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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존재(存在) 철학에서 생성(生成) 철학으로4
이재성(계명대)
19. 인간이 독립적이고 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허구적인 타자에 대한 의존 상태에서 일단 벗어나야 한다. 인간이 신을 살해한 이유도 인간이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즉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자신 이외의 타자에 대한 유아적인 의존상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성인이 되기 위해서 신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근대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피안을 공산사회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보장되는 유토피아(utopia)로 대체하는 식으로 과거의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가치 정립을 세속적인 형태로 반복함으로써 허무주의 상황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대적 상황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것이다.
자신의 시대적 상황을 통찰한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형이상학적인 초감성적 세계는 하나의 가상이며, 우리가 인정할 것은 생성 변화하는 지상의 세계뿐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허무주의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20. 허무주의 극복의 길이 피안이나 미래 등의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내부에 있다. 허무주의 극복은 인간의 자기 강화, 인격의 강화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자신의 내적인 힘을 강화해야만 허무주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러한 내적 힘이 약할 때 인간은 항상 피안 세계나 미래의 이상 세계 등의 신기루를 만들고 거기서 구원을 찾으려 한다.
이 현실의 무상함과 고통을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환상들이 아니고, 그러한 무상함과 고통을 긍정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자신을 강화하고 자신의 힘을 즐길 수 있는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이다. 니체는 이러한 정신력을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 불렀다. 니체에게 존재하는 유일한 현실은 힘에의 의지다.
21.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네로나 칼리굴라와 같은 자의적인 횡포에의 의지가 아니다. 네로와 칼리굴라와 같은 자는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는 자들로 오히려 자신의 자의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적들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자들이며, 그들의 전제적인 횡포는 이러한 공포에 대한 과잉방어에 불과하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지배는 자신에 대한 지배에 기초한다.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을 지배할 수 있다.
힘에의 의지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고양하는 것, 즉 자신을 보다 높은 단계로 올리고 자신에게 보다 큰 폭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적으로 ‘자기 극복’이 힘에의 의지의 본질이다.
22. 힘에의 의지는 존재자들이 아직 힘을 가지지 않았으나 힘을 가지려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힘은 힘이 보다 강력해지는 것을 통해서만 힘으로서의 자격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생(生), 즉 ‘생성’(Werden)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생성은 힘에의 의지의 자기 초월 운동을 뜻한다. 생은 니체에게는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생과 달리 한갓 ‘생존을 위한 투쟁’, 즉 자기 유지의 추구가 아니라 자기 고양의 운동이다. 자기 유지는 자신의 초극과 성장을 위한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성장인 것이다.
23. 인간이 자신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다면 인간들은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 적당히 타협할 것이다. 인간의 기본 관심사를 생존으로 보면서 국가와 법의 기원을 찾는 정치사상이 사회계약설(Contrat Social)이다.
사회계약이 절대군주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하는 홉스식의 형태로 나타나든 아니면 사회구성원들이 민주적으로 함께 정치를 운영하는 로크식으로 나타나든 사회계약설은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가 생존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사가 각자의 생존보장에 있다면 사람들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을 것이며 그와 아울러 전쟁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생존보다는 자신의 위신과 자부심의 증대, 즉 자신의 힘의 증대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인간은 어떤 다른 목적, 자신의 생존이나 도덕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 자신의 힘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의 고양 자체를 위해서 자신을 고양하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것보다는 자신의 힘이 고양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을 더욱 중시한다.
인간의 관심이 이렇게 힘의 고양에 있는 한 인간에게는 전쟁은 불가피하다. “다윈적인 생물학의 의미에서 ‘유용한 것’-즉 다른 것들과의 싸움에서 이로운 것으로 드러난 것. 그러나 내게는 싸움에서의 이익보다는 자신이 보다 고양되었고 보다 강하게 되었다는 느낌이 본래의 진보로 보인다. 이러한 느낌으로부터 투쟁을 위한 의지가 생겨난다.”(『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24. 모든 전통 형이상학이나 종교가 내세우는 피안은 이러한 힘에의 의지가 약화된 상태에서 위조한 것이며, 그러한 가치들은 다시 이러한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이 약할 때 자신의 현실을 스스로 개척할 의욕을 갖지 못하고 신이나 피안이라는 신기루를 만들고 그것이 자신의 현실적인 고통을 해결해주기를 기대하며 이를 통해 자신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진정한 힘에의 의지는 자기 강화와 자기 극복에의 의지이며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하는 의지이다.
진정하게 강한 힘에의 의지는 지상으로부터의 도피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 지상 자체에서 자신의 구원을 획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상 안에서의 구원은 인간 이성의 무한한 힘을 신봉하는 자들인 마르크스 등의 계몽주의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건설 등의 목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모든 시도는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을 먼 미래의 유토피아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니체에 의하면 초감성적인 피안적 차원을 먼 미래로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전통 형이상학적인 사고방식에 구속되어 있다.
여기서는 지상적인 것에 대한 천상적인 것의 지배 대신에 현재에 대한 미래의 지배가 들어선다. 그리고 전통 형이상학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피안을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을 지배했으나, 이제는 미래의 이념을 대변한다는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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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성 계명대(철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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