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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칠곡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지천면 향토사료 수집 조사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2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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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는 11월 23일 석담 종손 이병구 박사, 이형수 칠곡문화원장, 연구위원들과 추경호 지천면장이 참여한 가운데 지천면 일대 향토 사료를 조사했다.

이날 경수당, 사양서당, 녹봉정사, 석담종택과 지역민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오인석(五印石), 화가 이쾌대 생가 터에 대해 이병구 박사가 안내했으며, 신리 고인돌과 선돌, 낙화담에 최근 세워진 쌍열비 복사비를 찾아보았다.


경수당(경북 칠곡군 지천면 상지1길 45-1)은 석담 선생이 사시다가 성주로 이거하면서 소유자가 여러 차례 바뀌어 현재는 벽진이씨 후석공 후손들이 살고 있다. 경수당 동쪽을 둘러싼 담양담은 석담이 담양부사로 계실 때 선정을 많이 베풀어 담양군민들이 찾아와 돌담을 쌓아주고 갔다는 아름다운 사연이 전한다. 경수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83호(2011.3.28)로 지정되었다.


1630년경 석담이 성주 월항으로 이거한 후 1634년 성주에서 돌아가시자 1640년 성주 월항면 장산리에 사당을 세웠는데, 철종 때 화재로 사당만 남고 모두 불타고 말았다. 그곳엔 지금도 하마비와 주춧돌 몇 개가 남아 있다. 그 사당을 석담종택으로 옮겨와서 사랑채를 새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담종택은 석담의 큰아드님인 한죽정에게 물려줬고, 석담은 둘째와 셋째 아드님과 매원마을로 이거했다. 둘째 낙촌공은 벼슬로 외부에 나가 있고, 석담이 인조반정 이후 벼슬길에 다시 나가시면서 셋째 아드님에게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라고 감호정사를 맡겼다고 한다.


신4리 마을회관(상지3길 45) 옆에 있는 ‘오인석(五印石)’이라 불리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지석묘)도 살펴보았다. 진주 강씨 다섯 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부친의 환갑잔치 때 다섯 개의 관인을 바위에 올려두고 축하 잔치를 벌였다고 해서 ‘오인석’이라는 불리는 바위로, 먼 옛날부터 자리를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오인석에서 150여 미터 거리에 상지1길과 경부고속철도가 만나는 지점 부근이 예전 오부자들이 살던 넓은 집터다. 서양화가 이쾌대가 그 오부자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자란 곳이다. 지금은 경부고속철 다리발이 높게 서 있고, 인근에 공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집터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자화상은 1940년대에 그려진 이쾌대 작가의 대표작으로,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화가가 붓과 팔레트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 이쾌대 자화상(네이버 캡처)

덕수궁 미술관에서 해금 작가 전시회가 열리던 날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달려간 이병구 박사는 이 작품의 배경이 낙화담이라는 것을 단박 알았다고 한다. 낙화담 근처에서 자화상을 그렸거나, 어릴 때 살던 고향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렸으리라 짐작했다. 이쾌대와 그의 셋째 형님이 6.25때 월북하자 남은 가족들은 살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오부자집은 당시 엄청난 부자였지만 해방 후 흔적도 없이 사라져 구전으로만 전하고 있다. 이 박사는 뛰어난 화가인 이쾌대를 기억하기 위해 생가 터라는 표석이라도 세워 지역민과 후대에 알렸으면 했다.


사양서원은 한강 정구 선생이 칠곡 사수동(현 대구 북구)에 사수정사를 건립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후 평생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다가 1620년 사수정사 지경당에서 돌아가셨는데, 1692년에 불이 나면서 1694년(숙종20) 칠곡군 지천면 상지(지천면 신동서원길 15-10)로 옮겨왔다. 사수정사가 옮겨오면서 사양서원이 됐다. 사양서원은 한강 선생을 주향하고, 석담을 종향하고, 송암 이원경을 별사에 모셨다. 사양서원에는 사당과 강당, 동·서재(폄우제·정완재), 봉하문, 향현청 등이 있었지만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모두 없어지고 강당인 경회당(景晦堂)이 남아 있다. 경회당은 송대의 학자 회암 주희의 학문과 정신을 경모한다는 뜻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1977년 12월 22일 지정됐으며, 이 일대가 지금도 서원마을이라 불리고 있다.

