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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재 성황당 |
| 문경새재(15)
이정록
15. 새재 성황당
이별과 만남의 상징인 성황당은 지금은 잊혀져가는 옛 모습이 되어버렸다. 조금은 애틋하고 조금은 눈물겨운 성황당. 그 성황당의 유래는 중국 주나라 때의 강태공의 부인인 마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강태공이 평소에 집안을 돌보지 않아 가난한 생활을 면하지 못했는데 마씨는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엔 가출을 하게 되었다. 후에 강태공은 무왕의 부름을 받아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자 마씨는 집 나온 것을 후회하며 강태공을 찾아가서 지난 일을 뉘우치며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강태공은 한번 쏟아진 물은 다시 담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부인 마씨를 용서하지 않았다. 마씨는 비탄에 빠져 결국엔 죽고 말았다. 이를 불쌍히 여긴 마을 사람들이 오가며 돌로 무덤을 만들어 죽은 마씨의 명복을 빌었는데 이것이 성황당의 시초였다고 한다.
이런 유래 때문인지 성황당의 신은 여신이 많고 새재 성황당 역시 여신이다. 새재 성황당은 제일 관문인 주흘관 동편 성곽 안쪽에 있다. 1970년 후반 성황당 보수 공사를 하면서 중건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을의 북쪽에 주흘산이 있고 주흘산 아래에 성황사가 있으니, 사우를 지은 지가 백여 년이 넘었지만 신령스럽고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내려진 복이 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아, 세월이 점점 오래되어 기둥과 상량이 썩고 무너짐이 이르렀습니다. 이에 여러 장인들의 정성을 모아 좋은 때에 소나무 기둥을 세우고 좋은 날에 상량을 올립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한 뒤로는 모든 이들이 안녕하여 육축이 번성하매 새는 날개 짓하고, 꼬리 달린 짐승들은 서로 뒤섞여 아름다움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제비도 날아 새로운 상량을 하례하고 묘우(廟宇)의 중건에 인하여 해가 빛나는 것은 복록이 새롭게 구비되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께서 머무는 곳은 남쪽으로 칠십 고을의 백성을 진무하며, 당집은 새가 날개를 편 듯 자리잡고 있으니 이에 우리나라 억만 년의 아름다움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나는 꽃다운 향기는 오는 사람 가는 나그네가 드리는 정성 때문이며, 초하루와 보름에 나는 향불은 마을의 늙은이와 동네의 아낙들이 매일 비는 기도 때문입니다. 처마에는 10리의 장풍(長風)을 맞아들였고, 문에는 새벽 밝은 달이 빛나고 있습니다. 위 기둥과 아랫집은 크고 씩씩한 길함에서 취하여 가지런하고 의지하는 것 같습니다. 오로지 바람은 풍년을 위탁하는 경사가 지붕 위에 있고 그 지붕 위의 지극하신 신께서 내려오셔서 백성이 그 복을 받기를 원하옵니다. 이날이 바로 갑진년 봄 2월이다. 도광 24년 2월 초십일 기둥을 세우고 같은 달 20일 미시(未時)에 상량합니다.”
중수 상량문의 내용으로 보아 현재의 성황당 건물은 1844년(도광 24년)에 중수를 한 것이고 이보다 백 년전인 1700년대 초반에 성황당이 처음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1관문인 주흘관과 초곡성의 축성시기가 1708년이었으니 새재 성황당은 초곡성의 축성과 때를 같이하여 건립되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초곡성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새가 날개를 활짝 펴서 남쪽으로 힘차게 날아가는 형상이다. 주흘관이 새의 몸통이고 양쪽의 성곽이 날개인 셈이다. 이러한 형상이라 성황당 중수 상량문에도 「당집은 새가 날개를 편 듯 자리잡고 있으니 이에 우리나라 억만 년의 아름다움입니다.」라고 한 듯하다. 새재 성황사는 <상량 중수문>에서 언급했듯이 새가 날개를 편 듯 자리 잡은 곳 그러니까 주흘관 동편 성곽, 새의 왼쪽 날개 죽지에 해당하는, 그 날개 죽지 중에서도 힘이 가장 많이 맺힌 중간 부분 날개가 꺾인 그곳에 터 잡고 있다.
