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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무용宮中舞踊 무고舞鼓 영해에서 만들어지다(4)/이영근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6년 07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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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무용宮中舞踊 무고舞鼓 영해에서 만들어지다(4)

이영근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영덕)


Ⅵ. 『악학궤범』의 무고

3. 고종조 『정재무도홀기』의 무고

 진연이나 진찬 등 큰 잔치를 열기 위해서는 이를 준비하는 기관인 진연도감(進宴都監, 進宴廳)이 임시 관아로 개설된다. 진연청에서는 잔치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절차에 맞추어 순서대로 준비하고 잔치 후 모든 마무리까지 책임진다. 

 옛 기록을 준거로 예식으로서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 또한 중요한 임무이며, 『진연도첩(進宴圖帖)』이나 《진연도병(進宴圖屛)》, 『진연의궤(進宴儀軌)』를 제작하는 것도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인데, 진연도첩은 진연의 의식절차를 기록하고 그림으로 그려 만든 책이고 도병은 병풍에 그린 것이다. 『진연의궤』는 잔치의 모든 절차와 전말을 기록한 책으로, 현재 16종이 전해지고 있다. 

 『정재무도홀기』란 각 진연에 참여하는 정재의 종목과 순서를 기록하여 무용에 참여하는 관계자가 참고하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무도홀기』는 국립국악원의 고종조 계사년(1893)본이 있으며, 정신문화연구원에 있는 장서각(藏書閣)본은 대략 신축년(1901)의 것으로 영인본이 출간되었다. 『고종신축진연의궤』와 그 진연의 『정재무도홀기』가 함께 남아 있어서 당시의 잔치 양상을 그 어느 시대보다 상세히 알 수 있다. 

↑↑ 정제무도홀기 계사년 무고

 고종 신축년 진연은 순조 기축년(1829)의 무고정재를 사용했다. 이 무고는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의 보위 30년을 기념하는 잔치를 위해 그 경사의 의미를 더하려는 목적에서 새로운 창사를 제작하여 진연에 올렸다. 한글[언문]가사를 한문창사로 지어 올린다. 

 즉 기축년 이전의 무고는 『악학궤범』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계속 한글 가사를 사용했을 것이다. 가사가 오관산인지 정읍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음악 반주는 계속 같았다. 그 반주 음악을 잘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창사를 한문으로 바꾸었으니 음률을 이전과 같이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기생이 자리를 이동하며 춤을 출 때는 음악만 연주되고 가사를 창사하려면 음악을 그쳤다[樂止]. 

 『악학궤범』의 정읍 창사는 정읍 음악에 맞추어 함께 불렀던 것인데, 순조 기축년 이후에는 음악이 잠시 중단되고 창사를 했다. 원무의 창사와 협무의 창사가 각각 나뉘어 다르게 불렸다. 『정재무도홀기』의 무고 순서와 창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무고 화보와 기록을 아래에 옮긴다.

 음악이 경만년지곡(慶萬年之曲)【鄕唐交奏】을 연주하면 악사(樂師)가 북과 북틀을 받들고 북채(槌) 8개를 안고 들어가 전내(殿內)에 놓고, 북채는 북 앞에 나누어 벌여 놓고 나간다. ◦박(拍), 원무(元舞) 4인이 춤추며 북 앞으로 나간다. ◦박, 염수(斂手) 족도(足蹈)하고, 무릎 꿇어 엎드려 채를 잡고 일어선다. 음악을 그친다. 창사【鏤月爲歌扇, 載雲作舞衣, 因風回雪影, 還似燕雙飛】를 마친다. ◦박【鄕唐交奏】, 협무 8인이 춤추며 북 앞으로 나아간다. 음악이 그친다. 창사【寶箏瓊瓊曲, 羯鼓花奴腔, 永新歌宛轉, 蠻舞一雙雙】를 마친다. ◦박【鄕唐交奏】◦박, 모두 춤을 춘다【(장고)북편소리에 따라 족도한다】. 북편소리를 기다려 4대(隊)로 나뉘어진다.【(장고)채편을 치는 것이 1강(腔)】 북편소리에 일제히 북채를 짊어 매어 북을 내려친다. 그리고 북을 등지고(背鼓) 돌아간다(回旋). ◦박, 무자 12인은 2대로 나뉘어 족도하다가 선다. ◦박, 엎드려서 북채를 본래의 자리에 놓고 일어선다. ◦박, 족도의 춤을 추면서 물러간다. 악사가 들어와서 북과 북채를 안고 나간다. 음악이 그친다.

 위의 자료는 고종 계사년의 것인데, 신축년의 것에는 협무의 인원이 4인이므로 그 인원이 기록되었고, 무고 작대도(作隊圖)에 표기된 춤 담당자의 이름이 달라졌을 뿐이다. 외연에는 무동의 이름이, 내연에는 여령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북을 들어 옮기는 여기[奉鼓]가 따로 표기되었다. 

 이상의 기록에서 무고를 춤춘 고종조의 양상은 가사를 창하기 위해 잠시 멈추었으므로 이전의 상황과는 좀 달라진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추는 모습은 여전히 북을 둘러싼 4인의 원무가 장고의 북편소리에 맞추어 북을 바라보며 북채를 내려치고, 등을 돌려 돌아가는 회선의 북춤이었으며, 그 공통점에는 변함이 없다.

 음악은 ‘향당교주’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사용하는 향당교주라는 고유명을 가진 음악과는 다른 것이다. 이때의 향당교주는 아직 그 실체를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국립국악원의 무고와 통영의 북춤 또 동래고무 등이 모두 영산회상곡에서 일부 음악을 사용하는 점으로 본다면, 오히려 이때의 반주 음악도 영산회상 대풍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여겨진다. 

