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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당집三梅堂集의 유금오산록遊金烏山錄에 대한 심고審考(4) / 김광수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6년 01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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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매당 김하천 선생 묘역


삼매당집三梅堂集의 유금오산록遊金烏山錄에 대한 심고審考(3)

김광수
경북향토사연구회(구미)


Ⅱ. 금오산유산록(金烏山遊山錄)

5. 삼매당공 묘갈명(墓碣銘)

通訓大夫司憲府掌令三梅堂金公墓碣銘 幷序
公諱廈梴。字長卿。姓金氏。善山人。始祖諱起。和義君。四傳至贈參判諱匡佐。家坪城。生五子。眞樂堂諱就成。久庵諱就文。俱爲儒宗。其弟諱就硏校尉。無子。以別提諱就器子箴後之。參奉。生諱錫胤。以行誼重。生諱瀁。進士。號陽灘。光海斁倫。杜門求志。從寒,旅兩先生學。淸名峻節。矜式士林。寔爲公考。妣海平吉氏。直長興先女。冶隱後也。本生考諱活。副護軍。妣盧氏。天啓辛酉生公。陽灘公取而子之。英達夙成。九歲。閱詩書綱目。無所碍。遵守義方之敎。十一。修巖柳公。訪陽灘公。公跪問入德之方。柳公曰。小學爲先。顧謂陽灘曰。吾嶺之望。在公家。十五。魁大小解額。華聞益著。陽灘公戒之曰。科第餘事也。盍往受敎于旅軒張先生。公卽往求敎。旅軒卒。又問業于鶴沙金公。庚子。闡文科。卽往拜許眉叟,趙龍洲二老。皆器之。癸卯。陞典籍。尋爲禮兵郞。出知茂長縣。四年棄歸。戊申。再爲兵郞。不赴。明年。陞正郞兼春秋館記注官。俄遷禮郞兼備邊郞。又出爲寧海府使。以善於賑濟。賜熟馬。壬子。辭歸。乙卯。連除直講,司藝,濟用監正,兼掌令。間移司正者再。奉常正者一。復爲掌令者踰歲。前後搏擊貪鄙。屢忤時宰。丙辰。差延接官。勅使怒山臺不設。詰問之。公曰。延接。當觀禮義何如。不當問俗戲。勅使愧服。旣而命持斧湖南。旋除江陵府使。旣肅拜。上覺之。卽命還授密敎。辭不允。乃奉命而南。每縣褒善糾違。又啓前監司枉濫狀。監司乃當時勢家也。知舊多怵之者。公不撓。左遷韓山。怡然就職。明年丁巳。上思公。敎曰。金廈梴。以霜臺舊臣。屈於下邑。非用人之道。卽除掌令。辭不赴。秋。寢疾終。享年五十七。葬店峴乾坐之原。從先兆也。配安東權氏。察訪尙正女。生二男。台燮,鼎燮。以下不盡錄。公聰明英銳。超出儔類。又有高志。以古人自期。內行醇篤。事親友弟。極怡愉。四經草土。哀禮俱摯。立朝。不視冷熱爲前卻。亦不以峭岸自喜。故人或言柔遜。至所不爲所當爲者。綽有定筭。奉使按廉。則不畏強禦。雖素相知。不恤也。四紆郡紱。而民獲所安。撫摩札瘥。不足則繼以家財。將去郡。飭子弟。不令以一財累行裝。家居。坐不箕倨。容無戲慢。言溫而氣和。一室圖書。頤養性情。嘗云膽欲大。而須戒其眞妄。心欲小。而須期於遠大。智欲圓。而當審其眞僞。行欲方。而當察其過不及。其用心固有在矣。手植三梅於堂前。以自號。爲文。奔放豪宕。可以見其胷次矣。惜乎。其不得耉以究其終也。致明夙慕其遺風而有慨焉。日公後孫致憲。越數百里。責以顯刻之辭。謹叙而銘之曰。
士寧仕之不遂。而不玷其名。公志之高。行之潔。宜其永厥聲。
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 完山 柳致明 撰

