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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로시사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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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金泉의 향안鄕案과 계안稧案에 대한 고찰考察(2)
이갑희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김천)
Ⅱ. 조선시대(朝鮮時代) 김천(金泉)의 향안(鄕案)
2. 개령향안(開寜鄕案)
개령향안은 향지(鄕誌)에는 기록이 없으나 해주인(海州人) 정각(鄭珏)선생이 서문(序文)을 쓴 개령향약(開寧鄕約)의 기록에 “갑진년(1904)에 고 부제학 허석(許襫)공과 청농(靑儂) 이용우(李容愚)공이 고을의 선비들과 향약을 세울 논의를 일으켜 밭(田) 약간을 마련하여 밑천으로 삼아 약소(約所)는 본래의 향사당(鄕射堂)으로 삼았으니 이 당(堂)은 선대의 대부(大夫)와 선비들의 청금록(靑衿錄)을 봉안해두는 곳이며 향안(鄕案)도 이곳에 간직하고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계속 향사당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임란 때 소실된 것으로 판단되며 개령향악이 이것을 대체한 것으로 판단되며 감문상봉출신의 양계(陽溪) 이하(李馥)의 문집인 양계집(陽溪集)에 북면향약서(北面鄕約序)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개령현에도 향약이 존재하였음이 여실히 증명된다.
1) 양계집(陽溪集)의 북면향약서(北面鄕約序)
세상에서 행해지는 도가 쇠퇴하거나 융성하는 것은 풍속을 숭상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으로 풍속숭상이 잘 되느냐, 못되느냐 하는 것은 가르치고 이끌어 나가는 방법에 그 성패가 달려 있는데 가르치고 이끌어나가는 길이 한 가지뿐은 아니지만 백성을 옳은 길에 따르게하여 착한 것을 권하고 악한 것을 벌하는 데는 향약법이 으뜸이다.
이 향약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도에 관여하는 그 무게가 가벼운 것이 아니고 매우 무겁기 때문이다. 대개 태고 때에는 땅이 넓고 방대하여 사람들이 자연 그대로의 습속에 따라 살았으며 요순시대에 들어와서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을 점차 갖춤으로써 배가 고프면 먹고 마시며 춥거나 더우면 기후에 맞추어 옷을 갈아입고 집을 꾸며서 들어가 살고 몸이 아프면 약을 지어 먹으며 곡식은 되와 말을 만들어 그 양을 헤아리게 하니 백성들이 생활을 이루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또 가르치지 않으면 짐승과 같이 되는 것을 염려하여 드디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로서 부자간에는 친애하고 군신 간에는 의로써 지키고 부부간에는 구별을 두며 어른과 아이는 차례가 있어야 하고 붕우는 믿음으로써 사귀어야 하는 다섯 가지의 도를 크게 밝혔다.
당뇨(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의 삼대 때에는 임금의 은덕은 그 백성들이 이름조차 모르고 살았고 우체역과 역졸을 두고 전달할 일과 향약을 만들어 규제할 일이 전혀 없었으며 풍속과 사회의 도의가 저절로 아름답고 융성할 때였으나 대개 규약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세월이 흐르니 세상도 점차 변하여 사람의 순박한 마음이 없어지고 풍속이 점점 쇠퇴하여 난잡해져서 진(秦), 수(隋), 오대(五代)때에는 중국이 오랑캐의 나라가 되어 짐승이 사람 노릇을 하였으니 이때의 인륜이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보면 풍속을 숭상하는 마음은 악으로 변하여 세상의 도가 그 악에 오염되어도 대개 규약을 만들 줄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규약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하였다
송(宋)나라 조광윤(趙匡胤)이 하늘의 명을 받들어 문명정치를 펴니 참된 유생이 많이 나와서 폐지되었던 학문을 다시 일으켰다. 당시 송나리 남전(藍田)에 사는 여대충(呂大忠)형제가 크게 격분하여 세상의도를 만회할 뜻을 두고 쇠퇴한 풍속을 일변시키고자 서로 강구한 끝에 향약의 법을 만들기로 하고 네 조목을 정하였는데 “첫째, 덕업을 서로 권장한다. 둘째, 과실은 서로 구제한다. 셋째, 예절의 풍속은 서로 참여한다. 넷째, 환란을 당하였을 때는 서로 구휼한다.”라고 하였다.
이 규약은 송나라의 여씨가 정한 규약이지만 그 법은 옛날 삼대(三代)의 백성을 교도한 법전을 근본으로 삼고 고금의 사회 변혁을 참작하여 이 시대에 알맞게 간추려 네 조목의 취지를 삼은 것이니 깊이 음미해보면 인심을 권유하여 사람의 참된 도리를 뿌리 내리게 하는데 그 뜻이 없는 조목이 없으므로 백성을 다르게 하는 이 권선징악의 방책은 성인도 바꾸지 않은 것이다. 그후 회암 주부자(주희)께서 증감하여 널리 시행하였고 이어서 우리나라 퇴계선생이 알맞게 간추려서 전한 것이다.
