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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교생軍威校生 장사진張士珍 수성장守城將의 전사戰死(3)/홍영선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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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군위교생軍威校生 장사진張士珍 수성장守城將의 전사戰死(3)


홍영선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군위)

Ⅲ. 임란 의병장 장사진의 진몰(陣歿)한 사신(捨身)정신

4. 장사진 관련 기록

1) 『선조수정실록』
 군위현의 교생 장사진이 적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장사진은 재능과 용맹이 있어 변란 초기부터 군사를 모아 적을 무찔렀는데 전후(前後)에 사살한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왜적이 張장군이라고 일컬으면서 감히 그의 지역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하루는 적이 복병을 설치하고 유인했는데 장사진이 끝까지 추격하다가 복병 가운데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크게 호통을 치며 힘껏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육박전을 벌였다. 한 쪽 팔이 잘렸는데도 쓰러지지 않고 남은 한쪽 팔로 계속 분격하였으나 마침내 전사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수군절도사로 추증하였다.
軍威縣校生張士珍討賊見敗, 死之, 士珍有材勇, 自變初, 聚兵擊賊, 前後射殺甚衆, 倭稱爲張將軍, 不敢入其界. 一日, 賊設伏誘之, 士珍窮追陷伏中, 猶大呼力戰, 矢盡手搏賊斫一臂, 猶不什, 以一臂奮擊, 未已遂死. 事聞, 贈水軍節度使.

2) 『징비록(懲毖錄)』
  “사진(士珍)은 앞뒤에 적병을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적군은 그를 張장군 이라 부르면서 감히 군위의 경계에 들어오지 못했었다. 어느 날 적군은 복병을 설치하고 유인하였는데, 사진은 끝까지 추격하다가 복병 속에 빠졌으나 오히려 크게 외치며 힘껏 싸웠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적병이 사진의 한쪽 팔을 쳐서 끊어 버렸는데도, 사진은 남은 한 쪽 팔로 분전(奮戰)하여 멈추지 않았으나 마침내 죽고 말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조정에서 수군절도사를 증직하였다.”
“士珍前後, 射殺賊兵甚多, 賊稱爲張將軍, 不敢入軍威界, 一日賊設伏誘之, 士珍窮追陷伏中, 猶大呼力戰, 矢盡, 賊擊斷士珍一臂, 士珍獨以一臂奮擊未已, 遂死, 事聞, 贈水軍節度使.”

3) 『임진일기』
 11월 14일 맑음. 날씨가 몹시 추웠다. 아침식사 하고 나서 길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신지(南申之)를 찾아보았는데, 비로소 군위(軍威)의 장사진(張士珍)이 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공은 교생(校生)으로 무예의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 용기와 무략이 있었기 때문에 방백(方伯, 관찰사: 韓孝純)이 그를 차출하여 그의 고을 복병대장(伏兵大將)으로 삼았는데, 여러 차례 많은 적을 만났지만, 그때마다 사살하고 목을 벤 데다 또 금의적장(錦衣賊將) 한 명을 베어 이것으로써 군대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자, 장차 인동현(仁同縣)에 머물고 있는 적진에 들어가 치고자 하였다. 그 뜻이 소소한 승리에는 안주하지 않아서 매번 적을 만나면 자신이 사졸(士卒)보다 앞장서니 용감함은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 지난 10일에 적들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가까운 이웃 마을에서 분탕질하자, 장공이 결사대 30여 명을 이끌고 싸우러 달려갔다. 머지않아 많은 적들이 사방에서 갑자기 들이닥쳐 장 장군 이하 모두가 피살되었다. 아마도 왜적은 지난날 제 우두머리를 벤 원수를 보복하고자 미리 복병(伏兵)을 설치해 놓고 거짓으로 적은 병력을 보내어 고단하고 약하게 보이도록 해 짐짓 유인하는 계책으로 삼았던 것이나, 장사진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감행하여 패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의성(義城) 이하 여러 고을들은 장사진을 울타리로 삼아 지켰지만, 갑자기 이처럼 그지없는 지경에 이르러 적들이 만일 곧장 몰아쳐 온다면 막고 꺾을 계책이 없으니, 이것이 더욱 안타깝고 애석하였다.
十一月十四日, 晴. 日候極寒. 食後發還, 歷見南申之, 始聞軍威張士珍遇害. 張公校生而有武才者也. 以其有勇略, 方伯差爲本邑伏兵大將, 累遇多賊, 輒射斬, 又斬錦衣賊將一級, 以此軍聲大振, 將欲入擊仁同縣留賊, 其志不安於小捷, 每遇賊, 身先士卒, 勇敢無出其右, 去十日賊小許, 焚蕩于近隣, 張公率敢死者三十人赴戰,俄而衆賊, 四面猝至, 士珍以下皆被殺 蓋賊欲報前日斬魁之讐, 豫設伏兵, 陽遺單兵, 以示孤弱, 故爲引出之謀,. 而士珍不悟, 敢敗至此, 尤極痛心. 義城以下諸邑, 以士珍爲藩捍, 遽至此極, 賊如長驅, 則遏折無計, 是尤可惜可惜.