공의 휘(諱)는 하천(廈梴)이요 자(字)는 장경(長卿)으로 선산김씨(善山金氏)이다. 시조는 화의군(和義君) 기(起)이며 사대를 내려와 증참판공(贈參判公) 휘 광좌(匡佐)가 평성(坪城)의 집에서 여섯 아들을 낳았다. 진락당(眞樂堂) 휘 취성(就成)과 구암공(久庵公) 휘 취문(就文)은 모두 이름난 선비가 되었고 취연(就硏)은 벼슬이 교위(校尉)로 아들이 없어 별제공(別提公) 휘 취기(就器)의 아들 잠(箴)을 양자로 삼았다. 참봉공(參奉公) 휘 잠(箴)은 휘 석윤(錫胤)을 낳았는데 행실이 의중하였다. 그가 아들 양(瀁)을 낳으니 호(號)는 양탄(陽灘)으로 진사(進士)이다. 그는 당시의 임금 광해군(光海君)이 인륜을 저버린 패륜(悖倫)의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두문불출하고 지조를 지키며 정한강(鄭寒岡)과 장여헌(張旅軒) 선생에게 학문을 닦아 청렴하고 절개 높은 이름이 사림(士林)의 표본(標本)이 되었다. 이가 곧 삼매당공(三梅堂公)의 부친이며 모친은 해평길씨(海平吉氏)로 직장(直長) 흥선(興先)의 딸이며 야은(冶隱) 선생의 후손이다. 생가(生家)의 부친은 부호군(副護軍) 휘 활(活)이요 모친은 노씨(盧氏)로 천계(天啓) 신유년(辛酉年 1621)에 공을 낳았는데 양탄공이 데려다 양자로 삼았다. 공은 명철하고 숙성하여 아홉 살 때 이미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경전(經傳)과 강목(綱目)과 같은 역사서를 읽고 막히지 않았으며 또 올바른 가르침을 준수하였다. 열 한 살 때는 수암(修巖) 류공(柳公)이 양탄공(陽灘公)을 방문하자 단정히 꿇어앉아 덕을 닦는 방법을 물었는데 수암 선생이 “소학을 먼저 읽으라”하고는 양탄공을 돌아 보고 “우리 영남의 명당이 공의 집에 있구료”하였다. 열 다섯 살에 대소과(大小科)에 장원(壯元)을 하니 명성이 더욱 드러났다.
이때에 양탄공이 과거(科擧)는 차후에 할 일이니 여헌(旅軒) 선생에게 가서 배우라고 일러서 공이 곧 가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여헌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는 학사(鶴沙) 김공(金公)의 가르침을 받았다. 경자년(庚子年 1660)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허 미수(許 眉叟) 선생과 조 용주(趙 龍洲) 선생을 뵈었는데 두 분은 다 공을 기량이 있는 인물로 여기었다. 계묘년(癸卯年 1663)에는 전적(典籍)으로 승진하고 곧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외직(外職)으로 무장현감(茂長縣監)이 되었다. 사년(四年) 후에는 현감직을 버리고 귀가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68)에 다시 병조 좌랑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는 정랑(正郞) 겸 춘추관 기주(春秋館 記注)로 승진 했다가 곧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비변사(備邊司)로 옮겼고 또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임금에게 말을 하사 받았다. 임자년(壬子年 1672)에는 사직하고 돌아왔다가 을묘년(乙卯年 1675)에는 연달아 직강(直講)과 사예(司藝)와 제용감정(濟用監正) 겸 장령(掌令)을 제수 받고 곧 사정(司正)의 벼슬로 옮겼다가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지내고 다시 장령이 되어 한 해가 넘도록 재직하면서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적발하여 당시의 관리들에게 미움을 샀다. 병진년(丙辰年 1676)에는 연접사(宴接使)로 파견되었음에 중국 사신이 갑자기 산에 대(臺)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자 공이 “연접사로서 예의를 다 했는데 어찌하여 부당한 희롱거리로 반문을 하느냐?”