사양서원은 한강이 마지막으로 머무르고 돌아가셨던 곳으로, 한강학이 전파되기 시작한 곳이다. 현재 광주이씨 석담문중이 관리하고 있다. 문화재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야 하지만, 문화재이기 때문에 관리에 한계가 있다. 특히 재래식 화장실과 전기·수도 시설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앞으로 지역문화 콘텐츠와 연계해 활용한다면 큰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견이다.


녹봉정사(지천면 창평로3길 77-60)는 옛날에 있던 녹봉사라는 절을 성주목사 금계 황준량과 덕계 오건이 중심이 되어 개축하여 건립하였다. 당시 낙성식에 퇴계 이황이 참석해 성정당, 시습재, 명선재, 동몽재, 양호루 등의 이름을 짓고 편액을 썼으며, 이후 퇴계사상을 전파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강학지소가 되었다. 녹봉정사는 칠곡군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2009년 4월 6일 인근에서 발생한 산불로 소실되고 터만 남아 있다가 칠곡군 유림을 중심으로 건립비를 거두어 2022년 5월 14일 성정당을 준공하였다. 현재 관물대를 공사 중이다.


녹봉정사에서 퇴계학을 주도적으로 이끈 학자는 한강과 석담이고, 실학의 뿌리는 녹봉정사의 한강으로부터 시작한다. 실학의 계보는 퇴계-한강-석담-미수-성호-다산으로 이어진다. 퇴계학을 이었지만 그와는 다른 독특한 학설이 한강학이다. 이와 함께 여현학은 좀 더 철학적이고 독특한 학문이다. 여현은 근원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고, 한강은 폭넓게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두가지는 차별성을 보이며 낙동강 중류지역의 유학을 이끌었다. 최근 대구를 중심으로 ‘낙중학’이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연구와 학술발표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날 칠곡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들은 칠곡군의 자연부락지명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제정·폐지·유지에 대한 의견이 있을 경우, 유래의 출처를 조사하여 제출하기로 했다. 이날 연구위원들의 협의 결과, 자연부락명은 옛날부터 어른들이 쓰던 동네이름으로 이는 지역의 정체성을 좌우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어야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했다.


석담종택은 지천면 상지(웃갓)에 위치하고 있어 이날 종손 이병구 박사의 초대로 석담 선생의 불천위 사당을 참배하고 사랑채에서 차담을 나누었다. 이 박사는 석담의 16대 종손이다. 칠곡지역 네 군데 불천위가 모두 광주이씨로 석담, 귀암, 박곡, 묵헌이며, 석담 이윤우를 비롯하여 낙촌 이도장, 귀암 이원정, 낙애 이한명이 연이어 한림(예문관검열)에 올라 4대 한림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 박사의 부친이 계실 때는 일 년에 서른번 이상 제사를 지냈지만 지금은 열다섯 번으로 줄었는데, 불천위와 4대 봉사, 명절 제사까지 열세 번과 다른 절기의 차사는 없애고 정월대보름과 동지에 제사를 지낸다.


