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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문경새재(12) 임진왜란과 새재(하)/이정록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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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모산성

문경새재(12)


이정록

12. 임진왜란과 새재(하)

 순변사 이일(李鎰)은 함창(咸昌)을 거쳐서 4월 23일에 상주(尙州)에 도착하였다. 상주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를 맞으러 간다는 핑계로 산속으로 달아나 숨어 버렸다. 이일은 군사가 없음을 책망하며 판관 권길(權吉)을 참(斬)하려 하였다. 권길은 군사를 모아오겠다고 하고 밤새 인근 촌락을 돌아다니며 농민 수백 명을 모집해 왔다. 

 이일은 창고 곡식을 풀어 흩어진 백성 수백 명을 모아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서울에서 데려온 장졸을 합하여 800~900명 정도였다. 이일은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진 군사들에게 대오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상주의 북천변에서 훈련을 시키면서 조만간 몰려올 왜병과 일전을 치룰 준비를 하였다.

 소서행장은 24일 선산을 거쳐 25일 상주에 도착하여 북천변에 진을 치고 있던 이일의 부대와 접전을 하였으나 훈련도 받지 못한 오합지졸인 800여명의 군사는 왜병의 상대가 되지를 못했다. 상주에서 이일의 군사를 가볍게 격파한 왜병은 27일에는 문경까지 진격하였다.

 문경현감 신길원은 왜병의 기세에 놀란 역졸들이 피할 것을 권유하였다. 신길원 현감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성산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한 고을의 수령으로서 사명(使命)을 다해야 함을 천명(天命)으로 여기고 죽기를 작정하고 왜병과 끝까지 싸우다가 관병 20여명과 함께 순국하였다.

  상주에서 패한 이일은 새재를 넘어 도순변사 신립이 있는 충주까지 한걸음에 달려갔고 조령을 지키라고 명을 받은 조방장 변기도 새재를 버리고 충주로 퇴각하여 신립의 본진에 합류 하였다.

 신립이 한양에서 출발할 때 모집한 약간의 병사와 충청도 각 열읍에서 모병한 군졸을 합하여 신립이 거느린 군사는 도합 8,000명 정도였다. 신립은 군사들을 충주의 남단인 단월역 주변에 임시 주둔하고 대오를 정돈하는 한편 왜병과의 접전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종사관 김여물과 충주목사 이종장(李宗長)이 도순변사인 신립에게 충주의 지형이 평탄하여 대군을 맞아 싸우기가 불리하니 남하하여 조령으로 진지를 옮겨 새재의 적소 적소에 매복을 하여 왜적을 기습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신립은 병사들의 절반 가량이 말을 탄 기마병이고 충주의 병사들이 산악전이 생소하여 험준한 산악이 도리어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징집에 의해 마지못해 끌려오다시피 전쟁터에 나온, 병졸로서 자질이 부족한 신참들이라 산속에서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도망이라도 친다면 금호강변에서 집결하였던 군사를 잃어버린 순변사 이일처럼 크게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되기도 하였다.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쳐 왜적과 결사전을 계획하고 단월역에 집결해있는 병력을 탄금대로 이동시켰다. 이래서 천험의 요새인 새재는 지키는 군사 한명도 없는 무인지경이 되어버렸다.

 4월 28일 꼭두새벽인 4시 소서행장은 문경을 출발 새재를 넘기 시작하여 4시간 후인 오전8시 수안보에 도착하였다. 선발대 소서행장 부대는 계속해서 행군을 강행하여 낮 12시에는 충주 남단 단월역까지 진격을 하였다.

↑↑ 토끼비리(벼랑)

 상주에서 문경까지 오는데 꼬박 2일이 걸렸는데 비슷한 거리인 문경에서 충주까지는 한나절 남짓 걸린 점을 감안한다면 선발대인 소서행장은 새재와 토천(고모산성 일원)의 험준한 지형을 의식하여 조선군의 매복이 염려(念慮)되어 새재와 토끼벼랑 일원에 매복이 없음을 확인하고 신중을 기하느라고 이틀이라는 시일이 걸렸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4월 28일 조총을 앞세운 소서행장의 군사들이 신립의 진영으로 풍우처럼 몰려왔다. 신립은 퇴로가 없는 배수진인 만큼 8,000여 장병들이 사력을 다하여 선전할 것을 기대했으나 장졸들의 활약은 너무도 미약하였다. 

  8,000여명의 병사 중 반가량이 기마병이라고는 하나 각 고을에서 집결지까지 오기 위하여 말을 타고 온 것뿐 전마(戰馬)가 아니다.  허울만 기마병인 이런 기마병에게 큰 기대를 한다는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었다. 

낯선 땅에서 징발 되어 온, 서로 간에 전혀 면식이 없는 그야말로 오합지졸을 면할 수 없는 병사들을 데리고 신립은 왜병의 본진 속으로 깊숙이 돌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칼을 휘둘렀으나 조총으로 무장한 소서행장의 대군을 대적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4월 28일 신립은 「상감 뵈올 면목이 없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종사관 김여물과 그리고 8,000여명의 장졸과 함께 달래강의 수중고혼이 되고 말았다. 

 충주 방어선이 무너지고 신립 이하 모든 장졸들이 전사했다는 패보가 4월 29일 한양에 전해지자 신립을 철석같이 믿었던 조정에서는 대경실색하고 이튿날인 4월 30일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간단한 행구만을 꾸린 채 부랴부랴 멀고 먼 몽진 길에 오르게 되었다.

 200여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태평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전쟁 준비가 전무한 상태였던 당시, 조총이라는 신식무기를 개발하여 정예화 된 왜적의 대병력을 맞아 싸워야 했던 신립. 

 그가 비록 용맹한 장수이기는 하나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계백이 나당연합군을 맞아 마지막 전투를 황산벌에서 치르면서 후회없는 장엄한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신립 역시 제장들이 새재를 지켜야한다는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수의 진을 선택하여 허허벌판 탄금대에서 여한 없는 전투를 결행하여 전사로 승화하여 비록 패장으로 기록되기는 했지만 그의 기백과 충절은 5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가슴 속에 아쉬움의 한 자락으로 남아 있다.


다음편에 계속


이정록 프로필

안동대학교 인문대학 한문학과 졸업
안동대학교 한문학과 석박사 통합과정 수료
한국문인협회 회원(시, 수필)
국가기록원 문경시 민간기록 조사위원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연구원
문경문화원 근현대인물사 편집위원
경북향토사연구회 부회장 겸 편집국장
문경시사(聞慶市史) 편찬위원회 조사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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