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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교생軍威校生 장사진張士珍 수성장守城將의 전사戰死(2)/홍영선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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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교생軍威校生 장사진張士珍 수성장守城將의 전사戰死(2)


홍영선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군위)

Ⅲ. 임란 의병장 장사진의 진몰(陣歿)한 사신(捨身)정신

1. 가계

 장사진의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그 비조(鼻祖)는 상장군(上將軍) 장금용(張金用)이다. 12세에 장안세(張安世)는 덕녕부윤(德寧府尹)을 역임 치수(治水)를 잘 다스린 공이 있었고, 부윤공의 증손인 장수(張脩)는 장령(掌令)으로 쟁신(諍臣)이었다. 

 장령공의 증손 장적손(張嫡孫)은 어해장군으로 시조로 부터 17세이다. 공에서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장혼(張渾, 1494~1516)의 후손은 중리파이고, 둘째 장잠(張潛, 1497~1552)은 기묘명현으로 호가 죽정(竹亭)이다. 56세에 졸하니 현암(賢巖)서원에 제향되었고 황상파조(凰顙派祖) 이시다. 

 셋째 장도(張濤, 1499~1544)는 호가 죽헌(竹軒)이고 46세에 졸하였다. 공의 손자가 장사진(張士珍) 의병장이다. 넷째 장연(張演, 1502~1574)은 호가 송헌(松軒)으로 영양으로 은거하여 후손이 울진에 거주하여 울진파(蔚珍派)이다. 죽헌공 장도의 아들 장륜(張崙)은 호가 낙애(洛崖)로 군위현 효령 병수동에서 살다가, 오천동으로 이사하였다. 

  『인동장씨대동보』에는 4형제 중, 장남 장륜 한 분만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수군절도사실기』에는 장남 장륜과, 장후문(張厚文), 장연수(張連守), 장옥룡(張玉龍)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둘째 장후문의 아들이 장사규(張士珪)로 임란 의병으로 인동전투에서 장사진보다 먼저 순절하였다.

 장륜(張崙)의 장남 장사림(張士琳)은 군위에서 임란으로 청주로 이거 하였고. 둘째 장사진(張士珍)은 수성장(守城將)으로 인동 부근 마추현(磨槌峴)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셋째 장사용(張士用)은 임란 당시 울산으로 이거(移居) 하였다고 한다.

2. 성장과정

 장사진은 군위 효령 병수동에 아버지와 같이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구안(邱安) 국도변 병수동(並水洞) 마을 입구에 <국상증수사장사진고리(國傷贈水使張士珍故里)>라고 세운 비석이 우뚝 서 있어 장사진이 살던 마을이라 하였다. 이비는 1753년(영조 29년, 癸酉) 8월에 군위현감 남태보(南泰普)가 비문을 지었다.

 7세에 부모를 따라 인근 오천동(梧川洞:烏深, 烏山]으로 이사하면서 친구들과 작별할 때 남긴 말이 “내 충성스러운 훌륭한 사람으로 입신하여 너희들의 따뜻한 인정에 보답하리라.” 말하고는 떠났다고 한다. 오천동으로 이사한 후로 무술을 익혀 달리는 말을 쫓아 잡아타는 동작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비호(飛虎) 같다”고 했다. 12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모자(母子)간에 생계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15세에 뒷산 샘터를 발견하고 큰 돌을 운반하여 우물을 축성하고자 장정(壯丁)이 들 수 없는 큰 돌을 옮겨서 원단(圓壇)을 쌓아 완성하였다. 그 후 장사진이 쌓은 <장군천(將軍泉)>이라고 했다.

 1590년경 마을 친구끼리 돌탑 쌓기 내기를 하여, 지는 쪽에서는 찹쌀떡 내기를 하였다. 이에 3일 내 5층 석탑을 완성하니 친구들이 놀라 모두 장사진의 힘쓰는 능력을 인정하였다. 이를 “삼일석탑(三日石塔)”이라 하였고, 지금도 충렬사 뒤쪽에 ‘장군천’과 ‘석탑’이 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장사진은 유년 시절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쾌활한 성격에 민첩한 동작으로 통솔력이 남다르게 뛰어났다.

3. 임란 인동부근 마추현 전투에서 진충(盡忠)

1) 전투의 개황

 군위 의병장 장사진의 의병은 약 100여 명이고 일본측 왜군 기시다 주우겡[林下 重賢]의 병력은 약 800명으로써 인동현과 군위현 경계에서 병력 현황이다. 1592년 9월 군위현의 교생(校生)으로 있던 장사진은 의병을 일으켜서 훈련하고 군기(軍器)와 군량을 정비하여 병정과 군마가 떠드는 소리가 천지(天地)를 진동하게 하였다. 

 이때 왜군은 9월 17일 인동부에는 대구부에 본진(本陣)을 두고 있던 기시다 주우겡의 군사 850명과 미나미 조오겡[南條元淸]의 군사 1,500명이 주둔하고 있어서 군위 경계까지 침범하여서는 약탈과 살인 등 갖은 만행을 하고 있었으므로 장 장군은 크게 노하여 때때로 출격하여서는 빠짐없이 격멸하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선두에 서서 몸소 화살과 돌[矢石]을 뚫고 적진을 공격하여 쳐부수니 의병들의 사기가 날로 높아지고 적에 부역(附逆)하는 자가 차츰 없어지게 되어 군위현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다.