고 하여 사신이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 후 호남지방(湖南地方)의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제수 받았는데 다시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제수 하였기에 임금을 배알하자 임금은 그것을 깨닫고 명을 바꾸어 암행어사로 제수하였으나 공이 사양하였다. 윤허하지 않으므로 곧 명을 받들고 호남지방으로 가서 고을을 살피되 잘한 수령(守令)은 표창하고 잘못한 관리는 탄핵(彈劾)을 하였으며 또한 감사(監司)들이 권리를 남용하거나 잘못하는 일은 상소를 올려 아뢰었다. 당시의 감사들은 세도가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이 이를 알고 많이 염려했으나 공은 조금도 굽히지 아니하였다. 결국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좌천되었으나 공은 기쁜 마음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인 정사년(丁巳年 1677)에는 임금이 공을 암행어사로 제수했던 것을 생각하고 “김하천은 어사대(御史臺)의 원로 신하로 작은 고을에서 굽히고 있는 것은 인재를 등용하는 법도가 아니다”하고 장령을 제수했으나 공은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가을에 오십 칠세로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자 선산(先山)인 점현산(店峴山) 건좌원(乾坐原)에 장사 지냈다. 공의 부인은 숙인(淑人)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찰방(察訪)인 상정(尙正)의 딸이었다. 태섭(台燮)과 정섭(鼎燮) 두 아들을 낳았고 그 이하의 자손들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총명하고 영리함이 남보다 뛰어났고 높은 뜻은 옛 성현과 같고자 했으며 집에서는 품행이 방정하여 어버이 섬기기를 독실히 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화합함이 지극했으며 네 번의 상사(喪事)를 당함에 극진히 슬퍼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배척당한 일이 있던 사람도 가리지 않고 모두 그를 좋아했다. 혹 어떤 사람은 공이 너무 부드럽고 겸손하여 마땅히 해야할 것을 못한다고 했으나 마음속의 지조는 우뚝하게 정립해 놓은 것이 있었다. 안찰사(按察使)의 임무를 띠고 갔을 때에는 거리낌없이 잘못된 일을 막았으며 설혹 평소에 아는 사이라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네 번이나 고을 수령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중에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돌보며 재물이 부족하면 자기의 재산을 털어 생계를 잇도록 하였다. 후에 그 고을을 떠날 때에도 자제들에게 “하나의 재물이라도 떠나는 마당에 허물이 되도록 하지 말라”고 일렀다. 공이 평소에 거처할 때는 행동이 흐트러짐이 없고 용모는 단정했으며 언행과 기색이 온화하고 한결같았으며 방안에는 책이 가득하였다. 마음을 기를 때는 “항상 담력은 크게 하되 진심을 잃는 것을 경계하고, 마음은 적게 하되 원대한 곳을 기약하라, 지혜는 원숙하게 하여 그 시비를 살피고, 행위는 방정하게 하여 그 지나친 것과 부족한 것을 살펴 마음씀이 참으로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손수 뜰앞에 매화나무 세 그루를 심어 그것으로 자신의 호를 삼매당(三梅堂)이라 했다. 그의 문장은 자유분방하고 호탕하여 가슴에 품은 뜻을 볼 수 있으나 아깝게도 목숨을 길게 타고 나지 못하여 그 성취함을 보지 못하였다. 나 유치명(柳致明)은 공이 남긴 풍취를 사모하여 탄식하던 어느날 공의 후손인 치정(致鼎)이 수백리 길을 와서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기에 삼가 글을 써서 새긴다. 선비가 어찌 큰 벼슬을 못했다고 그 명예에 흠이 될 것인가 ? 공은 지조가 높고 그 행실이 깨끗했으니 그 명성도 영원하리라 !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완산(完山) 유치명(柳致明)은 찬한다.

