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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남평문씨(南平文氏) 가문의구미(龜尾)정착과 목면(木棉)의 전래(4)/김광수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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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현사


남평문씨(南平文氏) 가문의구미(龜尾)정착과 목면(木棉)의 전래(4)


김광수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구미)



❙문익점과 정천익의 목면시배지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 재배했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고, 여기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남효온이 쓴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있다.


❙목면화기(木棉花記)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우리 동쪽 나라에 애초에 면화가 없었다. 사람들의 의복은 명주나 삼베로 하는데 지나지 않았고, 이른바 솜이라는 것은 어떤 물건으로 만드는지를 알지 못했다. 이로움이 생겨도 부자들은 괜찮지만, 슬프게도 곤궁한 백성들은 어찌 곤란을 겪으며 고생하지 않았겠는가?

 고려말기 공민왕 때에 진양(晋陽) 사람 문익점(文益漸)은 성품과 행실이 착하고 공정하고 시문(詩文)이 법도에 맞고 고상하였다. 단번에 과거에 올라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에 이르렀다. 조정의 잘 잘못을 알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지정(至正) 계묘(癸卯 1363)년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원(元)나라로 들어 갔는데, 나라 일이 막히고 어려움을 만나 남쪽 변방으로 귀양갔다. 3년 동안 객지에서 지내다가 가을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오는 길에 시골 밭을 지나가다 보니, 밭에는 눈 같은 흰꽃이 있었다. 공이 보고 기이하게 여겼는데 물어 보고서 목화라는 것을 알았다. 생각하여 말하기를 “옛시에 금강의 서쪽에 목면화가 피었네”라고 했으니 반드시 이를 이른 것일 것이다“라고 하고는 목화씨를 붓 대롱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 

 화단에 심었더니 봄에 다섯가지 꽃이 피었고, 가을에는 흰 면화 꽃이 있었다. 이웃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보고 즐겼다. 그 종자를 얻어서 나누어 심었다. 이로부터 점점 번식하여 온 나라에 두루 퍼졌다.

 아아! 문공(文公)의 은택(恩澤)은 고을로부터 나라까지 덕을 보고 있고, 먼데 가까운데도 다 덕을 보고있고, 만세도록 덕을 볼 것이고,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게 덕을 볼 것이다. 덕을 보는 것을 태산(泰山)에 견준다면, 태산으로도 더 높을 수가 없고, 강이나 바다에 견준다면, 바다가 더 깊을 수 없다. 깊고 높도다! 백성들은 이름할 수 없도다

 [이 글은 행적기(行蹟記) 및 공행록(功行錄)에서 나왔는데 모두 남명(南冥)이 지은 것으로 실려 있다. 이제 문치창(文致昌)이 기록한 바에 근거하면 곧 남추강(南秋江)이 지은 것이므로 바로 잡는다. 추강(秋江)과 문치창(文致昌)은 동시대 사람이다]

惟我東方初無木棉花人之衣服不過乎以紬以麻而所謂絮則不知其以何物爲也其間生利哿矣富人哀此窮民豈不困苦乎高麗末恭愍王時晉陽人文益漸性行淑均文詞典雅一朝登第仕至司諫院左正言朝家得失知無不言時有盡職補闕之稱矣至正癸卯奉使入元値國事之屯艱見遂南荒旅食三稔比秋返命路出村田田有白花如雪公見之而奇之問知爲木綿花思之曰古詩云木綿花發錦江西必謂此也乃藏之筆管而來種之花階春有五色花秋有白綿花隣里之人競來觀賞得其種而分植自是漸繁遍於國內噫文公之澤自家而賴於鄕自鄕而賴於國遠近賴之萬世賴之與天地無窮而賴之賴之之功比之泰山而山不足高比之河海而海不足深深乎高哉民無能名焉 [此文出於行蹟記及功行錄皆以南冥所述載錄而今据文致昌所錄則乃是南秋江所述故釐正 秋江致昌同時人]


3. 문영의 부인 일선김씨

 일선김씨대동보(一善金氏大同譜)에는 해평(海平) 월포(月浦) 사동(蛇洞)에 사족 김순경(金純慶)의 여식이다.
 사위 문영(文英)은 태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 선산부사(善山府使),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고 은퇴후에 처가 고을에서 생을 마쳤다. 사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되고 양민공(襄敏公)으로 시호를 받았다.