4) 군위읍지인 『적라지(赤羅誌)』

① <충신조(忠臣條)> 편의 기록
 장사진은 인동인 이니 죽정(竹亭) 잠(潛)의 손자다. 성품은 의롭고 담략이 많고 또 능하고 굳세었다. 빨리 달려가서 달리는 말을 타고 뛰는 노루를 잡았다. 본 고을 성동면 오산리에 우거하였으니, 임진란에 향병 100여 명을 인솔하고 이름하여 ‘복수군(復讎軍)’이라 하였다. 본 고을 남쪽 경계 마추(磨槌) 고개를 막아 지키었다. 혹 이르는 도적을 엄살하고 혹 떠다니는 도적을 습격하여 전후로 죽인 바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곧 이제 군기고(軍器庫)의 왜놈 물건 총과 창 있는 것은 곧 그때 얻은 것이다. 본 고을에 적이 오는 하나의 길 요충지인 인동에 왜병 독한 군대가 주둔하여 더욱 사방에 핍박하고 노략질함을 당하여서 잔멸하지 아니함 없으니 오직 마추현 동쪽은 두려워서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반드시 장장군의 있고, 없는 것을 물어보았고, 또 지목하여 장호랑이[張虎]라고 하였다. 고개 왼쪽 여러 고을이 힘을 입어 온전함을 얻었다. 하루는 휘하사람 주손(朱孫)이 정찰을 잘못하여 적의 복병을 설치한 가운데 빠졌다. 이에 주먹을 펴 벌리며 크게 외쳐 말하기를 “오늘은 이 도적과 더불어 결사를 각오한다.”하고, 또 싸우며 또 물리치니 사살한 도적이 수십 명이었다. 도적의 무리가 크게 당황하여 달아나고자 하다가 이윽고 도적이 우리 군사가 외롭고 형세가 적은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군사를 돌려 진격해 왔다. 그래도 궁시(弓矢)를 잡으니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그 화살이 다함에 미쳐 적에게 한쪽 팔을 끊기었다. 그래도 한손으로 분격함을 마지아니하다가 힘이 다하여 이에 죽었다. 이 사실을 조정에서 듣고 ‘수군절도사’로 추증하였다. 혹 이르기를 “죽을 때 나이가 스무살이고, 장가들지 않았다.”고 한다.
“張士珍, 仁同人 竹亭 潛之孫, 性慷慨多膽略, 又能健 步한,及奔馬手搏駭獐, 寓居,于本縣 城洞面, 烏山里, 壬辰亂倡率鄕兵 百餘人, 號曰 復讎軍., 遮守 本縣之南界 磨槌嶺 或給賊掩殺, 或遊兵襲擊, 前後所殺 不知其數 卽今 軍器庫 倭物 銃槍 卽其時所獲也, 本縣一路 當賊來之要衝 仁同屯倭毒鋒 尤逼四出, 槍掠無不殘滅 而惟磨槌嶺 以東則 畏而不敢犯必問 張將軍 在否 又目之曰 張虎 嶺左諸軍賴以獲全, 一日麾下人 朱孫不善 偵候誤陷於賊倭設伏中, 乃張拳大呼曰, 今日與此賊決死且戰且却 射殺數十賊 賊徒狼狽欲走旣而 賊知其軍孤勢寡 麾其兵復進유,以其弓矢執不敢逼及其矢盡 賊참,斷一단,猶以척,手 奮擊不己 力竭乃死事聞行朝, 特贈水使 或云 死時年弱冠 未及有室云.”