↑↑ 삼매당 김하천 선생 묘갈


삼매당 김하천 선생의 묘소는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산 58번지에 있다. 비명을 새긴 비신의 폭은 46㎝, 높이는 126㎝, 두께는 22㎝ 이다. 비개의 폭은 80㎝, 길이 54㎝, 높이는 40㎝이며, 비좌의 폭은 80㎝, 길이 52㎝, 지상고는 25㎝ 이하 매몰되어 있다.


↑↑ 삼매당 선생 묘역과 시누대


선생의 묘역 앞에는 전라도 무장현민(茂長縣民)이 심어준 시누대 전죽(箭竹)이 번성하고 있다. 창송녹죽(蒼松綠竹)이라 했던가 지금도 푸르고 있다. 이 시누대는 무장현감(茂長縣監) 재임시 읍민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자신은 청간(淸澗)하였다. 체임(遞任)이 되어 돌아올 때에는 앞길을 가로막으며 잔류하기를 원하여 장계에 의해 연임(連任)하였다. 후에 전라도 암행어사(全羅道暗行御史)로 여러 고을을 순행하며 전라감사의 폐단과 고을 수령의 비행을 탄핵하고 봉고파직(封庫罷職) 하였다. 그가 다시 영해부사, 한산군수, 강릉부사 사헌부 장령으로 내직에 들어왔다가 사직하고 고향 선산 평성(坪城)으로 돌아 왔다. 벼슬살이 16년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그의 부음이 전해지자 유월장(踰月葬)을 지냈다. 무장현의 백성들이 어버이처럼 존경하던 선생을 잊지 않았다. 청간하고 인정이 많았던 원님으로 대쪽같은 우리원님으로 기억하고, 무장(茂長) 고을의 시누대를 가져와서 무덤앞에 청백리의 상징으로 심어주고 존경했다. 그 시누대 전죽이 지금도 푸르고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혹자는 왼 산중에 푸른 대나무냐고 말하지만 사연이 있는 시누대라고 말하고 싶다.


Ⅲ. 마치면서

삼매당(三梅堂) 선생은 고을의 재지사족 선산김씨(善山金氏) 가문의 청백리(淸白吏)이다. 집을 나서면 언제나 금오산(金烏山)을 바라 볼 수 있다. 유년시절 수학기는 생가(生家)와 양가(養家) 부친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고 공부하여 당대 명유(名儒)의 가르침을 받았다. 부친의 말처럼 수학의 기간이 길고 과거(科擧)는 후에 하라는 유시에 따라 출사가 늦은 41세에 비로소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다. 향리에서 25세의 청년기에 부친 양탄공(陽灘公)과 와유당공(臥遊堂公)을 수행하여 유산한 유금오산록(遊金烏山錄)은 당시의 지명이나 위치, 금오산성의 현황, 인근 산중 사찰의 사세 판단에도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에도 그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고 평가 할 수 있다. 당시의 기록을 유추해 보면 지금은 더 쇠퇴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다. 시대가 변천하면서 산성의 기능이 폐하고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일부는 더 퇴락(頹落)하는 모순이 가속되었다. 유금오산록의 기록을 상기하여 본다면 현재에 남아 있는 유적이라도 더 잘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외에도 여러 유산기록이 있으나 너무 추상적이다. 가장 현실적인 기록으로 380여년전 한 선비가 남겨준 기록의 역사는 대단히 소중한 기록이라고 사료된다.


❙참고문헌
선산김씨 대동보(善山金氏 大同譜)
삼매당집(三梅堂集)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朝鮮王朝實錄 肅宗實錄)
정재집(定齋集)


이상으로 삼매당집의 유금오산록에 대한 심고를 모두 마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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