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청어(靑魚)에 대한 인식과
과메기의 어원(語源)에 대한 연구(3)
이재봉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포항)
III. 청어에 대한 기록
3. 선비들의 문적(文籍)
중국인들이 바다의 청어를 청어로 부르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조선조 이전부터 청어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찍부터 선비들의 글 속에서도 청어와 관련된 다양한 정서를 찾을 수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한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원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에는 정몽주(鄭夢周),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여말 유학을 부흥시킨 주역이었다. 이색은 차를 즐기며 청어를 좋아했다. 목은은 달력과 청어를 선물로 받고 너무나 기뻐하며 그 소회를 “김공립(金恭立)이 달력을 보내주고 또 청어(靑魚)를 선물하다(金恭立以曆日相送。且饋靑魚.)”라는 제하(題下)의 시로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하루하루 살아갈 때 없어선 안 될 달력이요 黃曆資日用
맛없는 아침밥 입맛을 돋궈주는 청어로다 靑魚助晨飡
달력을 보면 길일 흉일 훤히 눈에 들어오고 吉凶判在目
청어를 먹으면 내장에 원기가 충만해지리라 氣味充於肝
주옥이 어찌 아름다운 물건이 아니랴만 珠玉豈不美
자칫하면 탐욕을 늘려 자라나게 할 따름 適足滋貪奸
의로움을 중시하고 보물을 중시하지 않은 重義不重物
옛사람의 그 이름 없어질 리가 있겠는가 古人名不刊
내 이를 글로 써서 자리 옆에 놔둔 뒤에 書之置座右
길이 우리 자손들 볼 수 있게 하리로다 永爲子孫觀
그는 청어가 입맛을 달래주며 원기를 충만하게 해주는 것이니 달력처럼 일상에 꼭 필요하다고 느끼셨다. 그가 또 다른 시에서 “산더미 같은 흰 파도가 하늘을 때리는 저 바다에는 사람에게 맛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겠는가(人間雋永應多物 白浪如山擊大虛)”라는 싯구를 쓴 것을 보면 그는 청어를 좋아했고 바다를 동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어가 벌써부터 우리 민족에게 인기 있는 식품이었던 모양이다.
중국을 내왕하던 우리나라 사람들도 청어를 중국에 나지 않는 우리 물고기로 생각한 것 같다. 1718 년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중국에 갔던 이관명(李觀命)은 “청어를 보고 느낌이 일다(見靑魚有感)”라는 제하의 시에서 “석 달 동안 양식 거두어 동에서 오며 끝없는 욕심을 수레에 다 채우느라 전대가 비어 늘어졌네 … 다시 청어조차 몰아오니 조물주를 탄식하고 싶다(三月聚糧來自東 盡輸溪壑槖垂空 … 更復驅魚歎化翁).” 라고 읊었다.
그는 시를 짓고 ”청어는 우리나라 물고기로 이곳에는 없었다. 십 수년 전부터 청어가 이곳에서 많이 잡혔다. 이 지역인들은 처음에 그 이름을 알지 못해 조선어(朝鮮魚)라고 불렀다고 한다(靑魚。我國魚。此地素無之。十數年來。多捉於此。此地人初不知名。稱以朝鮮魚云).”고 기록해 놓았다. 아마도 궁금해서 중국인들에게 물어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만 난다고 알고 있던 청어를 중국에서 보는 순간 약소국으로서 조선이 해마다 조공품을 거두어 오느라 겪는 조정의 어려움과 백성들의 고초를 새삼 느끼며 “물고기도 청조에 바쳐야 되나?”라며 하늘을 원망한 듯한 그의 심정이 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필자에게 가감 없이 전달된다.
한국역사상 4대 명필로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조선후기의 김정희가 꼽힌다. 그 중 추사 김정희도 매년 절기음식으로 청어를 먹었다. 그는 ‘청어(靑魚)’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읊었다.
바닷배에 실린 청어 온 성에 가득하니 海舶靑魚滿一城
살구꽃 봄비 속에 팔이꾼 외는 소리 杏花春雨販夫聲
구워 노니 해마다 먹던 맛 그대론데 炙來不過常年味
새 철이라 눈이 끌려 특별히 정이 가네 眼逐時新別有情
추사의 시 속에는 살구꽃과 봄비 마냥 청어는 이미 봄의 풍경이 되었고 시절별미(時節別味)가 되어 있다. 온 성에 가득할 정도로 많은 청어가 비린내가 아니라 살구꽃 향기를 풍기는 것 같다. 마치 봄 하면 쑥과 달래와 냉이를 떠올리듯 청어가 우리민족의 아름다운 절기 정서에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써준 압구헌 박광기의 행장(狎鷗軒朴公行狀) 속에는 고인의 사무치는 모정을 담은 청어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머니가 병으로 목숨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마시게 함으로써 5일이나 목숨을 연장시켰고, 장례를 치른 뒤에는 여막에서 시묘(侍墓)하며 삼년상(三年喪)을 마쳤다.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가 마침 청어(靑魚) 철이었는데, 미처 청어를 올리지 못했다 하여 죽을 때까지 청어를 먹지 않았고, 자손들에게도 경계하기를, “나에게 제사 지낼 때에는 청어를 쓰지 말라(及母疾革。灌指血延五日。旣葬。廬墓終制。以母疾適靑魚之節而未及甞魚。終身不食靑魚。且戒子孫曰。祭吾勿用靑魚).” 시대를 초월해서 효(孝)의 표본이 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압구헌 박광기는 일찍이 부친을 여이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하늘에 가득할 정도였던 것 같다. 청어를 먹는 것이 절기통과의례(節氣通過義禮)를 넘어서 이렇게 하늘도 울리는 효의 상징이 되어 대대손손 전해져 온다.
