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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혁명적 변혁으로서의 철학 2
이재성(계명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단순히 생산수단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외형적 차이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양자는 생활하는 모습, 인간관, 세계관이 모두 다르다.
인간의 중심에 ‘인간 그 자체’, 즉 보편적인 인간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신분으로 태어났는가와 어떠한 사회적 입장을 취하는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어른인가 아이인가 등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러한 전통적 인간관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개별성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는가?’가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누구인가?’는 ‘존재하는 것’에 무게중심이 있다면 ‘어떤 일을 하는가?’는 ‘행동하는 것’에 무게중심이 있다.
‘존재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 속에 그저 멈춰 있는 것으로, 자연적이고 사물적인 존재라는 입장에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타락하는 길, 짐승이 되는 길’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상을 헤겔(Hegel)로부터 배웠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도약해서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헤겔의 인간학을 거칠게 표현한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헤겔의 인간 이해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실존주의를 거쳐 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유럽 사상을 관통하고 있다)
보편적인 인간성이라는 것은 없다. 만일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의 사회관계에서 ‘현재 상태의 긍정’, 즉 ‘존재하는 것, 행동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은 행동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그 창조물이 그것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생산관계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을 매개로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깨닫는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인간관이다.
동물은 단순히 직접적이고 육체적인 욕구에 지배되어 생산하지만, 인간은 먹거나 마시거나 잠을 자는 직접적인 생리 욕구를 넘어서 사냥하고 채집하고 재배하고 교역하고 산업을 일으키고 계급을 만들고 국가를 세웠다. 인간이 동물로서만 살아가려고 했다면 불필요한 일이었다.
인간이 이런 일들을 했던 이유는 ‘만들어진 것’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창조한 세계 속에서 자기를 직관한다.’(『경제학‧철학 수고』) 인류의 역사는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하는 그때그때의 생산관계에 대한 계급투쟁을 통해서 새로운 생산관계를 수립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인류 자신의 본질적인 능력, 즉 생산력을 발전시켜온 역사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물질적인 생산이 실제로 역사가 진행되는 ‘하부구조’이며 종교, 철학, 정치, 법률, 윤리 등은 이러한 하부구조에 의해서 규정되는 ‘상부구조’에 불과하다.
정치와 정신문화는 특정 사회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을 보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어느 시대에나 지배계급의 관념이 지배적인 관념이다. 즉 사회의 물질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이 그 사회의 지적인 힘도 지배한다.
물질적 생산수단의 처분권을 가지고 있는 계급이 정신적 생산수단도 통제한다. (…) 지배적인 관념들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의 이념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독일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사회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대부분이 그 경제체제에서 나온 가치판단을 믿는 사회다. 예컨대, 일을 안 하는 사람은 사실상 가치가 없고,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고, 더 많이 소유하면 그만큼 더 행복해지고, 가치 있는 물건이나 사람은 항상 돈을 벌어온다고 믿는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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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성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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