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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존재(存在) 철학에서 생성(生成) 철학으로5
이재성(계명대)
25. 이에 반해 니체에게 지상의 무상함과 고난의 극복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야 한다. 이것은 힘에의 의지 자체를 극도로 강화함으로써만 일어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 철학은 인간을 피안과 미래라는 환상을 통해서 위로하고 달래는 값싼 위로의 철학이 아니라, 인간을 오히려 위험에 직면시키면서도 그를 훈련시키고자 하는 해머의 철학이고자 했던 것이다.
“철학자들은 창조적인 손으로 미래를 붙잡는다. 이 때 존재하는 것, 존재했던 것,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는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며 해머가 된다. 그들의 ‘인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다.”(『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Vorspiel einer Philosophie der Zukunft』)
26. 이제 힘에의 의지만 가치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힘에의 의지를 강화시키는 것만이 가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것은 무가치한 것이다. 힘은 자신의 고양만을 목표로 하고 그것 외의 어느 것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에 힘은 자신 이외에 아무것도 가치 있고 귀중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새로운 가치정립의 원리인 힘에의 의지가 존재자 전체의 외부에, 즉 피안 내지 초감성적 차원에 어떠한 다른 목표도 용인하지 않는 이유가 존재한다. 힘에의 의지는 새로운 가치정립의 원리이다. “생 자체가 힘에의 의지라고 할 경우, 힘의 등급 외에 가치를 갖는 것은 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힘에의 의지』)
예컨대 목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정의사회 구현과 같은 것)은 힘에의 의지에 의해 정립된 목적들로서 항상 힘에의 의지의 수단일 뿐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다른 목적들에 의해서 대체될 수도 있다.
힘에의 의지의 목적은 자신의 무조건적인 강화일 뿐이며, 힘 자체가 그리고 오직 힘 자체만이 정의가 무엇이고 무엇이 정당화될 수 있고 정당화될 수 없는지를 확정한다,
“모든 사건, 모든 운동, 모든 생성은 위계와 힘의 관계의 확정으로서 하나의 투쟁이다.”(『힘에의 의지』) 이러한 투쟁에서 굴복한 자는 굴복했기 때문에 부당하며 참되지 않다. 투쟁에서 승리한 자는 승리했기 때문에 정당하며 참되다.
27. 힘에의 의지는 그 자체에 있어서 보다 큰 힘을 노리는 것이며, 이렇게 노린다는 것은 힘에의 의지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예리하게 투시하는 성격, 즉 원근법적으로 전망하는 서역을 갖는다. “원근법적인 성격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힘의 중심이 그 자체로부터 전 세계를 구성하는 것, 즉 전 세계를 자신의 힘에 비추어 측정하고 감지하며 형성하는 것이다.”(『힘에의 의지』)
힘에의 의지는 자신의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하고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예리하게 통찰하면서, 자신의 유지와 고양을 위한 수단으로서 가치를 정립하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가 갖는 전망하고 투시하는 성격을 니체는 ‘원근법적’이라고 부른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에게 의지는 맹목적이지만 니체에게 의지는 분명한 목표 의식을 갖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스스로 수단을 정립하는 존재다.
사람들이 가치를 자신의 유지와 고양이란 관점에서 스스로 정립하지 않고 가치를 그 자체로 영원히 존립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에서 생의 모든 지침을 얻으려고 할 때 그는 삶의 유지와 고양에 필요한 예리함과 통찰력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몰락하고 말 것이다. 이제 니체에게 가치는 힘에의 의지가 자기 유지와 고양을 위해서 그때그때 정립한 조건이 된다.
28. 기존의 최고의 가치들이 무가치해지는 중간 상태를 적극적으로 인수하면서 진정으로 인간을 성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치정립의 원리를 추구하는 허무주의를 니체는 ‘능동적 허무주의’(Der aktive Nihilismus)라 부른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모든 가치의 전환을 목표로 한다. 모든 가치의 전환은 기존의 가치들 대신에 새로운 가치들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들의 본질에 대한 규정이 변화된다는 것, 즉 가치정립의 원리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형이상학적인, 종교적인 가치정립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의미한다. 새로운 가치정립은 지상의 모든 존재자의 본래의 성격인 힘에의 의지를 억압하고 경멸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철저히 긍정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29. 니체는 힘에의 의지 철학에 입각해서 선악의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새롭게 제시한다. 선은 그 자체로서 선한 것이 아니고 악은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이 아니다. 힘에의 의지를 강화시키는 것만이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다.
“선이란 무엇인가?-그것은 힘의 감정을, 힘에의 의지를, 힘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을 말한다. 만족이 아니라 보다 더 많은 힘, 평화가 아니라 전쟁, 덕이 아니라 유능함(르네상스식의 덕, 도덕에 속박되지 않은 덕). 약자와 불구자들은 몰락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주창하는 인간애의 첫 번째 명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몰락하는 사람들이 몰락하도록 도와야 한다. 어떤 악덕보다도 더 해로운 것은 무엇인가?-모든 약자와 불구자에 대해 동정을 갖는 것,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안티크리스트Antichrist』)
30. 이처럼 니체가 지향하는 것은 의지의 소멸과 투쟁하는 의지를 긍정하는 것이자, 무에의 의지와 투쟁하는 ‘존재=생성’에의 의지를 긍정하는 것이며, 초월에의 의지와 투쟁하는 창조에의 의지를 긍정하는 것이다.
창조행위는 초월적 동일자가 아니라 의지적 생성을 긍정하는 것이며, 무가 아닌 새로운 생성을 긍정하는 것이며, 의지의 소멸이 아닌 의지의 확장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긍정이란 삶의 형식을 창조하는 힘, 즉 ‘조형력’을 긍정하는 것이다. 형식을 창조하는 힘은 곧 해석하는 힘이다.
니체에게 해석은 세계를 특정 관점에서 보는 인식론적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를 특정한 해석 주체로 내세우는 행위이다. 한 인간의 관점은 곧 그의 존재인 것이다. 나아가 해석이란 힘에의 의지에 입각해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삶이 방식 그 자체이다. 산다는 것은 곧 힘에의 의지의 활동이며, 이것은 ‘관점을 세우는 힘’으로서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6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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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성 계명대(철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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