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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5. <冬> 주암정의 주련(柱聯)
입동이 지나면서 서북풍이 불어오면 주암정의 문풍지가 울리면서 겨울이 다가왔음을 알린다. 황금물결이 풍성했던 들판에는 사람들의 발길조차 뜸하고 마을 돌담길 돌아가는 채마 밭에 미처 거두지 못한 배추 포기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린다. 감나무 꼭대기에 어쩌다 까치밥으로 남아있는, 까치들이 파먹다 남은 감 몇 개가 매달려있는 것이 이맘 때의 서중리 마을의 풍경이다.
주암정 연못 뚝방길에 철철이 꽃을 피웠던 나무들도 앙상한 가지만 남아 벌써부터 봄을 기다리게 하고 파란 융단처럼 단정하던 잔디도 푸른색을 접은 지가 오래되었다. 뚝방길이 끝나는 곳에 넓은 잔디밭엔 각종 소규모 음악회 등으로 분주했던 발걸음은 자취도 없고 휑하니 겨울바람만 지날 뿐이다.
연못(熊淵)을 온통 뒤덮어 그 무성하던 연잎도, 화려한 분홍색 연꽃들의 향연도 옛 얘기인양 아득하고, 시들어 검은색으로 변한 연잎만이 을씨년스럽다.
겨울을 맞이한 주암정은 마을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있는 것처럼 심오(深奧)하고 그윽한 맛이 있다. 이 심오하고 그윽한 맛을 풍기는 것이 주암정의 또 다른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겨울이 오면 주암정은 그 심오하고 그윽한 맛에 심취할 수 있어서 좋다.
주암정에 눈이 내리는 날에는 주암정은 먼 먼 절설 속에 나오는 깊은 산속의 암자처럼 적막만 쌓인다. 추녀 끝에 매달려 있어야 할 풍경(風磬)은 간 곳이 없고 풍경을 매달았던 자리에 고리만 남아있어 또한 풍경소리를 그리워지게 한다. 이렇게 겨울을 맞아 주암정에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져 적막한 때에 정자 기둥에 주련이 걸려있지 않았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않던 주암정의 기둥에 걸린 주련이 제 몫을 하는 때가 겨울이 아닌가 한다.
주련(柱聯)이란, 시구나 문장을 종이에 쓰거나 판자에 새겨 기둥에 걸어 두는 것을 말하는데, 기둥에 걸린 주련은 정서적 분위기를 고무(鼓舞)시켜 건물의 격을 높이고 운치(韻致)를 더해 준다.
한자(漢字)는 글자 자체가 미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한자로 쓴 주련을 기둥에 걸어 두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장식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더욱이 주련의 문장 내용이 그 건축물을 배경으로 하는 주변에 아름다운 경치를 표현한 시구(詩句)라면 주련은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매력적인 건축 장식은 한자 문화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건축물을 고상하고 우아한 공간으로 조성하는 매력(魅力)을 발산하게 된다.
舟巖亭 주련(柱聯)
주암정의 주련은 초서체를 약간 가미한 행서체인데 1944년 주암정을 건립하면서 함께 주련도 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련은 보편적으로 2구가 한 쌍을 이루며 대구(對句) 형식을 취한다. 주암정의 주련은 6구 3쌍으로 되어있다.
舟巖萬古泛錦川 주암은 금천에 천년만년 떠 있고 絶壁橫松倒立奇 절벽에 누운 소나무는 넘어질 듯 기이하네 顯祖醉月遊賞處 선조께서 달에 취해 노닐던 자리에 賢孫羹墻築小亭 후손들이 사모해서 작은 정자 지었네 柳岸棲花媚春輝 버드나무 언덕에 깃든 꽃은 봄빛에 어여쁘고 煙霞依然包削壁 연하는 변함없이 깎은 벼랑을 안고 있네
첫 번째 주련 2구(句)는 주암정 앞에는 금천의 물에 접하고, 뒤에는 바위 절벽에 의지하고 있는 주암정의 모습을 주제(主題)로 하였다. 萬古란 오랜 세월동안 변하지 않음을 뜻한다.
두 번째 주련은 선조(先祖)께서 노니시던 자리에 후손들이 선조(先祖)를 기리기 위하여 주암정을 지은 내력을 담고 있다. 여기서 현조(顯祖)는 이름이 세상에 높이 드러난 훌륭한 조상을 이르는 말이고, 현손(賢孫)은 孝子賢孫의 준말로 효성스런 아들과 어진 손자 또는 온순하고 충실한 후계자라는 뜻이다.
갱장(羹墻)은 죽은 사람에 대한 간절한 추모의 정인데,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 임금이 3년 동안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밥을 먹을 때에는 요 임금의 얼굴이 국그릇 속[羹中]에 비치는 듯하고, 앉아 있을 때에는 담장[墻]에 요 임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세 번째 주련은 주암정 주변의 자연 경관을 소개하고 있다. 연하(煙霞)는 안개와 노을을 지칭하지만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이르는 것이며, 의연(依然)은 전과 다름없다는 뜻이다.
주암정의 사계 연재는 이번 편으로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