III. 목면의 전래와 무명베

1. 해은(海隱) 문영(文英) 선생의 관직생활

 선생은 조선 태조(太祖) 7년(洪武 31, 1398) 무인년에 단성현(丹城縣) 배양리(培養里)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스스로 재주와 슬기가 뛰어나므로 할아버지 충선공(忠宣公)이 유달리 사랑하셨다. 백형(伯兄) 래(萊)와 함께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장(文章)과 재덕(才德)이 다함께 하니 사람들이 금옥(金玉) 같은 형제라 하였다.

 세종조(世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관직이 홍문관(弘文館) 교리 지제교(校理 知製敎)에 이르고 외직(外職)으로 선산부사(善山府使)와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당시에 종족(宗族)이 조정에 있는 자가 심히 많으므로 선생이 말하길 “조정에 사람이 가득 참은 집안의 복이다”하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처향(妻鄕)인 선산 해평(善山 海平)에 퇴거하여 산과 강을 거닐고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짓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세종 때에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아 벼슬이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에 오르고 세조(世祖) 6년(1460) 무진년에 별세하니 62세였다.  선산부사 도임시 처가 고을이라 상피원칙(相避原則)을 내세워 사양하였으나 왕명으로 제수(除授)하여 처가 고을인 선산의 부사로 관장(官長)이 되었다.

 형제(兄弟)가 선조의 유업을 이어받아 백형 래(萊)는 해사기(解絲機)를 만들고 선생은 직포기(織布機)를 제작(制作)하였는데, 뒤에 사람들이 문래(文萊)가 만든 해사기를 물레라 하고 베가 이루진 것을 문영포(文英布)라 하여 관용어가 되었다. 사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양민(裵敏)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2. 목면(木棉)의 전래(傳來)와 문영베틀

 문영 선생은 할아버지 충선공 문익점 선생이 가져온 목화 종자를 선산 처가 고을에 전하고 재배하여 목화솜을 생산하였다. 당시 결실 후 건조하여 피어난 목화솜에서 씨앗을 제거하는 씨아(去核車)와 형 문래가 물레(繅絲車)를 만들어 실을 뽑아내는 방법이 개발되었으며, 베를 짜는 베틀은 월호리(月湖里) 인근 마을과 접하고 있는 오상리(五相里) 사이에 도문천(道文川)이 흐르고 있는데 고저차(高低差)로 인하여 오상리 쪽의 나무다리 기둥은 높고 월호리 번개마을 쪽은 기둥은 낮은 나무다리 목교(木橋)의 공상다리를 보고 창안하여 베틀을 만들어 베를 짜는 직포기(織布機)를 만들었다. 이미 솜과 실이 베로 완성되니 모두들 문영베(文英布)로 불렀다. 후에 와전되고 방언이 되어 문영베, 무명베, 명베, 밍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베짜는 일은 아녀자의 일이었다. 문래가 만든 기구는 오늘날 ‘물레’가 되었다. 목화에서 생산되는 실을 뽑아서 문영이 만든 베틀로 짠 문영베가 음운이 변하여 ‘무명베’가 되었다. 그런 연유로 월호리 번개마을 뒷산 지맥 조계산(曹溪山)이 베틀산(布機山)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3. 베틀산의 포기굴

 조계산의 석봉(石峯) 중에 가장 가파른 것이 월출봉(月出峯)이다. 봉의 서쪽에 석굴(石窟)이 있으나 상하로 돌 벼랑이어서 잡고는 올라갈 수 없고, 줄을 매어 굴에 들어간다, 굴 속에 직포기(織布機)가 있다. 민간에 전하길 옛날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굴 속에 살면서 베를 짜서 생계를 삼았다고 한다. 임진왜변(壬辰倭變)에 피하여 숨은 자가 매우 많았으나 모두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양민공(襄敏公) 신도비명 병서

