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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4. <秋> 주암정의 가을
주암정의 가을은 주변 과수원의 물색 좋은 빨간 사과로 시작된다. 금천 너머로 보이는 현리 앞 들판에는 황금물결이 일렁이고 먼 산꼭대기부터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이 마을 뒷산까지 내려올 때쯤이면 들판의 누런 벼도 모두 거두어들이고 집집마다 툇마루 광주리엔 빨간 끝물 고추가 늦가을의 정취를 풍긴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끝도 없이 열리고 무서리가 내린 노란 국화꽃이 진한 향기를 뿜어 올리면 주암정의 가을은 절정을 이룬다. 긴 겨울 양식 준비에 주암정 뒤편 바위절벽이 닳도록 바쁘게 오르내리는 다람쥐… 늦가을 주암정의 풍경은 넉넉하기만 하다. 금천에 갈대가 하얀 꽃을 피워 눈이 모자라도록 넓게 넓게 물결을 이루면 가을은 한발 한발 물러날 채비를 한다.
금천의 물길이 애초에는 주암을 감싸고 맴돌면서 웅연(熊淵)이라는 소를 이루었는데 어느 해인가 큰 홍수가 지면서 금천의 물길이 변하여 소(熊淵)였던 주암정 주변이 하천부지로 둔갑하여 하루아침에 농지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 위에 있어야 할 주암이 육지로 내몰려 정박하게 되었으니 이를 지켜보는 후손들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당연하였다.
또한 정자를 지은 지가 50년이 지났으니 기와도 낡고 건물이 퇴락하여 그 모습이 처량하여 이를 보는 후손들이 마음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주암 채익하의 10대 종손 채훈식 씨는 퇴락한 주암정을 보수하기로 작정하고 문중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주암정을 중수하기에 이르렀다.
먼저 주암정 주변의 농지를 매입하여 주암정 앞에 쌓인 흙을 파내어 웅연(熊淵)을 복원하고, 주암이 물 위에 떠 있도록 하여 주암 본래의 풍경을 되찾도록 하였고 허물어진 기와를 고치는 등 퇴락한 주암정도 말끔히 보수하였다. 당시 퇴락한 주암정을 보수한 내용이 주암정 중수기에 있다.
舟巖亭重修記 <夫亭子必處勝境者 主人心醉一圓之景槪 以自構自樂 其常例 故也 然追慕先德之躅 以後生所構者 亦不無有也 陶山之漱石亭 則退溪先生後孫 肯構于其遺址 者是之一也 麻城所在 鳳笙亭 則愚伏先生起于 西厓先生遺躅者是之一也 而玆舟巖 亭亦是之一也 山陽錦川之岸 千仞削壁下 有一大舟形巨石 人稱之舟巖 而花朝月夕 煙霞幽邃景觀之 奇能使人嗟嘆也 昔者 舟巖蔡公 深愛此巖 以巖名爲自號 朝夕逍遙 詠懷奇意頗久 不幸夭未至起亭焉 其雲仍恨此 肯構小亭于 先世杖屨之趾 命曰 舟巖亭以表 羹墻之意焉 歲遷半百 風打雨洗屋宇頹落 貌形凄然 以後孫觀之 而難堪心惱者已久 至癸酉之秋 嗣孫勳植敬植忠穆諸氏 擬定重修與諸 後孫商議 鳩財遂起業 修治瓦當補添 壁體去垢楹椽 以刷新塗裝 又次鑿池 以復元熊淵 造景一境 卽美哉奐焉 天造人工相待 以致調和 洞天一區豁然增光 而若在先靈 陟降此亭 步月川邊 必作會心之微笑 則以是爲後孫盡其萬一之責者矣 夫小子不揆 分數以拙文 略述其經緯 而稱訟 後孫諸賢之精誠爾> 丁丑(1997年) 三月 下澣 傍後孫 光植 謹識
주암정 중수기 대저 정자(亭子)가 반드시 승경(勝境)에 자리한 것은 그 주인(主人)이 일원의 경개(景槪)에 심취(心醉)하여 스스로 짓고 스스로 즐긴 것이 상례(常例)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현(先賢)의 유적(遺跡)을 추모하여 후생(後生)이 지은 것 또한 없지 아니하다.
퇴계 선생의 후손들이 그 유지(遺趾)에 지은 도산의 수석정(漱石亭)이 그중에 하나이고, 우복 정경세 선생이 서애 유성룡 선생 유적에 세운 마성에 있는 봉생정(鳳笙亭)도 그 중의 하나이며 이 주암정 또한 그 중의 하나이다.
산양 금천가의 천길 절벽 아래 배(舟) 모양의 큰 바위가 하나 있어 사람들이 주암(舟巖)이라 부르는데 꽃 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 그윽하고 깊은 노을 경관의 뛰어남은 사람을 감탄께 한다.
옛날 주암 채공께서 이 바위를 깊이 사랑하고 바위 이름으로 호를 삼고 아침 저녁으로 소요(逍遙)하며 시를 읊으며 자못 오래도록 마음을 붙이시더니 불행히 조세(早世)하여 정자를 짓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 후손들은 이 점을 애석히 여겨 그 뜻을 받들어 선세(先世)의 유지(遺趾)에 작은 정자를 짓고 주암정이라 이름하여 그 그리움의 뜻을 표(表)하였다.
반백년(半百年)의 세월이 흐르니 바람치고 비에 씻겨 집이 퇴락하니 그 모습이 처량하여 이를 보는 후손들이 마음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지 오래되었다. 계유(1992)년 가을에 이르러 종손 훈식과 경식, 충목, 제씨가 정자를 중수하기로 후손 여러분과 상의하여 모금을 하여 일을 시작하였다. 기와를 손질하고 벽을 바르며 기둥과 석까래의 때를 긁어내고 칠을 세로이하며 나아가 못을 파서 웅연을 복원하고 주변일대를 조경하니 아름다웠다.
자연(自然)과 인공(人工)이 서로 기다려 조화를 이루니 선경(仙境)의 한 골짝이 확연히 빛을 더하였도다. 선령(先靈)이 계신다면 이 정자(亭子)를 오르내리고 달밤에 냇가를 거닐면서 반드시 회심(會心)의 미소를 지으실 것이니 이로써 후손된 책임의 만분의 일이라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도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서투른 글로 그 경위를 간략히 적어 후손 여러분의 정성을 칭송할 따름이다.
방후손 광식은 감가 쓰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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