사당인 석담사(石潭祠)에는 불천위와 4대조의 위패를 모신 감실과 제상이 있다. 이날 석담의 위패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위패에는 대나무를 깎아서 한획한획 정성들여 쓴 76자의 속칭(몇 대조와 관직명)이 한 줄로 쓰여있다. 제사를 자시(새벽1시)에 지내오다가 기일 초저녁으로 변경해 지내는데, 이는 멀리서 오거나 다음날 출근하는 젊은 사람들을 위해 결정했다고 한다. 한때 손님이 줄어 5~60명이 참석했지만, 올해는 80명 가까이 왔고, 예전 불천위 제사 때는 보통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멀리서 오는 분은 이틀 전에 오셔서 다음날 제사를 지내고 보통 일주일씩 묵고 가셨다. 이 박사의 조부가 돌아가신 후 자시 제사를 지낼 때는 국수를 올렸다고 한다. 옛날에 불천위 제사를 지내면 아침부터 하루 종일 국수를 밀었는데 저녁 제사를 지내고부터는 밥을 올린다고 한다.

이병구 박사는 “제사를 올리는 순서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굉장히 쉬운데 어렵게 생각하면 헷갈립니다. 아내는 제사 만큼 쉬운 일이 없다고 해요. 손님을 대접하려면 여러 음식을 장만해야 하는데 제사음식은 레시피가 정해져 있으니 그대로 따라하면 되고, 손님이 많으면 더 만들면 되고, 적으면 그에 맞춰 적게 하면 된답니다.”라고 했다.


석담종택에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흥학비는 담양향교에 있는 비의 탁본을 떠서 세운 것으로, 옆에 뜻을 풀어 한글로 적은 비도 함께 있다. 석담이 담양부사로 재직하며 제자를 양성하고 향교, 서원도 새로 지으면서 학문을 권장하자 담양유림에서 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 비를 담양까지 가서 찾아보기는 어려워 종택에 세웠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가에 지천면 고인돌과 선돌에 들렀다. 선돌에 얽힌 전설을 김윤오 전 칠곡문화원장이 소개했다. 웃갓마을이 배의 형상이라 행주형 마을이라고 하는데 신동입석은 배의 돗대의 형상이다. 옛날 굉장한 부잣집이었는데 신동입석이 있는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손님을 초대하여 잔치를 자주 베풀었다고 한다. 집에서 정자까지 거리는 멀고 음식을 하는 안사람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나는 스님에게 시주를 하면서 손님이 좀 적게 오도록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러자 스님이 입석이 있는 곳으로 가서 짚나래끼(짚낱가리)로 탁 치니까 제일 윗동가리(윗부분)가 500미터 가량 떨어진 밭둑으로 휙 날아와 떨어졌고, 두 번째로 탁 치니까 입석 바로 옆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 부잣집이 망했다고 한다.

지천면이 2021년에 고인돌과 선돌에 대한 안내판을 설치했다. 안내판에는 이곳 고인돌(지석묘)은 선사(청동기)시대 무덤으로, 지천면에는 신4리 경로당 뒤쪽 등 여러 곳에 고인돌이 분포해 있다. 선돌은 500m 동쪽 강점덤(심천로5-7)에 있는 신동입석(돛대바위)이 부러져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근세에 선돌이 기울어 훼손되자 웃갓 청년들에게 우환이 생겨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선돌을 바로 세우자 이후 마을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강점덤에 있는 신동입석은 예전에 복원했는데 가운데 부분에 시멘트를 발라 연결했다고 한다.


마지막 일정으로 웃갓 입구에 있는 쌍열비 복사비를 찾았다. 쌍열비는 임진왜란 때 권관 이심옥의 부인 현풍 곽씨와 딸인 곽재기의 부인 광주이씨 모녀의 순절이 조정에 알려져 왕명(순조20)으로 정려하여 두 여인의 열행을 함께 기리는 뜻으로 세운 비석이다. 처음 웃갓에 세웠으나 후손들이 심천으로 옮겨 쌍열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2022년 6월 22일 그 복사비를 지천면민(지천면지편찬위원회, 후원회)이 낙화담 유래비 옆에 설치하여 숭고한 절의와 낙화담의 유래를 알리고 있다. 지천면은 웃갓이라는 뜻의 상지(上枝)에 ‘지(枝)’와 이언천의 ‘천(川)’이 합쳐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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