 정제회(기묘명현의 후손들의 친목회)의 벗 문재근(文宰根)이 반관(成均館)으로 나를 찾아와 그 선조 양민공 신도비명을 청하면서 중종조(中宗朝) 부제학 박윤경(朴閏卿)이 지은 묘갈명과 그 6대손 홍문관 수찬(修携) 선(瑄)이 쓴 사적기와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지은 묘비 음기(墓碑陰記) 등을 보이므로 자세히 살펴 보니 선생(先生)의 성은 문(文)이요 휘는 영(英)이요 자는 자화(子華)며 호는 해은(海隱)이다. 남평개국백 무성공 휘 다성이 시조이다. 이어 고려조 경절공 휘 익(翼)과 이부상서 경정공(敬靖公) 휘 공유(公裕)와 평장사 충숙공 휘 극겸(克謙)이 모두 중세의 현조다. 고조 휘는 윤각(允恪)이니 문과 문학박사요 증조 휘는 숙선(叔宣)이니 문과(文科)로 정순대부 보문각제학 증(贈) 문하시중 충정공(忠貞公)이시다. 조부의 휘는 익점(益漸)이니 성학(聖學)을 배워 정도(正道)를 창명(懼明)하고 목화씨를 얻어와 모든 백성들이 옷을 입도록 하시고 좌사의대부 우문관제학과 지서연사를 역임하시고 강성군과 부민후를 받으셨으며 시호는 충선공이고 호는 삼우당이시다. 부친의 휘는 중실(中實)이니 문과에 급제하고, 간의대부 증(贈)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시호는 의안공(毅安公)이요 비(妣)는 완산이씨(李氏)니 영동정(令同正) 경인(景仁)의 따님이다.

 선생(先生)이 우리 태조 7년 홍무(洪武) 31년(1398) 무인년에 단성현 배양리에서 출생(出生)하시었는데, 어릴 때부터 스스로 재주와 슬기가 뛰어나므로 충선공이 유달리 사랑하셨다. 백형(伯兄) 래(萊)와 함께 목은 이색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장과 재덕이 다 함께 하니 사람들이 금옥(金玉) 같은 형제라 하였다. 형제(兄弟)가 선조의 유업을 이어받아 형 래(萊)는 해사기(解絲機)를 만들고 선생은 직포기(織布機)를 제작(制作)하였는데, 뒤에 사람들이 해사기 즉 물레를 만든 사람을 문래라 하고 베가 이루진 것을 문영포라 하여 관용어가 되었다.

 세종 조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홍문관 교리 지제교에 이르고 외직(外職)으로 일선(一善:善山) 부사와 도총부 절제사를 역임하였다. 당시에 종족(宗族)이 조정에 있는 자가 심히 많으므로 선생이 말하길 “조정에 사람이 가득참은 집안의 복이다”하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처향(妻鄕)인 선산 해평(善山 海平)에 퇴거하여 산과 강을 거닐고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짓고 한가롭게 지내다 세종 때에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아 벼슬이 홍문관 직제학에 오르고 세조 6년(1460) 무진년에 돌아가시니 62세였다. 
  
 묘(墓)는 해평현 월포 사동 간좌(艮坐)다.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양민(襄敏)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조부 충선공과 백형 정혜공과 같이 현재 광주 동광영당(東光影堂)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군위 봉강서원 경현사(景賢祠)에 배향하였다. 배(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일선김씨(一善金氏)니 전서(典書) 연경(延慶)의 따님이다. 마음씨가 곱고 깨끗하여 숙덕(淑德)을 함께 갖추었다. 묘는 쌍영으로 우편에 모셨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관(琯)은 임금이 내린 이름으로 유손으로 아경(亞卿)이요 차남 전(琠)은 감사(監司)이다. 아경의 아들은 현(顯)이니 좌승지요 승지의 아들은 절(節)이니 생원이다. 5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자인(自仁)이니 호는 나촌(懶村)으로 진사 참봉이며 무예(武藝)로서 훈련참군(訓鍊參軍)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다음은 이의(以義)요 다음은 이례(以禮)이며 다음은 이지(以智)로서 생원(生員)이요 다음은 이신(以信)으로 문과 현감이다. 따님은 김옹(金壅)에게 시집갔으니 현감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선생은 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은 집안이어서 어진 이의 문하를 좇아 배웠으므로 도량이 넓은 인재로서 족히 나라를 건지고 도울만 하되 세태의 낌새를 알아차린 나머지 벼슬을 버리고 백의로 돌아갔으니, 덕이 많으나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여 그 뜻을 크게 펴보지 못하였다. 