② <사실조(事實條)> 편의 기록
 장사진은 인동(仁同)으로부터 본 고을 성동(城洞)에 와서 우거(寓居)하였다. 임진란 때에 관군의 장수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인동부(仁同府)를 지나다가 부민(府民)에게 묻기를 이 고을에 문무를 겸비한 선비가 있느냐고? 하니 부의 사람이 장사진이라고 대답하였다. 당나라 장수[天將]가 그를 불러 보고는 초서격문[草檄]을 시켰다. 때는 마침 어두운 밤이었다. 장사진이 희미한 달빛 가운데 글쓰기를 나는 것 같이 하되 한 글자도 틀리지 아니하니 당나라장수[天將]가 감탄하고 칭찬하여 이르기를, “의사(義士)는 먼 일가들이 인동에 있다하니, 천장의 진중에서 의리로 죽을 때는 옛 땅을 지켰다 하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의사의 용건(勇健)한 것만 말하고, 문사(文辭)를 잘하였음을 말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변론치 아니할 수 없다. 『징비록』에 “교생(校生) 장모(張某)”라 하였고, 유적(儒籍)에 기록하여 있으니 학문[業文]을 삼았음을 가히 알 것이고, 하물며 죽정(竹亭, 張潛의 號)이 종조부(從祖父)가 되는데 어찌 글 못하는 손자가 있었겠는가?

 장사진은 이미 후사(後嗣)가 없고, 또 일가의 무리가 드물다. 다만 의관(衣冠)을 감춘 곳이 옛 마을에 붙이어 있으니 나는[현감 남태보] 연대가 멀어져서 사적이 인멸될까 두려워하여 하나의 비석을 병천(并川) 위에 세우고 비석 전면에 <國殤贈水使張士珍故里>라 하고 비 뒷면에 대략 의리로 전사한 상황을 서술하고 비명(碑銘)을 지었다.
6년의 백성근심 머리털 모두 실 되었고, 六載民憂髮盡絲
양산의 가을 늦으니 돌아갈 글 지음이 더디었네. 楊山秋晩賦歸遲
스스로 덕 없는 부끄러움이 후세에 전함을 견딜는지, 自慚無德堪傳後
다만, 장공은 의리로 죽었음을 기록으로 남긴다. 只立張公死義碑
張義士 士珍 自仁同寓居本縣城洞. 壬辰天將南下過仁同府 府問府人曰 此間有文武具備之士乎 府人以士珍對天將召見之使草檄時適夜黑 士珍於月色依微中運翰如飛一字不錯 天將嗟賞云 義士之遠族在仁同者云 然則 義士赴天將陣中死義時還守故土歟. 世人只稱義士勇健不稱文辭是不可不卞 懲毖錄稱校生張某 編儒籍則業文可知況以竹亭爲祖而豈有無文之孫乎. 公旣無嗣續又稀族黨只有衣冠之藏寄在故里 余恐年代寢遠事蹟隨湮始立一碑于并川之上 題曰 國殤 贈水使張某故里碑 陰略敍死義狀仍 有詩曰 六載民憂髮盡絲, 楊山秋晩賦歸遲. 自慚無德堪傳後, 只立張公死義碑.

③ 장의사비음기
 병수동에 있는 국상증수사장사진고리비(國殤贈水使張士珍故里碑)의 음기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사의 성은 장씨요, 이름은 사진(士珍)이다. 관향은 옥산인(玉山人)이며 죽정(竹亭) 잠(潛)의 손자[종손자임]이다. 성품은 강개하고 담력이 크며 또 용감하고 강건하였으니, 달려가는 말에 뒤쫓아 승마(乘馬)하여 놀란 노루를 잡았다. 고을 성동면(城洞面) 오산리(烏山里)에 우거하였다. 임진란을 당하여 향병 100여인을 창도(倡導)하여 인솔하고 복수군(復讎軍)이라 이름 하였다. 적라산 북쪽 마추고개를 막아 지키었으니 혹 이르는 도적을 습격하여 죽이고, 혹 유병(遊兵)을 습격하니 전후(前後)에 죽은 자가 많았다. 인동(仁同)에 주둔하는 왜병(倭兵)이 사방으로 나와서 노략질하니 잔멸(殘滅)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마추현(磨槌峴) 동쪽은 두려워서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으며, 반드시 장장군(張將軍)이 있고 없는 것을 물었고, 또 칭하여 장호랑이[張虎]이라 하였다. 영남 왼쪽은 온전함을 얻은 것은 모두 공의 힘이었다. 하루는 휘하사람 주손(朱孫)이 정찰을 잘못하여 공께서 왜놈이 잠복한 가운데 빠졌으니, 주먹을 펴고 크게 외치면서, “오늘은 이 왜군과 더불어 죽음을 결판하리라” 하고 또 싸우고 또 물리치니, 쏘아서 죽임이 수십 인이었다. 왜적들이 크게 당황하여 달아나려 하다가 공의 군사가 세력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몰고 다시 침공하는지라 공이 활을 잡으니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다가 화살이 다하는데 미치니, 왜병이 공의 한 팔을 베었다.