아, 이법의 시행이 어찌 한갓 민속숭상의 아름다움뿐이겠는가? 실로 우리 학문하는 후학들의 행운으로서 이것이 사람의 도의에 관여하는 바가 적지 않으니 이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
아, 우리나라는 동쪽의 예의의 나라이며 우리고을은 학문을 전수하는 전통있는 고을이다. 향약의 법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지금까지 고을 풍속을 숭상하는 인재가 없었으니 불행하게도 그 아름다움을 잃고 지내는 것을 고을 사람들은 항상 걱정하던 중 다행히 우리 성상(聖上)께서 떨치고 일어나서 민속의 교화가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이 규약을 온 나라에 반포하심에 힘입어 우리도의 감사께서 성상의 뜻을 받들어 덕치를 널리 널리 펴는 일을 단연코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고을의 백성 모두가 이 규약을 이행하기에 이르렀다.
아, 백성을 교도하는 길이 트였으니 풍속을 숭상하는 아름다움과 세상의 도를 융성시키는 일은 그다음 차례일 뿐이니 어찌 한갓 고을민의 행운이겠는가. 드디어 한마을 사람들이 의론하고 결정하여 시행하기로 한 연유를 모든 고을 사람들에게 고하기를 “무릇 이 규약을 정하는 일에 함께 참여한 노소상하 약간의 사람은 모름지기 각자가 두려워하고 삼가 감히 태만하고 소홀히 하는 일 없이 권장할 것은 권장하고 규제할 것은 규제하여 사람과 사귈 때에는 반드시 예로써 하고. 환란을 당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구휼하고 정해진 법 조목을 범하는 일 없이 각자가 새롭게 힘써 나간다면 어찌 이 규약을 만든 사람만의 행운일 뿐이겠는가. 만약에 잊어서는 안 될 평범한 일이라도 규약의 조목에 없다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여서 방자한 행동을 꺼리지 아니하고 어긋난 일을 고치지 않는다면 어진 사람이거나 못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문책하여 벌을 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옳다”고 하였다.
이에 강론하여 정한 약속을 책에 적으니 모든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규정은 한결같이 남전여씨 및 퇴계선생이 정한 바에 의한 것이고 감히 도리에 어긋난 말을 덧붙이지 아니하였다. 그동안에 시행할 절목을 감히 함께 규약을 만든 사람들과 상담하여 옛것에 어긋나지 않게 현시에 맞도록 개정하여 그 모두를 순서대로 이에 기록한다. 기해년(1659) 윤3월16일 향인(鄕人) 성산 이하 서(書)
世道之汚隆 在於俗尙之美惡 俗尙之美惡 在於敎導之得失 敎導之方 不一其道而其可使民由之 面勸之懲之者 莫善於鄕約 一法鄕約之有闕於世道所輕而重也如是夫 蓋卜世鴻荒也 其俗渾厖無爲 及聖人代作 人事漸備 則飢渴飮食之 寒熱 裘葛之 居處宮室之 疾病醫藥之 稱量斗斛之 民生已遂矣 又慮夫不敎 則禽獸近邇 遂敎以人倫父子焉親之 君臣焉義之 夫婦焉別之 長幼焉序之 朋友焉信之 人道大明矣 是以唐虞三代之際 風草之無能名 置郵之不可尙 當是時也 無所事於鄕約 而俗尙自美 世道自隆 蓋非惟不暇設約 亦不必設約也 世級漸降 如日下昃醇亡釀繼 蠢蠢貿貿 秦隋五季之間 中國而夷狄 鳥獸而鬚眉 於斯時也 視人論爲何事 而俗尙日惡 世道日汙 蓋非惟不能設約 及不知設約也 趙宋受命 運啓文治 眞儒輩出 絶學復明 於是 藍田呂大忠兄弟 慨然有挽回世道之志 思欲一變其俗尙 相與講明 設爲鄕約之法 而其目有四 曰德業相勸也 過失相規也 禮俗相交也患難相恤也 其約則呂氏約也 而其法則本之乎三代敎民導民之典 酌古今而因革之 隨時宜而詳略之 深味四條之旨 則無非所以奬誘人心 扶植彝倫之至意 其使民由之而勸之懲之之方 聖人不易之矣 其後 晦庵朱夫子 增損而廣其施 逮我退溪李先生 折衷而繼其傳 嗚呼 斯法之行 豈徒凡民俗尙之美 實亦斯文後學之幸其有關於世道不輕而重 果何如也 嗚呼 我東 禮義之國也 吾鄕 文獻之邦也 鄕約之法 欲行而至今不得行 鄕之俗尙 不幸而不免於美之反 鄕之人常病之 幸賴我聖上奮然以化民成俗爲急務 擧一國而頒是約 我仁候 斷然以承流宣化 爲已任闔一鄕而行是約 嗚呼敎民導民之道 旣得矣 俗尙之美 世道之隆 特次第事耳 豈徒爲一鄕之幸也哉 遂會洞井之人 議定行之 因諗于衆 曰凡我同約之人 老少上下 合若干人 須各自惕慮 不敢怠忽 當勸而勸 可規而規 交必以禮 患必相恤 母犯其科 務各自新則豈非約中之幸也 若或難忘熟處 不有約條 不爲當爲 爲不當爲 縱恣而無所忌 顚悖而莫之顧 則責罰非所論 其爲人賢不肖何如也 皆曰唯 於是 講定約束 書之冊 凡勸懲之規 一依藍田呂氏 及退溪先生所定 不敢贅以瞽說 其間 擧行節目 敢與同約之人 商議改定 以便於今 而不盭於古 皆列記之 歲己亥 閏三月 旣望 鄕火 星山 李香夏 序
2) 개령내신정 향약서
고을에 약속이 있는 것은 남전여씨(藍田呂氏)가 시작하여 그 목록이 네 가지가 있으니 덕업상권(德業相勸)과 과실상규(過失相規)와 예속상교(禮俗相交)와 환란상휼(患亂相恤)이라. 그 방법도 삼대에 백성을 가르치는 전례를 따랐다.
