)의 여섯 째 아들이며, 경주 이씨 경상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이희(李暿,1443.6~1444.2 재임)의 사위가 된다. 감사공(監司公)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현손(玄孫)으로, 아들 이문형(李文炯)과 이문환(李文煥) 형제는 문과에 급제했으며, 또한 증손인 이사균(李思鈞)도 문과에 급제했다. 이희는 공조참의에서 경상감사로 도임하여, 안동 순찰(巡察)도중 학질(虐疾)로 영호루(映湖樓)에서 객사(客死)했다고 하며, 유명한 일화(逸話)를 남겼다. 화산[안동]의 향기로운 풀 섶 길에서 花山芳草路(화산방초로) 검은 소를 타고 달밤을 거닐도다 騎牛踏月中(기우답월중) 가련한 남자를 일으켜 더니 可憐男子興(가련남자흥) 머리위에 한 가지의 붉은 꽃을 얹었구나 頭戴一枝紅(두대일지홍)2)
객사하여서 고향으로 귀장(歸葬)하지 않고 남선면(南先面) 현내리(縣內里)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이증(李增)은 우향계(友鄕契) 13인 중 한명으로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1478년(성종9)에 지은 계축 서문에서 “東方仁人君子國 風俗第一稱安東”,....칭송하였으니, 계원의 후손들이 선세(先世)의 우의(友誼)를 다져오고 있다.3)
영산현감공의 묘소는 임동면 수다산(水多山) 와우형(臥牛形)인데, 묘소의 혈(穴) 자리는 우각(牛角)에 해당 십대명국(十大名局)의 명당이다. 아들 굉(宏)이 1480년(성종11)문과하여 개성유수(開城留守)로 귀관(貴官)하여 참판(參判)으로 증직되었다. 현감공의 장자 윤(胤,1462~?)은 1486년(성종17) 문과하여 부제학이고, 호가 쌍매당(雙梅堂)이다. 둘째 주(冑,1468~1504)는 호가 망헌(忘軒)으로 1483년 생원·진사시 입격한 후, 1488년 문과에 아원(亞元:2등)하여 사간원 정언이고, 셋째가 군위로 우거한 전(腆)으로 지례현감이고, 넷째 육(育)은 호가 모헌(慕軒)으로 1507년 증광시에 진사가 되어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 다섯째 여(膂,1484~1512)는 27세인 1510년(중종5) 식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수찬(修撰)이 되었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로 맏이 쌍매당 공은 피화(被禍)되어 그 후손은 군위, 영천 등지로 산거(散居)하였고, 둘째 망헌공은 형과 함께 연루되었다가 유배 후 1504년 갑자사화에 사사(賜死)되어 무후(無後)되었고, 넷째 모헌공은 중형(仲兄)이 피살되니 벼슬을 그만두고 청도 유등리(柳等里)로 은거(隱居) 하였으며, 다섯째 여(膂)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거쳐 수찬(修撰)이 되었으나 무남(無男)하여 후손이 없다.
1)<안동문화산책> 徐周錫, 저. 이화문화출판사, '안동지방 씨족의 정착과정(Ⅶ)Ⅱ', 각 성씨의 정착과정.
2) 학질에 걸려서 객사하였는데 전하기를 “수년전 명나라 사신으로 가셨을 때 유명하다는 術士를 찾아가 身數를 물으니 시한구절 써주었다.”는 설로‘ 一枝紅’은 成川의 妓女이름으로, 영호루 연회를 마친 후 안동 官妓의 무릅 위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당시 영산현감이던 李增이 장인 장례를 치르기 위해 안동에 와서 산수가 아름다워 이곳에 입향 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3) <友鄕契>계원으로 左軍司勇 權自謙, 玉果縣監 裵孝騫, 靈山縣監 李璔, 長興副使 南敬身, 中部司勇 盧孟信, 通贊 裵孝納, 左軍司正 南致恭, 左部司勇 權琨, 成均進士 南致晶, 長興府使 南致仁, 進武副使 裵稠, 禮安訓導 裵禎, 別侍衛 權叔衡(13인)
Ⅲ. 고성이씨 군위 입향
1. 고성 이씨 세거지 마을의 자연환경
군위군 군위읍 대흥동(大興洞)은 2개의 행정 동명으로 1동은 보동(甫洞) 또는 보로동4)(甫老洞)과 2동은 농바우(籠岩)등의 자연부락이 있다.5)
마을의 자연환경을 살펴보면 대흥1동 동쪽은 중매산이 솟아있으며, 남쪽에는 위천(渭川)이 흐르고, 북쪽에는 태항산(太恒山) 일명 대흥-쟁이산이고 내의동으로 가는 고개를 “댕댕-이”라고 한다. 대흥2동 동쪽은 동주리들[周牢:주뢰] 서쪽은 하보(下洑)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중보들이고 그 앞에는 위천이 흐르고 있다. 북쪽은 농바우 산이 마을 뒤쪽에 동서로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4)<慶北마을지> <中卷> 211쪽과 <軍威郡誌> <上卷> '마을지명유레' 680쪽에 "'甫老'라는 지명은 남양홍씨 洪曘(1614~1666)가 지었다.”고 한다. 이보다 먼저 外祖父 李榮男(1561~1594) 거주한 것으로 볼때 고성이씨가 먼저 정착한 이후 都事 洪善慶(1585~1655)이 이영남의 사위가 된 이후 재산이 외손에게 이어받게 됨으로 都事公의 3子가 이거하였다. 5)<군위군지> <上권> “마을지명유래” 680쪽, 군위군간행, 2018년.