國殤 贈水使張士珍故里
 한손으로 분격하여 마지아니하다가 힘이 다하여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일이 조정에 들리니 ‘수군절도사’를 증직하였다. 죽을 때 나이 겨우 스무 살이니 아내를 두는 데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 장군이 수립한 바는 옛날 동왕기(童汪齮)에 견주어 오히려 낳으리라. 이미 이을 자손이 없고, 오직 한 움큼의 의관장(衣冠葬)을 하였으니 옛 마을에 부치어 있다.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을 상심하게 한다. 연대가 점점 멀어지니 사적이 인멸(堙滅)될까 심히 두렵다. 세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작은 고을에 이렇게 당당한 열사가 있음을 알지 못하게 한즉 어찌 산남(山南, 영남)의 충의가 기운을 떨치리오. 나는 두려워하면서 대략 의리로 죽음을 서술한 글을 빗돌에 새긴다.
『赤羅誌』 <張義士碑陰記> “義士姓張氏, 名士珍, 玉山人, 竹亭潜之孫, 性慷慨多膽略, 又勇健趕及奔馬手搏駭鹿, 寓居縣之城洞面烏山里, 當壬辰亂倡率鄕兵百餘人,號復讐軍, 遮守磨椎峴或給賊掩殺或遊兵襲擊前後所殺甚多, 仁同屯倭四出搶掠無不殘滅而磨椎以東畏而不敢犯必問張將軍在否又目之曰張虎, 嶺左諸軍賴以獲全皆公之力也, 一日麾下人朱孫不善偵候公陷於倭伏中張拳大呼曰今日與此賊決死且戰且卻射殺數十賊徒狼狽欲走旣而知公軍孤勢弱麾兵復進以公執弓矢不敢逼及矢盡賊斫斷一臂猶以隻手奮擊不已力竭乃死之聞, 行朝特贈水使, 死時年纔弱冠未及有室云噫 公之所樹立視古之童汪齮猶之過也, 旣無嗣續惟有一抔衣冠葬寄在故里過者傷心竊恐年代寢遠事蹟隨堙使世之人不知十室之邑有此堂堂乎, 㤠士則何以激山南忠義之氣也, 余爲之懼略敍死義狀揭于石.” 癸酉八月 日. 縣監 南泰普 謹識

 이상과 같이 군위읍지인 『적라지』에 의거 살펴보았다.

 군위 『적라지』에 수록된 장사진장군의 기록은 제1권에 <충신>편과, <사실>편의 37건 가운데 1편이 실려 있고, 제2권 <기송(記頌)>편에 “장의사비음기”가 수록되어 있다. 『적라지』 1~2권 발문에 의하면 “적라는 군위의 옛 이름이다. 군위가 고을 됨은 신라·고려부터 수 천년 간의 사적을 전하는 것이 하나둘이 아닌데 모두 민멸(泯滅)되어 증거할 것이 없으니 애석하다. 고을의 크고 작음 할 것 없이 한 고을의 지지(地誌)가 있는 것이 마땅하다. 이 고을 선비 홍승(洪昇, 1612~1688)이 모은 것에 더하고, 제영(題詠)이 들어나 가히 기록할 만한 것을 붙이고, 문헌의 부족함을 도우니 뒷날 풍속과 백성들이 보는 자는 채택할 바 있게 합이다.”라고 한 발문에서 적고 있다. 현감 남태보(南泰普)가 발문을 쓴 연도가 1753년(영조 29년) 입춘일이고, 군위현감 재임[1748.9~1753.8] 중에 1~2권[구지舊誌]은 고을 선비 홍승이 모은 것에, 남태보 현감이 보탠 것이다.

 장의사 고리비(故里碑)는 남태보 현감이 짓고 『적라지』 구본에 보태었던 것이다. 그 후 오재순(吳在淳) 군수[1932~1934 재임]가 구본의 떨어짐을 보고 탄식하여 벼슬한 자의 요람인즉 간행을 도모하였으나 이후 1938년 구본과 신편을 간행을 꾀함이 두 해가 지났다. 『적라지』는 3~4권을 추가하여 1946년 남양인 홍종억(洪鍾億)과 영천인 이수락(李洙洛)의 발문을 붙여 남태보가 편집한 구본[1~2권]에 신편[3~4권]을 부쳐 처음으로 4권 2책이 간행된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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