새재 성황사는 측면 두 칸 전면 세 칸으로 당집으로서는 크기가 우람하고 또한 훌륭하다. 성황사 중간에는 성황신의 탱화가 모셔져있고, 왼쪽에는 물색 고운 한복 치마저고리가 한 벌 놓여있는데, 이 치마저고리는 새재 성황신과는 사연이 깊은 치마저고리이다. 오른쪽에는 또 다른 여인의 탱화가 걸려있다. 이 탱화는 무속인들이 별도로 모시는 신이라고 한다.
새재 성황신은 인조 때의 재상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대감과의 만남을 통하여 병자호란이라는 국란을 극복하게 한 성황신으로서 전국의 유명 무속인들이 자주 찾는 영험한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새재 성황신과 최명길 대감과의 설화는 입에서 입으로 전래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여 기술해 본다.
최명길의 본은 전주이고 자는 자겸, 호는 지천이며 시호는 문충이다. 1586년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났으며 선조 38년(1605년) 약관의 나이에 생원, 진사시를 모두 통과하고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진출하는 화려한 경로로 조정에 등장하여 이조, 호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최명길이 관직에 나아가기 전 젊은 시절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에게 가기 위하여 새재를 넘게 되었다. 최명길은 새재 깊은 산속에서 웬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는데, 함께 가던 여인이 자기는 사람이 아니고 새재 성황신이라고 하면서 지금 만주에 새로운 천자가 탄생하여 천하의 모든 신들이 새로운 천자의 등극을 치하하러 만주에 갔다가 지금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새로운 천자의 등극이라는 말에 최명길이 사뭇 놀라며 크게 근심하니 성황신은 이는 천운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최명길이 안동을 가는 길이라고 하니 성황신도 안동을 가야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만주에 간 사이 안동에 사는 모 좌수가 서울에 갔다가 새재를 넘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성황당에 걸려있는 치마를 보고 그만 욕심이 생겨 그 치마를 훔쳐 자기 딸에게 주었으니, 이런 고약한 자를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지금 당장 안동으로 내려가서 좌수의 딸을 죽이겠다고 하였다. 최명길은 사람을 죽이러 간다는 성황신의 말에 인명은 제천인데, 그만한 일로 사람을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느냐고 하면서 자신이 훔쳐간 치마를 돌려주도록 조치를 할 것이니 사람의 목숨을 제발 해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새재 성황신이라는 그 여자는 최명길에게 공은 장차 국란을 극복하는 정사공신으로 나라에 큰 공을 세워 훗날 영의정까지 오를 귀하신 몸이니, 공의 체면을 생각하여 좌수의 딸을 죽이지는 않고, 징벌만 할 것이니 공은 이러이러하여 제 체면을 세워주시오. 하면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최명길이 안동에 도착하여 모 좌수의 집을 찾으니 좌수의 딸이 급사하여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최명길은 급히 주인을 찾아 급사한 딸을 살릴 수 있는 방도가 있다고 하니, 주인이 딸이 있는 방으로 안내하였다. 그 방에는 새재에서 만났던 성황신이 좌수 딸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최명길이 방으로 들어가자 성황신은 황급히 일어나면서 「이제야 오십니까.」하며 반가이 맞이하였다.
최명길이 혼절한 좌수 딸의 기색을 살피자 성황신은 잠깐 기절한 것이니 염려 말라고 하였다. 성황신은 뒷일은 공께서 잘 처리해주리라 믿고 그만 물러간다면서 문밖으로 나가는가 싶더니 다시 돌아와서 최명길에게 의미심장한 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먼 훗날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나서 나라가 위태롭게 될 터이니, 그 때 공께서는 만주에서 새로 일어난 나라와 맞서지 말고 화친을 택하여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명길이 무어라고 대꾸할 사이도 없이 성황신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최명길은 좌수를 불러 그동안에 일어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새재 성황당에서 가져온 치마를 불사르고 깨끗한 음식을 차려 정성껏 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지성으로 치성을 드리니 혼절했던 좌수의 딸이 비로소 소생하였다. 최명길이 좌수에게 새재 성황당에 당집을 짓게 하였는데, 그 당집이 새재 성황당 당집이라는 것이다.
1636년 인조 14년 병자년에 새로운 나라 청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침공한 난리가 병자호란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청나라와 끝까지 싸워야한다는 주전론(主戰論)이 지배적이었다. 최명길은 주전론이 일색이던 그 때에 홀로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主和論)을 펼쳐 끝내는 청과의 화친을 이끌어 냄으로써 삼전도의 곤욕을 치르기는 했지만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었다. 최명길이 청과의 화친으로 국난을 극복한 것은 그때 새재에서 만난 성황신과의 인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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