|
 |
|
| ↑↑ 군위읍 대흥1동 보로리 |
|
2. 마을의 역사
대흥1동인 보동(甫洞)에는 윗마을(윗진사) 아랫마을(아랫진사)의 자연부락이 있다. 보동은 고성 이씨가 크게 마을을 이뤄 잘 살았다는 뜻에서 “보(甫)”자를 넣어 ‘보동(甫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윗마을 진사[생원]는 소암(所庵) 이정우(李廷佑,1764~1843)가 살았고, 아랫마을 진사는 농산(農山) 이광덕(李匡德,1762~1824)이 진사가 되어 살았다고 부쳐진 지명이다. 농-바우(籠岩)은 마을 뒷산에 장롱(欌籠)같이 생긴 큰 바위가 있고 그 옆에 탕건(宕巾)바위와 각시 바위가 있어 신혼부부는 장롱이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행정구역은 군위군 소보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보동과 농암동 일부를 병합하여 대흥동(大興洞)이라 하여 소보면 관할(管轄)이었으나, 1989년 군위읍으로 편입되었다. 1990년대 성씨별 가구분포를 보면, 대흥1동 보동은 총 75가구 중 아랫마을은 남양 홍씨가 39호이고, 윗마을은 무안 박씨가 14호 청송 심씨가 9가구, 기타가 13가구이다. 대흥2동 농암은 19가구 중 연안 이씨가 13가구, 기타가 6가구이다. 그러나 1930년대 <동족집단상황>을 보면 소보면 대흥동은 남양 홍씨가 47가구였다.6)
6) <朝鮮의 姓> 朝鮮總督府 1924년(昭和9년) 발행 <同族集團狀況> 253쪽 참조.
|
 |
|
| ↑↑ 군위읍 대흥2동 농바우 |
| 3. 고성 이씨 군위 입향(入鄕) 선조
고성 이씨 현조인 용헌(容軒) 이원(李原,1368~1430)의 증손 이전(李腆)이 안동에서 군위로 입향한 분이다 입향 연유는 알 수가 없으나, 대개는 처가로 우거한 것이 많다. <고성이씨족보>7)에 “李腆 : 進士. 縣監. 配, 星州裵氏. 父, 敬章. 外祖, 碧珍 李氏. 主簿, 李惇. 正言. 耕隱 李孟專, 子”로 되어있다. 1989년 이후 간행한 족보8)에는 “李腆: 進士, 通訓大夫, 行知禮縣監.”9)으로, 1939년 홍종소가 지은 <고성이씨 4世, 阡表>에는 배위가 '대구 배씨(大邱裵氏)'로 되어있다.
7)<固城李氏族譜> <乙卯譜: 1915년> 文山에서 간행. 木活字, 16권, 22책. 乙卯三月上澣, 序文 後孫, 鍾夏. 凡例, 後孫 通政大夫 行 咸安郡守, 淸烈 謹識. 券之 七.