청송 진보에 사는 어느 선비도 “솔잎에 청어를 싸서 찌고 외상 술에 안주 삼아 석성과 크게 입맛을 다시며 지은 시(靑魚裹松葉蒸熟 賖酒佐肴 與石醒大嚼賦得)”라는 제목으로 다음 시를 남겼다.
청어 부드럽게 익혀 쟁반에 올리니 기쁘고 靑魚軟熟喜盤登
처음 맛보는 안주에 술값이 더해지네 佐飮新甞酒價增
잘근잘근 씹어 점점 씹는 소리 더하니 細嚼漸生牙韻剩
삼킨 걸 따라 단맛이 입 속에 엉기네 甘呑隨下口津凝
누가 또 이 맛을 알 수 있을까 何人可復能知味
그대와 함께 시험삼아 쪄보는 것도 문제 없으리 與子不妨對試蒸
맛난 것은 원래 손맛에 달렸으니 美饌元來調手在
삶고 끓이는 묘한 법은 두루 일컫는 것과는 다르다지 妙方烹煑異凡稱
이 이름 없는 선비의 청어 사랑도 유달리 가슴에 와 닿는다. 청어는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나 술값이 없었던 모양이다. 솔잎에 쪄서 먹으면 그 맛이 어떨까?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친구와 함께 먹고 마시니 술이 맛있고 양이 부족해서 외상값이 늘어날까 걱정하는 표현이 살짝 웃음을 안겨준다. 무명이니 다행이었지 자칫 역사에 외상 술값과 더불어 자신의 이름을 길이 남길 뻔했으니 말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 속에도 청어와 관련된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을미년 11월 21일(기축)에 “북풍이 종일 불었다. 새벽에 송희립을 내보내어 견내량의 적선을 조사하게 했다. 이날 저녁에 청어 1만3천2백40 두름을 곡식과 바꾸려고 이종호가 받아갔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보름 후인 12월 4일(임인)에는 “황득중과 오수 등이 청어 7천여 두름을 실어왔으므로 김희방이 곡식을 사러 가는 배에 계산해주었다.”고 기록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우리가 전쟁 중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군대가 군수지원이 부족한 여건 속에서 청어가 부대의 살림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선비들이 남긴 글 속에는 청어와 관련된 다양한 정서들을 엿볼 수 있다. 목은(牧隱)에게 청어는 입맛을 돋우어 주는 아침 밥상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왕실의 일가로 자라서 제주도에 유배가서도 부인에게 반찬을 보내라고 채근하였다는 추사(秋史)에게 청어는 살구꽃과 봄비를 생각나게 하며 쑥떡과 냉이국 같은 봄을 그립게 해주는 시절별미(時節別味)였다. 또 약소국 외교관으로 종주국 중국을 방문하게 된 이관명(李觀命)은 예전에 중국 시장에 없었던 청어를 보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서 바치는 조공물(朝貢物)도 버거운데 조물주가 청어마저 중국으로 몰아왔다고 비탄에 잠겼다. 매천(梅泉)이 써준 압구헌(狎鷗軒)의 행장(行狀) 속 이야기는 보다 감동적이다. 압구헌은 와병 중이던 모친이 봄에 청어를 드시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본인의 제사상에 청어를 올리지마라는 유언을 남겨 청어는 지극한 효의 상징물로 길이 남았다. 청송 진보에 사는 어느 선비는 솔잎에 청어를 쪄서 친구와 함께 안주로 먹으며 그 맛에 반해서 외상술이 늘겠다고 썼다. 청어가 전란 중 병영 운영에도 큰 보탬이 된 사실이 난중일기 속에 기록되어 있어서 그 역사적 존재감을 더했다. 이 외에도 청어가 제물, 답례품, 문병선물과 결혼 예물로도 애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청어는 우리 민족에게서 가장 사랑받은 물고기였다.
