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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칡소(사진 경상북도 울릉군 농업기술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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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 칡소(3)
이경애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울릉)
Ⅴ. 한국 근대사 속의 소
조선 후기 시장경제의 발전은 소 관련 대외 무역의 활성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러시아가 극동지역 확보를 위해 연해주로 진출하면서, 국경을 접하게 된 조선의 함경도 지역민들이 러시아와 경제적으로 교류하게 되었다. 조선과 러시아가 정식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1884년이지만, 국경지대에 거주하던 함경도 지역민들은 그 전부터 국경을 넘어 연해주의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함경도는 산지로 이루어졌고 기후가 한랭하며 토질이 척박하고 인구도 희박하여 쌀이나 면화 등의 중요 작물을 재배할 수 없어 쌀 대신 보리, 조, 콩 등을 소규모로 경작하고 농가에서 소를 많이 사육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했다. 그래서 그들이 러시아와의 교섭에서 가장 활발하게 수출했던 무역품도 생우(生牛)였다.
1870년대부터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나가사키와 상하이를 잇는 전신이 설치되고,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등 도시가 점점 성장하면서, 조선 생우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당시 러시아 상인들의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조선의 가축 상인들은 1880년 매월 250~300마리의 소를 교역 장소에 몰고 나왔으며, 매년 수천 마리의 소가 연해주로 반입되었다. 개항 이전까지 정부 차원에서 우금령을 통해 농우의 수량에 초점을 맞추어 시행하던 정책은 개항 이후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외교관계와 사회 경제의 변화로 정부에서 소의 소비나 수출을 마냥 억제하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소의 품종 개량에서부터 우역을 예방하기 위한 위생 문제, 외국으로 수출될 때 소의 검역 문제 등 다양한 분야의 축산업을 다루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부의 대응은 소를 상품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함이며, 한편으로는 소의 소비와 수출을 새로운 국가 재정 수입원으로 삼고 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이를 위한 구체적 실천을 위해 고종은 일본에 수신사,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해서 선진 문물을 배워 오도록 했는데, 특히 소와 관련해서는 미국으로부터 각종 농작물의 종자와 종축을 들여와 근대적인 낙농업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러시아는 조선소를 식용으로 소비했지만, 일본은 식용뿐 아니라 자국 소의 개량과 번식을 위해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소의 체격뿐 아니라 품성도 고려했다. 조선우는 온순하고 영리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일본의 목적에 적합한 것이었다.
일본 축산 전문가는 “어느 나라에서든 황소는 공격적인 동물인데, 조선우는 황소조차도 사나운 습성이 결여되어, 여러 마리가 모여 있어도 소요나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며, 고삐를 끌지 않아도 순순히 따라오고 명령에 복종한다.”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또한 큰 체격에 체질도 강건하며 힘이 세고 질병에도 잘 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더위나 추위, 비바람에 강했다. 거친 사료도 잘 흡수해서 사육하는 비용이 적게 들며 수태하는 힘이 왕성한 것도 큰 장점이었다.
일제시기 일본으로 건너간 소들은 통칭 ‘이출우(移出牛)’라 하였다. 여기서 ‘이출’은 한 나라 안에서 다른 지역으로 물자가 옮겨지는 것을 말하며, 이는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이 일본의 한 지방으로 간주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해마다 펴낸 조선가축위생통계(朝鮮家畜衛生統計)에 따르면 1909년 이후 1942년에 이르는 기간 147만여 마리가 이출 되었으며, 그 가운데 부산항을 통해 약 100만 마리가 이출 되었다.
당시 일제는 조선우의 이출 과정에서 우역의 발생과 전파를 방지하기 위해 각종 법제와 기구를 설치하였다. 1909년 법률 제21호 「수출우검역법(輸出牛檢疫法)」과 칙령 제 65호 「수출우검역소관제(輸出牛檢疫所官制)」가 제정·공포되었다. 이에 경상남도 동래부(東萊府) 용주면(龍珠面) 우암동(牛巖洞: 현재의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에 수출우검역소가 설치되어 우역, 탄저, 유행성아구창(流行性鵝口瘡: 구제역)에 대한 검역이 이루어졌다.
일제는 효율적인 조선소의 증식과 이출을 위해 1938년 심사 표준을 제정하였다. 심사 표준은 총독부의 축산과에서 결정하고 이를 각 도(道)에 통첩하였는데, 자질(資質), 일반체형(一般體刑), 성우(成牛)의 주요부위표준척등(主要部位標準尺等)을 각도별로 심사 결정하고 이를 증산의 표준 및 품종 개량의 기초가 되도록 하였다. 특히 자질 부분에서 피부가 탄탄하며 털이 적갈색인 것을 기준으로 설정 함에 따라 모색 기준으로 갈색 외의 다양한 모색의 조선 소는 점차 도태 되어갔다.