8)“李腆: 進李氏 正彦, 耕隱 孟專 子. 墓, 軍威邑 大興,氷洞谷, 雙墳, 碑<固城李氏四世阡表> 南陽 洪鍾韶 撰.” 士, 通訓大夫, 行知禮縣監. 配,宜人, 星州裵氏 父,敬章, 外祖 主簿 碧珍
9)李腆은 進士와 知禮縣監은 <司馬榜目>과 <朝鮮王朝實錄>등 <知禮縣誌>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외손 홍승(洪昇,1612~1688)이 지은 지례현감공의 손자 관瓘의 <적순부위이공묘갈迪順副尉李公墓碣>에는 “祖諱, 腆, 縣監. 娶 訓導 裵敬章女, 始來居軍威”10)라고 하였으며, “현감공 전은 훈도 배경장의 딸에게 장가들어, 비로소 군위로 와서 거주하였다.” 하였지만 배경장의 본관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군위읍지인 <적라지> <성씨>조에는 배씨 본관은 “김해 배씨(金海裵氏)” 뿐이다. <적라지> <권1,인물>조의 기록에는 “고성인이니, 좌의정 이원의 증손이다. 능히 집의 명성을 이었다. 운수가 기박함에 빠져 진취함이 이롭지 못하였다. 천거로써 보직되었으니 지례현감에 그치었다.” 라고 적었다.11)
10)<鼎厓先生文集> <권4,墓碣> “迪順副尉李公墓碣”
11)<赤羅誌> <권1,人物條> “李腆 : 固城人 左議政 李原 曾孫, 能繼家聲 坐數奇不利 進就以薦補官止 知禮縣監.
4. 입향조 아들 감찰공 이의(李顗) 초명(初名): 호(顥)
고성 이씨 야로당(野老堂) 이순(李淳,1530~1606)12)이 작성한 최초보인 <固城李氏野老堂草譜>에 “이의(李顗)의 초명(初名)은 호(顥)로 기록”되어 있다. 1915년 <을미보乙未譜>에는 ‘현감(縣監)’이라 하였고, 아들 <적순부위묘갈迪順副尉墓碣>에는 “諱顗 司憲府監察, 妣 淑人 南原梁氏 縣監 潤, 之女”라13) 하였다. 근세 간행 <고성이씨세보>에 “外祖 二相 全州 이세사(李世槎)”로 되어 있으나 <남원양씨세보>에는 “광주(廣州) 이씨 父 判中樞 세좌(世佐)”이고, 고정(考正)하기를 “구보에 부인(夫人) 친가세보(親家世譜)와 외예보(外裔譜)의 정확한 근거에 의거 바로 잡는다”고 하였다.14) 그리고 <남원양씨세보>에는 맹산현감 양윤(梁潤)의 사위 이기(李覬)로 기록된 것은 오기(誤記)이다.
12)野老堂 李淳(1530~1606) 고성인, 李原의 후손으로 彦明의 子, 字는 子眞, 호는 野老堂, 退溪 李滉門人, 東岡 金宇顒, 寒岡 鄭逑와 道義之交 山南先生, 光陵參奉, 康陵祠官, 壬辰 召募將 孔谷書堂 洞主, 柳溪祠 栢谷 鄭崑壽, 雪峰 朴璨과 配享 有 野老堂實記, 進士 京山 李禹世 撰家狀.<星州大觀>
13)<南原梁氏世譜>에는 “孟山縣監 潤, 祖 旌善郡守 琇, 曾祖 判書 號訥齋 誠之. 女,李顗 監察, 子 瓘, 女 進士 趙應聖, 張文佑”
14)<固城李氏世譜> “外祖 二相 全州 李世槎” 는 <南原梁氏世譜> “廣州李氏 父,判中樞 世佐로 舊譜에 配位以 全州李氏 父,二相, 世槎 記載而今考 夫人親家世譜及 外裔譜 確據匡正”
군위군지인 <적라지> <인물조>에 이의(李顗)는 “전(賟)의 아들이다. 재행과 문망이 당대의 추앙하는 바 되었다. 벼슬은 사헌부감찰을 하였다.”고 했다.15) 공의 아우 이령(李領)은 <적라지> <과명科名>조에는 “좌의정 원의 현손이니 진사에 오르다”고 하였으나 <사마방목>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령의 배위는 종손자 “이영남(李榮男)이 종조모인 오씨에 길러지고, 돌아가신 후 여묘(廬墓) 3년을 했다.”고 묘갈에 기록되어 있어, 오씨로 추정하고 있다.16)
15)<赤羅誌> <人物條> “李顗, 腆之子, 才行文望爲一世, 所推官 司憲府監察”.
