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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현상학, '엄밀학으로서의 철학'5
이재성(계명대) 4편에 이어
21. 환원이라는 방법에 따르면 세계의 존재는 ‘괄호 안’에 넣어야 한다. 현상학의 주제는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 관한 인식이 생겨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은 한마디로 현상 (나타난 것=의식에 주어지는 것=사실)에 관한 학문이다. 심리학은 심리 현상을, 물리학은 물리 현상을, 역사학은 역사 현상을 다루듯이, 다른 학문들도 현상과 관계한다.
그러나 현상학은 그런 학문들의 소박한 존재 믿음의 태도(자연적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반성적 태도로써 현상과 관계한다. 즉 현상학은 세계 및 세계 속의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존재믿음을 중지하고(=에포케) 무전제에서 출발하며, 모든 대상을 의식에 나타난 현상으로서 취급한다.
다시 말하면 현상학은 모든 선입견(편견)을 버리고 의식에 명증적으로 주어지는 현상 그 자체(사실 그 자체 특히 본질)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다. 현상학에서 현상이란 의식과 동떨어져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의식과 관계된 그리고 의식에 나타난 현상을 의미한다.
반대로 의식은 현상을 존재하게 하는 생산적 주관이기도 하다. 의미를 부여하는 자아가 없으면 세계도 없다. 순수의식은 모든 존재의 궁극적 가능 근거이며 그런 의미에서 절대적 주관이다. 자아 없이는 세계도 없지만 반대로 자아와 세계와 불가분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자아는 언제나 어떤 대상을 지향하고 있다. 자아에는 육체의 변화에 의해 영향 받고 기분과 상태가 바뀌는 경험적 자아가 있는 반면에 경험적 자아의 배후에서 어떤 육체적 변화나 시공간적 변화 그리고 외부적 인과 관계에도 영향 받지 않는 불변의 자아가 있다. 바로 이런 불변의 자아가 순수자아이고 선험적 자아이다.
경험적 자아가 개인적 개성에 의해 착색되어 있으나 순수자아는 개성적 색채가 제거되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자아이다. 순수자아는 자체적으로 완결되어 그 속으로 아무 것도 들어갈 수 없고 그 속에서 어떤 것도 빠져 나갈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이며 어떤 시․공적 연관 속에 놓일 수 없으며 어떤 사물에 의해서도 인관 관계적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순수의식은 대상을 향해 지속적으로 지향성을 쏘아 보내는 공허한 극점, 또는 작용의 중심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순수의식이 어떤 인과관계에도 영향 받지 않는 본연적 자아라는 점에서 불교의 진아(眞我)와도 비교될 수 있다.
22, 일상적 삶에서 우리는 세계의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계명대 캠퍼스 속의 한 나무가 존재하며 그것이 갈색임을 믿는다. 내가 집으로 돌아와서 그 나무가 내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도 아까 본 그 나무가 아직도 캠퍼스 안에 있다고 믿는다. 나아가서 내가 가보지 못한 독일이 있고 지구 덩어리가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자연적 태도이며 이런 태도는 모든 과학에도 전제되어 있다.
이제 이런 자연적 태도를 배제하고 태도를 철저히 변경함으로써 즉, 판단중지(에포케)함으로써 순수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판단중지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도 유사한 보편적 회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즉, 나무가 갈색이라거나 나무가 존재한다는 것을 회의하고 나무에 대한 판단 즉 의식 작용을 배제하는 것이고 대상을 괄호 치는 것이다.
현상학적 판단중지는 나에게 존재하는 것으로 주어진 세계를 단순히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회의를 통해 요지부동으로 명증적으로 진리인 것만을 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판단중지에서는 사실로서의 세계가 배제되고 본질로서의 세계가 남게 된다. 판단중지에서 자연과 정신영역, 모든 학문과 신 존재 그리고 논리학, 기하학, 산술학 같은 본질학도 괄호 쳐지지만 순수자아의 작용과 순수자아에 의해 직관된 본질은 그런 괄호침을 당하지 않는다.
23.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대상세계의 존재를 잠정적으로나마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반면에 현상학적 환원은 대상세계의 존재를 조금도 부정하지 않으며 존재는 존재하는 그대로 괄호 속에 묶어둔다. 그리고 단지 대상세계에 관해 갖고 있는 우리의 주관적 신념만이 부정된다. 자연적 태도에서 오직 외부대상으로만 향하던 우리의 시선이 판단중지를 통해 의식내부로 돌려질 수 있게 된다.
즉, 판단중지를 통해 물질세계와 심리적 생명적 세계가 괄호 쳐지면 절대적 의식의 영역이 잔여로서 남게 된다. 이때 순수의식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선험적 환원이다. 이런 선험적 환원에 의해 실재는 의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험주관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파악되게 된다.
본질 역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의식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으로 끌어 들여져서 의식에 의해 구성, 직관된 것으로 취급된다(의식내재화). 자기인식이 모든 진정한 인식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에 이러한 초월적 환원이 필요하다. 이 환원은 자기인식에서 출발하여 세계인식에 도달하는 데에 그 철학적 의의를 갖는다.
24. 나무, 책상, 네모 등 모든 개별적 사실들이 본질을 소유하듯이 의식작용(사고, 의지, 감정)도 본질을 소유한다. 현상에는 구체적 개체적 현상과 본질로서의 현상이 있듯이 직관에도 개체에 대한 직관과 더불어 본질직관도 있다. 본질직관을 통해 의식의 본질도 직관된다. 본질직관은 본질에 대한(우회적 계산이나 추리 증명과정이 생략된) 직접적인 파악이다.
그러나 굳이 그 절차를 말한다면 이런 빨강, 저런 빨강을 떠올리며 빨강에 대해 상상 속에서 자유 변경하여 그 가운데 불변적으로 남는 빨강의 본질을 포착하는 것이다. 의식의 본질은 지향성으로 드러난다. 의식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초월적 환원을 거친 뒤에 본질직관을 하는 길도 있고, 먼저 본질직관을 한 뒤에 초월적 환원을 하는 길도 있다.
25. 앞서 본 바와 같이 환원의 첫째 단계는 주어진 모든 것을 의식 속에서 의식으로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현상으로 바꾸는 ‘현상학적 환원’이다. 후설이 직관을 중시한 까닭은 직관이 어떤 것을 물리적 현존에서 직접 파악하는 행위이고 따라서 다른 모든 것의 토대가 되는 일차적으로 주어진 행위이기 때문이다.
둘째 단계는 ‘형상적 환원’이다. 의식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다양한 의식 행위의 본질, 즉 보편적·불변적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형상적 환원을 통해 우리는 사실적인 모든 것을 넘어 본질을 파악한다. 그리고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이 본질직관이다. 본질직관은 신비한 직관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다수의 변형태로 만들어보면서 이 변형 속에서도 불변하는 본질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학적 환원과 형상적 환원은 아직 심리학 영역에 머물러 있다.
환원의 마지막 완성 단계는 ‘초월적 환원transzendentale Reduktion’이다. 초월적 환원은 초월적 의식의 성과를 반전하는 것이다. 이 의식에서 일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사건은 시간지각이다. 후설에 따르면 현상학을 한다는 것은 모든 의미를 구성하는 기초인 선험적 자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후설은 죽을 때까지 초월적 환원을 명료하게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 뒤 초월적 환원에 관한 이론이 전개되면서 현상학 운동은 갈라져, 이 방법을 거부하는 학파가 형성되었다.
6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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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성 계명대(철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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