 즉 향당교주는 연주 방식으로서 당피리와 대금 등의 향악기와 당악기의 합연 방식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기록의 처음에 제시된 ‘경만년지곡’은 잔치의 성격에 따라 임시로 붙여진 이름이다. 지방 관아의 교방청 무고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영조 21년(1745)의 『평양감사환영도』 「부벽루연회도」와 고종 초기에 쓰인 정현석의 『교방가요』에서 볼 수 있다.

 
↑↑ 평양교방의 무고(부벽루연희도)

↑↑ 진주교방 무고(교방가요)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방 관아의 교방 무고는 원무 4인의 구성만 보이고 협무는 없이 좌우의 기녀들이 나란히 정열되어 있다. 앉았거나, 섰거나 이들의 역할은 창사를 위한 기녀였다. 특이한 것은 진주 교방 무고 원무는 군복(軍服) 또는 황삼(黃衫)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위 진주교방 무고은 실제로 검무와 같은 청색 쾌자에 흑전모를 쓰고 한삼도 매지(繫) 않은 모습이다. 게다가 정현석의 『교방가요』에는 이 춤을 ‘고무(鼓舞)’라고 표기하여 북춤에 대해 ‘고무’와 ‘무고’는 함께 쓰일 수 있는 용어일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동래고무도 이런 의미에서 교방 무고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각 교방에서는 이와 같이 무고를 예식춤으로 전승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라고 여겨진다. 통영북춤은 평양무고나 진주고무와 달리 4방색의 몽두리를 입는다. 

 무고를 출 때 4방색의 복장을 입기 시작한 사례는 순조 29년(1829)부터라고 한다. 궁중에서는 4방색 복식을 한반도 최남단 통영의 교방에서도 입었음을 나타내는 일종의 위계(位階)적 상황을 나타내는 자료가 아닌가 여겨진다. 통영북춤 복식을 궁중 여령(女伶) 무고와 비교할 수 있는 그림 자료는 아래와 같다.

↑↑ 1829년 내연 여령 무고(기축진찬도병)

↑↑ 1901년 여령 무고(신축진연도병)

 이밖에 영·정조 조 때 벼슬을 살았던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 의 <만윤휴기작락 감념구사 초성장구(灣尹携妓作樂 感念舊事 草成長句)>에 의하면, 의주(義州), 지방에서는 무고뿐 아니라 포구락(抛毬樂), 검무(劍舞) 등이 추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를 한시로 읊은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선화당(宣化堂)은 높고도 넓어 來宣之閣軒且豁
한낮에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네. 亭午開筵勢秩秩
사군(使君)은 내 객고(客苦)를 위안키 위해 使君慰我久行役
술 권하고 노래 부르게 해서 긴 하루 보내네 携酒徵歌消永日
울긋불긋 비단옷으로 꽃밭을 이루어 輕羅疊穀紛威蕤
기생은 애교 띠면서 두 줄로 벌려섰네 兩行粉黛嬌成列
향기로운 바람 따라 움직이는데 薌澤微微軟風度
피리 소리 북 소리는 하늘로 울려 퍼지네 蕭鼓轟轟軟雲裂
화고(畫鼓)는 춤추는 북채 받아 올리고 畫鼓輕受舞抱鳴
공은 흐르는 별처럼 빠르게 날고 있네 香毬飄若流星疾
한 쌍의 어린 기생 몸이 가벼워 一雙少妓最輕身
춤추는 검 날아올라 여름날의 눈발 만드네 舞劒飛騰生夏雪
이천 리 나그네 길 괴롭기도 하더니만 含莘茹苦二千里
이 광경 대하니 심신이 기뻐지네 對此可以心神悅

 ‘화고경수무포명(畫鼓輕受舞抱鳴)’의 화고는 무고의 북통에 꽃을 그려 넣어 교방고라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4인 원무에 쓰인 북을 의미하며, 북을 둥둥 울리면서 춤추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또 ‘향구표약유성질(香毬飄若流星疾)’라 하여 유성처럼 향기나는 공을 던지는 춤을 묘사하였는데 이것은 포구락 춤을 나타낸 것이다.

 ‘일쌍소기최경신(一雙少妓最輕身) 무검비등생하설(舞劒飛騰生夏雪)’은 한 쌍(두 명)의 어린 기녀가 검무를 출 때의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민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으로 볼 때, 조선의 교방 무고는 아래와 같은 변천사를 보인다.

 첫째, 춤추는 사람(舞鼓)의 인원 구성 면에서 시대적 변화를 볼 수 있다.
 『악학궤범』때는 2인무(1북), 4인무(4북), 8인무(8북). 중에서 상위의 허락을 받아서 선택하여 춤을 올렸다. 그러나 영조조 이후의 무고는 4인 원무가 중심 무자(舞者)가 되었으며, 이후 원무와 별도로 협무가 구성된 것은 순조조 부터다. 그러나 지방 교방의 무고는 협무가 계속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북춤의 기본형은 원무로서 충분조건을 갖춘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춤추는 기녀의 복식 변화를 볼 수 있다. 『악학궤범』에서는 무고를 춤추는 기녀들이 일반적인 복식을 입었으며, 이런 예는 정조조 기록물까지 여겨진다. 원무 4인의 복식이 4방색(方色)을 입은 모습을 볼 수 있는 최초 기록은 순조 29년(1829)이다. 지방교방의 무고는《평양감사환영도》와 『교방가요』, 동래고무의 예로 볼 때 춤추는 기녀의 일반 예복을 입는 것이 가능했을지 모르겠으나, 통영북춤의 4방 복식 구전의 양상으로 볼 때 4방색 몽두리라는 점은 조선 후기 통제영의 위상이 타 지역과 비교될 수 있는 자료적 가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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