16)<鼎厓先生文集> 권4, <成均進士李公墓碣>에 “鞠養於祖母吳氏,吳氏歿服喪悲哀居廬三年”祖母는 從祖母로 <四世阡表>에서 바로잡았음.
매부(妹夫) 조효종(趙孝宗)은 한양조씨로 찰방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사맹(司猛) 조당(趙讜)이고, 사위인 구봉(龜峯) 김수일(金守一,1528~1583)은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둘째아들로 1555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5. 입향 조의 손자, 적순부위(迪順副尉)공, 관(瓘)
<적순부위이공묘갈>에 자(字)는 대수(大售),이고, 정덕(正德) 정축(丁丑:中宗12년,1517년)생이고, 융경(隆慶) 기사(己巳:宣祖2년,1569년) 10월 20일 향년 53세이다. 묘는 빙동(氷洞)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이다. 배위는 광주(廣州) 이씨 고(考)는 학생(學生) 이진(以震), 조(祖)는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 수공(守恭), 증조는 군수 세충(世忠), 고조는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익평공(翼平公) 극배(克培)이며, 1남2녀를 낳았다.17) 사위는 권희(權暿), 이민일(李民逸)이고, 서자로 유생(酉生), 충남(忠男), 딸은 정민진(丁敏進)에게 출가하였다.
17)<廣州李氏世譜> 父 以震의 字는 子長, 1484년생, 副司正, 1543年卒. 祖, 守恭의 자는 仲平, 1464년생, 1486년 進士, 1488년 謁聖文科壯元, 弘文館典翰, 甲子1504년 10월 28일 被禍,曾祖, 世忠, 安岳郡守, 贈, 都承旨, 高祖, 克培, 字는 謙甫, 號는 牛峯, 1422生, 1447年 生員, 同年文科, 廣陵府院君, 右議政, 領議政. 1495年卒, 諡號, 翼平.
이 기록은 족보에 없는 새로운 사실로 정애공이 지은 묘갈에서 확인되었다. 묘갈문에 의하면 “공은 현달한 명문의 자손으로 이어오면서 그 가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훌륭한 행실과 숨은 덕행을 어찌 후손들에게 복을 드리우고 덕행을 어찌 전하지 않으리오. 불행하게도 진사공[이영남]이 일찍이 돌아가서 지금은 옛 사람에 물어서 아는 자에 의하여 그 계보에 년 월을 기록하노라 오호라! 슬퍼하였다.” 라고 했다.18)
18)<鼎厓先生文集> <迪順副尉李公墓碣> “公以 蟬聯華冑 克世其家 懿行隱德豈無 垂裕後昆者而不幸 進士公 旣已早世, 今無舊人 可以問知者 玆錄其譜系年月, 嗚呼非夫.”
부위공 관(瓘)의 아우로 구(玖)가 있으나 족보에는 ‘단불래(單不來)’ 라고 기록함은 수단(收單)이 없었다는 것이다. 매부인 훈도(訓導) 장문우(張文佑)는 영천훈도 간(侃)의 셋째 아들로, 맏형인 장문보(張文輔,1516~1566) 진주목사의 동생이며, 아들로 칭기(偁機)와 중기(仲機)가 있고,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둘째 매부 조응성(趙應聖)은 본관이 배천(白川)이고, 이산(理山)군수 연(然)의 아들이다. 1555년 진사가 되고, 아들 원남(元男), 형남(亨男) 형제 모두 생원(生員)이다.
6. 입향조의 증손 진사공 영남(榮男)
정애 홍승이 지은 <성균진사 이공 묘갈>에 의하면, “이공은 1561년(嘉靖 辛酉, 명종16) 5월에 태어났고, 자는 효선(孝先, 榜目에는 孝述)이며, 태어날 때부터 용모가 총명하고, 세속에 어울리지 않아 뛰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항상 효행을 받들지 못했음을 지극히 원통하게 여겼다. 조모[종조모] 오씨에게 기르고 양육을 받았다. 조모가 돌아간 후 상복을 입고 슬퍼하면서 여묘에서 3년을 지냈다.
첫 부인은 일선(一善) 김씨 김구연(金九淵)의 딸로써 후사가 없이 몰(歿)하였다. 재차 장가들기를 진성 이씨 퇴계(退溪) 선생 종손자(從孫子) 평안도 도사(都事) 이열도(李閱道,1538~1591)의 딸이다. 부인은 유순하고 아름다운 부덕(婦德)이 있었다. 제사용 물품을 올리는 준비는 지극한 정성으로 하였고, 집안에서 마땅한 내조가 있으니 많은 원근 이웃의 족친이 모두 어질다고 칭송하였다. 1591년(辛卯,선조24) 진사시에 합격하고19) 다음해 임진년에 딸을 낳았으며 2년 후 1594년(甲午,선조27) 1월 20일 질병으로 가제(家第)에서 졸하였다. 향년이 34세이다.