실제 1912년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에서 경북 각 지방의 소 2,744마리에 대한 모색(毛色)을 통해 분류한 보고 내용을 보면, 지금의 누렁이 한우로 보이는 적갈색 털을 가진 소가 2,135마리(77.8%), 흑갈색 소가 284마리(10.3%), 흑색소 241마리(8.8%), 호랑이 무늬 소 71마리(2.6%), 기타 13마리(0.5%)로 기록되어 있다. 자료에서 흑갈색 소는 몸은 대체로 검고 등선을 따라 갈색 털이 보이는 지금의 ‘내륙형 흑우’라고 불리는 재래 소와 유사하고, 온몸이 검은 흑색 소는 ‘제주형 흑우’ 호랑이 무늬 소는 ‘칡소’로 보인다.
일제의 심사 표준은 광복 후 1964년 농림부가 고시한 ‘종축 및 후보 종축 심사 기준’과 1970년 한국종축개량협회가 한우 등록을 위해 정한 ‘한우 심사 표준’의 바탕이 되었다. 이로써 다양한 모색을 가지고 있던 조선의 소는 일제의 획일적인 품종 개량 방침과 광복 후 이에 대한 답습으로 인해 누렁이 외의 재래 소는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갔다. 반면 일본으로 반출된 한우는 일부 지역에서 일본 재래종인 화우보다 많이 사육되었고, 한우의 유전적 소질을 간파한 육종 학자에 의해 일본의 품종으로 개발되었다.
근대 일제강점기에 우리 소는 일본의 소고기 증가에 따른 공급부족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일본으로 대거 이출 되었고, 일제강점기 동안 사역용과 식용으로 약 160만 두가 일본으로 이출 되었는데, 조선총독부는 우역정책을 통해 조선우 수출을 통제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일본 본국의 소비 제품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조선의 우역이 본국에 전파되지 않도록 하였다.
우리 역사상에서 상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소가 사육되었고 농업, 이동 수단, 식용, 판매 상품 등 여러 방향으로 활용된 사례들이 확인된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우 수탈로 한반도의 소 자원은 급속히 감소되어 갔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미군정은 무절제한 소의 도축을 방지하고자 군정 법령 제140호, 「축우도살제한(畜牛屠殺制限)에 관(關)한 건(件)」(1947.6.9.)을 공포, 10살 미만의 축우와 임신우의 도살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또한 군정청 농무부는 한우 증식을 통한 농경우의 확보를 위해 조선농회로 하여금 암소 50두당 수소 1두씩 배치토록 하였으며 강원도 명주군에 1천 정보의 임야를 확보, 종우 생산사업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한우의 사육두수가 다시 급격하게 줄어들게 됨에 따라 1954년 정부는 오늘날의 「축산법」의 모체가 되는 법률 제306호 「가축보호법」을 제정하여 우적등록과 도살의 제한을 더욱 강조하였다. 이어 1963년에 「축산법」이 제정되고, 1964년 농림부고시 제865호 「종축 및 후보종축 심사기준」이 공포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국무회의 안건 기안문 등에서 우리나라의 소를 한우라 칭하는 사례가 있었으나 이 고시의 공포를 기점으로 한우는 정부의 제도적 차원으로 지정된 공식 용어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한우의 심사 기준이 마련되었는데, 여기서 종축은 우량품종을 말하며 그 기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축산법시행규칙 제5조의 규정에 의하여 종축 및 후보종축검사기준을 다음과 같이 정한다. 1964년 2월 18일 농림부장관 원용석
종축 및 후보종축검사기준
연령 : 종모축은 18개월 이상, 후보종모축은 6개월 이상 (타 개체인 육우와 젖소도 종모축은 18개월 이상, 후보종모축은 6개월 이상으로 동일) 혈통과 체형 : 혈통이 확실하고 표준체형을 갖추어야 한다. 합격점 : 총점 100점에서 종모축은 77점 이상, 후보종모축은 70점 이상 (타 개체인 육우도 종모축은 77점 이상, 후보종모축은 70점 이상을 동일하며, 젖소의 경우 종모축은 76점 이상, 후보종모축은 74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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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우종모우 및 종빈우 최저한의 척도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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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 종모우 및 종빈우의 최저한의 척도 표를 보면, 수컷이 대체로 암컷보다 몸집이 크고 우리나라 남부지방 소들의 몸집이 비교적 작았음이 확인된다. 또한 종축의 심사를 위한 채점을 부위별로 세분화하여 진행했으며, 피부와 체형, 다리 부문이 각각 13점, 20점, 14점으로 매우 높게 배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심사기준에 대한 서술이 비교적 불분명해서 심사자의 주관에 의거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우리나라는 일찍이 소가 사육되었고, 우리 역사상에 꾸준히 등장했다. 전근대 시기에는 주로 이동 수단이나 농업생산력 발전에 소가 기여했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농업을 최우선함에 따라 소의 도축을 제한했다. 19세기에는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소고기를 소비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러시아와 일본에 생우가 수출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우리 소의 우수성을 간파하고 대거 일본으로 이출해 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우라는 용어는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상품적 가치를 함의하는 것으로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한우는 그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때부터 단순히 ‘한국의 소’가 아니라 일정한 기준과 심사를 통해 엄선된 ‘한국 우수품종의 소’로 자리 잡아 나가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국민 생활 수준의 향상과 그에 따른 쇠고기 수요의 증대에 따라 한우는 지속적인 개량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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