 그 후예가 한미하여 각지로 흩어져 그 아름다운 일과 착한 행실을 모아서 전할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하늘의 도가 순환(循環)함에 조상의 음덕이 다시 회복되어 이제는 많은 자손이 다시 창성하였다. 19대손 대식(大植)이 독특(篤特)한 효성으로 혼자 거액을 부담하여 선생의 신도비를 건립한다 하니 윤강(倫綱)이 끊어지고 이로움을 구하는 지금 세상에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묘소와 위선(爲先) 밝힘을 위주(爲主)로 하는 성균관의 으뜸 자리에 있는 나로서 감탄함을 금할 수 없어 우(右)와 같이 간략히 적고 이이서 명(銘)한다.

특출한 탄생과 화려한 가문은 후배 학자에 어진 스승의 제자라
형과 함께 기계를 만들어 통용하는 말의 관형어가 되었다.
할아버지와 형과 공 자신과 함께 문씨의 세 어진 분이요,
벼슬을 버리고 자취 감춤은 오랫동안 숨어 사는 이치였다.
이에 꼭 닮은 손자가 있어서 영묘한 도리를 다시 밝히니
오랜 세월 후에 이 같이 나타나는 빛나는 그 이름을 그리워 한다.
내 그 정성에 감동되어 사실을 근거하여 명을 짓는다.


경신(庚申,1980) 4월 상완(上浣) 성균관장(成均館長) 박성수(朴性洙) 삼가 지음

公諱英字子華號海隱姓文氏其先南平人南平開國伯武成公諱多省之後也高祖諱允恪文科文翰學士曾祖諱叔宣文科正」順大夫寶文館提學贈門下侍中諡忠貞祖諱益漸號三憂堂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知書筵事封江城君贈領議政封富民侯」諡忠宣考諱中實文科諫議大夫贈門下侍中諡毅安妣貞夫人完山李氏領同正諱景仁女皇明洪武元年戊申生于丹城培養」堂里第釖穎秀異忠宣公奇愛之稍長與伯氏贊成公受學於牧隱李先生之門累蒙獎翊木棉之始播也贊成公諱萊作紡車以」引線公造織布之法故後人因稱引線者文萊成匹者文英遂成方言云兄弟俱以牧隱高弟文章難爲兄難爲弟而能繼述其祖」業世稱文氏三賢也我 太祖二年癸酉文科弘文館校理知製敎永樂初出爲一善郡守都摠府節制使時門蘭連爀宗族在朝」者公甚衆公歡曰優盡滿非人家之福也遂解緩屛居善山海平晦跡江湖漁樵自適 世宗朝累被襆命官至弘文館直提學宣德」四年己酉卒享年六十二葬于海平縣月浦蛇洞負艮之原與夫人雙瑩贈資憲大夫吏曹判書諡襄敏夫人一善金氏典書諱延」慶之女幽閑貞靜有女史風爲生二男長曰琯 御賜名有孫亞卿次曰琠監司亞卿男曰顯左承旨承旨男曰節生員生員生五」男一女男曰自仁號懶村進士參奉以武藝特除訓參軍曰以義文科縣監曰以禮文科司諫曰以智生員曰以信文科縣監女曰」金壅縣監五世以後內外雲仍甚繁不能盡記嗚呼公梃生世德之家遊學大賢之門濡染觀感自有成就之方夫以濟世弘量經」國善乎命與時違終未大展歛跡江湖齎志而歿可勝惜哉前參奉弘輔弘弼卽公之六世孫而吾黨之望人也其戀來訪因請表」隧之文蓋爲公圖不朽也辭狀其人而不獲謹采在家散出參考舊錄所載出仕履歷學問淵源略敍其梗槪書籍之外不敢容資一辭銘曰 文氏三賢公其一也因物敎民經綸才也見機保身明哲智也我用作銘匪謨墓也

正德戊寅十月 日 弘文館副提學朴閏卿謹撰
戊寅後四百五十年 丙午八月日 二十世孫宰根 謹書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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