19)<司馬榜目> 李榮男:宣祖24年(1591)辛卯式年試 進士3등. 字, 孝述, 辛酉(1561年明宗16)生, 31才合格, 本貫, 固城. 居住,軍威. 父, 李瓘, 忠義衛 副司勇. 여기서 묘갈에는 字가 孝先. 榜目은 孝述.相異.
착한 자에게 복이 있는데 어찌 앞뒤가 바뀌고, 이치에 어그러짐이 이와 같은지 마음이 애통함을 이길 수가 있으랴! 의인(宜人)의 통념은 아들이 없어서 일찍이 과부가 되어 후사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들의 집안에서 지아비 무리들이 형제가 없었으니 후사할 자가 가히 있겠는가? 진사공이 살아 계셨을 때 나의[洪昇:자신] 왕부(王父)[洪瑋,1559~1624]와 사돈 맺기로 약속하였으니 나의 선군(先君:洪善慶,1585~1655)으로 하여금 동상례(東床禮)20)로 마땅히 아내로 맞이토록 하였다. 오호라! 진사공의 아름다운 행실과 미덕이 어찌 걸출하지 않았으리오? 뒷사람에게 알리고자 하였으니 진사공이 일찍이 왜구를 무찔러 전공의 일기가 세상에 전하는 가승(家乘)이 이미 잃어버려 임란이 일어난 지 멀고, 후손들의 자취가 없어 상세히 문의하여 모면하고자 함에 그 보계(譜系)에 자손을 이상과 같이 기록하고 의인(宜人)의 모범을 기재 묘 앞 음기(陰記)로 거듭 기술하지 않는다.”
20)<東牀腹坦> 사위를 일컬음. 晉의 太尉 郄鑒의 집 東牀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음식을 먹고 있던 王羲之를 사위로 맞이한 故事에서 연유된 말. 줄여서 東坦 이라고도 한다.출전:晉書,王羲之傳.
선군(先君) 홍선경(洪善慶)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아들 6명, 딸 2명을 두었다. 장남 창(昶,1610~1669)은 호가 류하(柳下)이고, 둘째 승(昇,1612~1688)은 호가 정애(鼎厓)로 남별전(南別殿) 참봉(參奉), 셋째 유(曘,1614~1666)는 통덕랑(通德郞) 호가 신와(新窩:외손봉사), 넷째 면(冕,1618~1685)은 호가 서산(捿山), 다섯째 준(晙,1625~1686)은 자(字)가 경회(景晦), 여섯째 환(晥,1627~1671)은 호가 각금헌(覺今軒)이다. 사위는 이동명(李東溟,1624~1692)은 본관이 덕수(德水), 1652년 문과(文科)로 승지(承旨), 둘째 사위 김계홍(金啓弘)은 본관이 안동이다.
<적라지> <인물조>에 “이영남의 자는 효선(孝先)이며 의(顗)의 손자이다. 천성으로 자질이 빛나고 크며, 성품이 총명하였다. 이보(李輔,1545~1608 호는 남계南溪)21)의 학문을 쫓아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임진란에 망우당 곽재우(郭再祐,1552~1617)의 창의군(倡義軍)에서 영남에 격문을 지어 보내 의량(義糧)을 모으니 말씀하는 기운이 치열하여 원근이 솟아 움직였다. 얼마 아니되어 병에 걸려 일찍 죽으니 나이 겨우 34세[1594년]였다. 처 의인(宜人) 이씨는 열녀(烈女)라 일컫는다.22)
21)李輔(1545~1608) 字는 任景, 호는 南溪, 本貫은 延安, 松塢 李軫의 아우, 西厓門人, 同鄕人.
22)<赤羅誌> <人物條> 李榮男 “字, 孝先, 顗之孫, 天資耿介 性又聰敏, 從 李輔學中 進士壬辰之亂 郭再祐 倡義旅 榮男爲檄 道內 募義糧 辭氣燬烈 遠近聳動 未幾遘疾夭年 纔三十四, 妻宜人李氏以烈女稱.”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