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톨릭문인회(회장 박방희 안셀모)는 2022년 성지순례로 10월 15일 한티성지와 신나무골성지, 구상문학관을 방문했다.
정태우 아우구스티노 지도신부와 회원 20여명은 한티성지에 들러 교우촌과 순교자들의 묘소를 방문하고 순교자성당 미사에 참례한 후, 신나무골 성지로 이동했다.
신나무골 성지에서 순교자 묘소에 참배한 후 십자가의 길 14처를 돌며 박해를 피해 숨어살던 교우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함께 묵상하고, 마지막 순서로 구상문학관을 찾았다.
구상문학관에서는 여환숙 소화데레사 문화관광해설사가 구상문학관 설립배경과 개요, 구상 시인에 대해 소개했고, 영상자료를 통해 구상 시인의 삶과 문학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태수 아길로 고문이 ‘구상 시인과 대구’의 인연을 간략하게 강의하며 일정을 마무리했다.
구상 시인은 프랑스 문부성 세계 200대 시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1999년과 2000년 노벨문학상 본선에 오르기도 했다. 1953년부터 1974년까지 왜관에 계시면서 부인인 서영옥 여사는 순심의원을 운영했다. 이중섭 화가와 인연이 깊어 그가 왜관에 잠시 머무를 때 그린 ‘구상네 가족’과 주고받은 친필서신 사본은 구상문학관에서 전시돼 있다.
구상문학관은 2002년 전국 1도 1문학관 사업의 일환으로 경상북도에서 첫 번째로 개관한 문학관으로, 700㎡ 규모의 2층 건물이다. 구상 시인이 기증한 2만7천500여권의 도서가 2층 자료실에 소장돼 있으며, 1층 전시관에는 구상 시인의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 사진과 시화, 서신들이 전시돼 있다. 또한 구상 시인의 집필실인 관수재가 있다.
구상 시인은 시를 쓸 때 기어(綺語)의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며,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교묘하게 꾸며 겉과 속이 다른, 진실이 없는 말을 결코 해서는 안되고 참된 말만 해야한다고 말하곤 했다.
다음은 이태수 고문이 ‘구상 시인과 대구’와의 인연을 강의한 내용이다.
구상 시인의 본명은 구상준이며,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다. 1919년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나 1923년 부모를 따라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 어운리로 이주했다. 1942년 북한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1946년 시집 <응향>의 필화사건으로 월남했다. 1947년 서울에 있다가 1950년 6.25전쟁 때 후퇴하는 군부대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1.4후퇴 때 대구에 머무르게 됐다. 이때 종군작가단을 결성해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전시문단을 주도했다. 1950년부터 2년간 국방부 기관지인 승리일보 주간으로 활동했고, 1952년부터 1957년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하며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 시집 <구상>(1951년), <초토의 시>(1956년), 사회평론집 <민주고발>(1953년), 수상집 <첨언부어>(1960년)를 출간했고, 금성화랑무공훈장(1955년), 국민훈장 동백장(1970년)을 수훈하고, 서울시문화상(1957년)을 수상했다. 1953년 북한에서 월남한 이중섭 화가를 왜관에 머물게 하고, 일본 도쿄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가도록 도왔으며, 1955년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이중섭 화가의 작품전이 열리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대구매일신문 상임고문으로 활약하며 1955년 9월 14일 당시 주필 최석채 선생이 쓴 사설로 인해 대구매일신문이 테러를 당하고 주필이 구속되는 필화사건이 일어나 이 사태 수습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74년 서울로 이주한 후 효성여대, 서울대, 서강대, 하와이대, 가톨릭대 등에 출강하며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1985년 ‘상화시인상’ 제정을 주도하고, 2004년 작고할 때까지 중심역할을 했다.
한편, 2007년 구상선생기념사업회가 서울에서 창립돼 선생의 가르침과 문학적 업적을 선양하고 있으며, 2009년 서울시 영등포구와 함께 주관하는 ‘구상문학상’이 제정돼 본상과 신인작가상, 특별상을 수여해왔다. 또 구상 선생 연구논집 발간과 다양한 문학행사를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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