2) 장사진 장군의 전투경과

 장사진의 재종 동생인 장사규(張士珪)도 장사진(張士珍)과 비슷하여 사납고 날쌤[驍勇]이 있고, 담력과 지략[膽略]이 있었는데, 급히 출동하여 적을 치고 추격하던 중에 유탄으로 중상을 입고 싸움터에서 죽었다는 비보를 접한 장사진은 이에 더욱 분격(憤激)하여 군위 경계 쪽에 진격함을 대비하여 의병 백여 명을 모집하여 마추현(磨槌峴) 고개 격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적의 흔적이 나타나기만 하면 곧 뛰어나가서 격멸하고 필승하니, 적은 장 장군의 이름만 듣고도 멀리 도망치는 것이었다. 

 9월 30일 수백 명의 적이 공의 본진으로 쳐들어왔는데 그는 다만 10여 기병(騎兵)을 거느린 채로 곧 역습(逆襲)을 단행하여 대검(大劍)을 한번 번쩍일 때 적장의 목을 베어 큰 창 끝에 적의 목을 꿰어 들고 춤을 추면서 적에게 보이니 적이 울면서 도망쳐 버렸다고 했다.

 9월 20일 제1차 전투에서 크게 이긴 후, 9월 30일 제2차 전투에서 더욱 많은 병력으로 쳐들어와 보복하고자 먼저 복병(伏兵)을 만들어 놓고 그를 유도하니 이 흉계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그는 적을 승승장구(乘勝長驅)로 추살(追殺) 하기 만을 힘쓰다가 마침내 앞뒤로 적을 만나[腹背受敵] 여러 겹으로 에워싸임에[重圍] 빠져서 비로소 전세(戰勢)가 불리한 것을 알아차리고 좌우에서 적을 쏘고 있던 아군(我軍)에게 이르기를 “이제 우리가 끝까지 싸워서 남아(男兒)의 의기(意氣)를 높일 때가 왔으니 구차스럽게 살고자 하지 말고, 적 한 놈이라도 더 죽이자.” 하니 모두 이[齒]를 악물고 활 가진 자는 화살이 다하고 활줄이 끊어지도록 쏘았으며, 창을 가진 자는 창끝이 무뎌지고, 창 자루가 부러질 때까지 적을 찔렀으며, 또 칼 가진 자는, 칼날이 톱[鋸]과 같이 되고 칼의 몸이 휘어질 때까지 적을 베었고, 곤봉(棍棒)이 부러지면 돌[石]을 주워서 던지고 비수(匕首, 短刀)를 빼앗기면 맨손[赤手]과 맨주먹[空拳]으로 격투[搏戰]하였다. 평소 적은 장사진을 두려워하여 ‘장장군(張將軍)’이라고 부르던 터인지라 감히 가까이 다가서는 자가 없고, 포위한 채로 멀리서 활과 조총만으로 쏘니 그는 말에 채찍질하여 그 좌우 10여 말 탄 군사와 함께 적의 중군(中軍)을 충격(衝擊)하는데 화살이 빗발 같고, 총탄이 우박(雨雹) 같았으므로 화살을 받지 않은 인마(人馬)가 없고, 새총[鳥銃]에 맞지 않은 장병이 없었으되 모두 불사신(不死身)이 되어 돌격과 격투를 앞뒤에서 세 차례에 걸쳐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모두 인마(人馬)와 같이 가을 하늘아래 쓰러지고 마니 낙엽이 날아들어 그 위를 가리는 것이었다. 적이 다가오자 일단 쓰러졌던 그는 다시 일어나서 적 두 사람의 목을 베고 그대로 진중에서 죽었다. 적병들이 크게 놀라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으며 이날의 적의 사상자도 또한 많았다.

3) 전공에 대한 포상

 조정에서는 장사진의 용전(勇戰)을 가상(嘉賞)히 여겨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추서하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추증하였다. 그리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의 녹권이 내려졌다. 적은 이 일전 이후 감히 경솔하게 출진하지 못하고 방어에만 전념하였고, 군위 경계의 백성들은 편안히 거주하였으니 이는 모두 그의 공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난중잡록』과 『선묘중흥지』 두 책의 내용이 거의 같으나 『난중잡록』은 장사진을 ‘인동향병’이라 하였고, 또 증직으로 ‘통정’만 있다. 반면 『선묘중흥지』에는 출신지명 없이 ‘향병장사진’이라 하였고, 그 대신, ‘군위교생(軍威校生)’이라 하였으며, 내용 가운데 ‘賊斷一臂, 獨以一臂奮擊’이란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증직은 ‘수사(水使)’ 즉 ‘수군절도’로 추증되었고 ‘통정(通政)’이란 품계(品階)는 없다. 그러고 『선무원종공신녹권』 <18쪽 6행>에는 을량선무원종공신2등(乙良宣武原從功臣二等) ‘판관(判官) 장사진(張士珍)’으로 녹권이 내려졌다.

 문헌을 검토한바 장사진의 진몰(陣歿)하던 모습을 『선묘중흥지』 <권3>에서는 “賊斷其一臂로되 獨以一臂奮擊”이라 하였으나 여기서는 이형석(李烱錫)이 취한 『난중잡록』 <권1>의 “力詘被害”의 뜻을 취하였다. 인동 부근 싸움이 1592년 9월 20일과 9월 30일 두 차례만이 아니고 그의 동생 장사규(張士珪)가 전사하던 싸움을 비롯하여 6월부터 11월에 이르는 사이에 그가 전사한 뒤에도 많았던 모양이지만 문헌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부득이 생략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에도 “화살이 떨어지자 육박전을 벌였다. 한 쪽 팔이 잘렸는데도 쓰러지지 않고 남은 한쪽 팔로 계속 분발하여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전사하였다.[矢盡手搏賊斫一臂, 猶不什, 以一臂奮擊, 未已遂死]”라고 하였고, 『징비록』에도 “賊擊斷士珍一臂 士珍獨以一臂奮擊未已, 遂死.”라고 실록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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