4.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만 청어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이 빈번하게 558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례로 세종 즉위 초 태조(太祖) 이방원(李芳遠)이 양위(讓位)하고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 “황엄(黃儼)이 통사(通事) 김시우(金時遇)를 보내어 상왕께 청어(靑魚) 어금니를 박은 띠를 드리니, 상왕이 김시우에게 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丁巳黃儼遣通事金時遇, 獻靑魚牙帶于上王, 賜時遇衣一領).”는 기록이 전한다. 황염이 청어의 어금니가 장식된 띠를 개국조(開國祖) 이방원에게 선물했고 그가 옷 한 벌을 하사한 사실로 비추어 그가 기뻐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청어가 화해(和解), 다산(多産) 및 풍요(豊饒)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기록과는 달리 대부분의 공식기록 속에는 의례용(儀禮用)을 포함한 다양한 목적으로 왕실(王室)에서 사용되는 청어의 진상(進上)과 관련해서 지방관(地方官)이 제때 제대로 된 청어를 진상하지 못하여 죄를 청하거나 역으로 추고(推考)하는 내용, 세금징수의 대상과 수단으로써 청어 이야기들이 나온다.
영조 3년 정미(1727) 2월 13일(경오)에 청어(靑魚)를 기한 내에 봉진하지 못하였으므로 대죄(待罪)한다는 황해 감사의 장계(狀啓)와 관련하여 대죄하지 말라고 회유(回諭)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황해 감사의 장계에, 청어(靑魚)에 대한 진상(進上)을 기한 내에 봉진(封進)할 수 없으므로 대죄한다고 한 일에 대해 조명신(趙命臣)에게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고 회유하라고 하였다(以黃海監司狀啓, 靑魚進上, 限內不得封進, 待罪事。傳于趙命臣曰, 勿待罪事, 回諭).”
이와는 반대로 정조 10년 병오(1786) 3월 3일(정미)에는 해서(海西)의 파출(罷黜)할 수령들을 추고(推考)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황해 감사 엄사만(嚴思晚)이, 진상할 청어(靑魚)를 기한 내에 봉진(封進)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봉진관인 풍천 부사(豐川府使) 최광벽(崔光璧), 장연 현감(長淵縣監) 이한흥(李漢興), 강령 현감(康翎縣監) 이엽(李爗)을 파출하고, 옹진 부사(甕津府使) 신익현(申翊顯)의 죄상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어공(御供)이 비록 중요하나 영송(迎送)하는 일에 폐단이 있으니, 세 고을의 수령을 파출하는 일은 용서하고 수사(水使)를 논죄하는 것 또한 용서하되, 모두 엄하게 추고하라. 그리고 경은 대죄(待罪)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회유(回諭)하라고 하교했다(黃海監司 嚴思晚。以靑魚進上。限內不得封進。請封進官 豐川府使 崔光璧。長淵縣監 李漢興。康翎 縣監 李爗罷黜。甕津府使 申翊顯罪狀。令廟堂稟處。敎以。御供雖重。迎送有弊。三邑守令罷黜分揀。水使論罪。亦爲分揀。竝從重推考。卿則勿待罪事。回諭). 이 내용을 보면 진상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제도상 폐단(弊端)도 있으니 업무수행상 잘못의 경중을 가려서 관계 지방관들을 경고하되 형벌로 다스리지는 말고 보고하는 황해감사(黃海監司) 엄사만(嚴思晚)에게는 대죄하지 말라고 답변한다.
고종 3년 병인(1866) 10월 29일(갑인)에 생청어를 기한 안에 봉진할 수 없으므로 대죄한다는 경상감사(慶尙監司) 이삼현(李參鉉)의 장계 속에는 진상과 관련해서 지방관들이 겪어야 하는 고초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경상 감사 이삼현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천신(薦新)하고 진상할 생청어(生靑魚)를 잡으려 밤낮으로 어망을 던졌으나, 고기의 흔적마저 갑자기 사라져서 기한 내에 봉진(封進)할 수 없으므로 황공하여 죄를 기다립니다.’ 하였는데, ‘대죄하지 않도록 회유(回諭)하라.’고 전교하였다(以慶尙監司李參鉉狀啓, 薦新及進上生靑魚, 晝夜設網, 魚跡頓絶, 限內不得封進, 惶恐待罪事, 傳曰, 勿待罪事, 回諭).” 경상감사가 “밤낮으로 어망을 던져도 청어가 흔적 없이 사라져서 못잡았다.”고 구명의 노력을 할 정도면 현지 어민들은 오죽했을까?
사실 청어는 흔했지만 왕실의 제례용품과 답례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생필품이었고 동시에 국가의 중요한 세원(稅源)이었다. 그래서 위와 같은 기록들이 다수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청어는 왕실과 사대부(士大夫)뿐만 아니라 궁사빈민(窮士貧民)들도 차별 없이 대했다. 빈부귀천(貧富貴賤)을 막론하고 온 백성을 먹여 살린 것이다. 또 오후청에서 유래된 화해의 상징성, 많은 알을 품고 있어서 생긴 다산과 풍요의 상징성, 19년이란 긴 수명을 가진 장수성에 색깔마저 푸르니 새해를 밝고 푸르게 맞게 해주는 서기(瑞氣)의 상징성도 있다. 그러니 우리 조상들이 새해를 맞아 청어천신을 행한 것처럼 우리에게 흔했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귀한 물고기였다. 오히려 흔했기에 하늘의 은택(恩澤)으로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