옛것 지금을 참작하여 그대로 고치며 상세하기도 하고 간략하기도 하더니 그 후에 회암(晦庵) 주부자(朱夫子)가 증손하여 널리 시행하였다. 아! 세급(世級)이 점점 떨어져 향풍이 날로 무너지니 이것이 어찌 교도에 방법을 잃어버려 행하는 길을 모르는 소치가 아니겠는가? 갑진년(甲辰年)에 고 부제학 허석(許襫) 공과 청농(靑儂) 이용우(李容愚) 공이 고을의 선비들과 향약을 세울 논의를 일으켜 밭 약간(若干)을 마련하여 강명(講明)한 밑천으로 삼고 약소(約所)는 본래의 향사당(鄕射堂)으로 삼았으니 이 당(堂)은 바로 고을의 선대(先代)의 대부(大夫)와 선비들의 청금록(靑衿錄)을 봉안해 두는 곳이며 향안도 이곳에 간직하고 있다.
아! 세도(世道)가 쇠하여 많이 변천하여 임자년 봄에 군의 동쪽 1리에 집을 지어편액을 내신정(來新亭)이라 하였으니, 선대에서 모시던 향안(鄕案)을 이곳으로 모시고 또 새로 정리한 향안(鄕案)은 옛것과 같이 간직하고 강명할 곳으로 삼았다. 이에 모임에 기강이 있게 하고, 지킴에도 방법이 있게 하였다.
아! 우리나라는 예의의 나라이며, 우리 고을은 문헌의 지역으로 송월당(送月堂: 李思敬) 선생이 여기에 은거하였고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선생이 일찍이 이 고을의 군수가 되었고, 신당(新堂) 정붕(鄭鵬)선생은 여기에서 태어났으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의 장구(杖屨)가 이곳에 여러 번 이르렀으니 오늘날 우리가 처신하는 방법을 대략이나마 알게된 것은 이분들이 주신 것이니, 고을에 선현들에게 유염(濡染)한 것이 어찌 적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제기(提起)하면 떨쳐 일어나고, 폐하면 사그러 진다는 선철(先哲)의 말씀으로 다시 우리 고을의 미래를 헤아려보면 우리들의 책임이 중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무릇 향약 중에 권징(勸懲)하는 규약은 여씨(吕氏)와 회암(晦庵) 부자의 정한 것을 따라 쓸데없는 말로 덧붙이지 않았고, 그 시행의 절목(節目)은 동약(同約)의 여러분이 상의하여 제정하고 왼편에 열기(列記)하였다. 향인(鄕人) 수양(首陽: 海州) 후인 정각(鄭珏)은 서문(序文)하다.
鄕之有約 昉於藍田呂氏 其目有四 德業相勸也 過失相規也 禮俗相交也 患難相恤也 其法則由之乎三代敎民導民之典也 酌古而參今 因革而詳略之 其後晦庵朱夫子 增損而廣施焉 嗚乎 世級漸降 鄕風日頹 玆豈非敎導失方 莫知由之之致歟 歲甲辰 故副提學許公襫 靑儂李公容愚 與鄕中章甫 議倡設鄕約 寘田若干 以爲講明之資 而約所 則原來鄕射堂 堂乃鄕先大夫士淸籙奉安之所 而約案 亦修藏于此矣 噫 世衰道遠 事多變遷 壬子春 新築一舍于治之東一里 扁其額曰來新亭 先奉鄕案 移案于此 且新整鄕案 幷舊藏之 因以爲講明之所 於是 會之也有紀 守之也有方 嗚呼 我東禮義之國 吾鄕文獻之邦 送月堂 李先生隱居于是 江湖金先生 嘗涖宰于是 新堂鄭先生降毓于是 愚伏鄭先生杖屨 亦屢及於是 今日吾儕之所以粗知處己之方者 莫非是賜 則鄕之濡染於先賢者 曷敢曰少也哉 然提之則揚 廢之則鑠 先哲其有言 更揣未來之吾鄕 則吾儕之責 不可不謂之重矣 凡約中勸懲之規 一依呂氏及晦庵夫子所定 不敢贅以瞽說 而其施行節目 與同約僉員 商議制定 列記于左云爾 鄕人 首陽 海州后人 鄭珏 序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