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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사진 의병장 유적지(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군위교생軍威校生 장사진張士珍 수성장守城將의 전사戰死(1)
Ⅰ. 머리말
“국가가 어지러우면 충신이 나온다[國家昏亂有忠臣]”라고 하였듯이 평소에는 충신(忠臣)의 구별이 확실치 않으나, 일단 나라에 변란이 일어날 때 비로소 충신의 진가(眞價)를 알아낼 수가 있다. 『예기(禮記)』 <유행편(儒行篇)>에도 “국가에 환란(患難)이 있을 때 나라를 잊지 않는 사람은 충신이다.[臨患不望國忠也]” 하였고, “충신은 자기 자신보다 먼저 임금[국가]을 생각한다[忠臣不先身後君]”라고 하였다.
우리 민족사상 유사(有史) 이래 가장 처참하였던 임진왜란 7년(1592~1598)간의 전쟁에서 자기의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여기고, 국난을 위해 전장에서 목숨을 바친 이가 있으니, 이것은 평소의 수양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재간(才幹)은 있어도 명운(命運)이 없어 전쟁터에서 왜군에게 전사하였으니, 이분이 군위 교생 ‘장사진(張士珍)’ 의병장이다.
선비가 붓을 던지고 화살과 총칼을 들고 전쟁터에서 20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 죽음은 장졸(將卒)과 향민들 모두 애석해하는 바였다.
의병을 창의(倡義)한 정신은 반드시 스승으로부터 이어받은 인의(仁義)의 가르침이 있을 것이다. 당나라 사상가 한유(韓愈, 768~824)는 <사설(師說)>에서 “옛날의 학자는 반드시 스승이 있었다. 스승은 도(道)를 전하고, 업(業)을 주고, 의혹을 푸는 까닭이다.[古之學者, 必有師, 師者所以, 傳道, 授業, 解惑也]”라고 하였으니 장(張) 장군의 스승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을 급문록(及門錄)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먼저 장사진 장군의 스승인 여헌 장현광 선생과, 장사진 장군의 임진왜란의 전공을 기록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장사진 장군의 스승, 장현광(張顯光)
장현광의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장령(掌令) 수(脩)의 6세손이다. 문장과 도덕으로 세상에 존숭을 받았다. 여러번 조정의 부름을 받아 벼슬이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뒷날 영의정(領議政)으로 증직되었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동낙(東洛)서원에 제향됐다. 1554년(명종 9)에 태어나 1637년(인조 15) 세상을 떠났는데 춘추는 84세이었다. 저서는 『역학도설(易學圖說)』과 『문집』이 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을 발취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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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헌 장현광 선생 |
| 1596년(선조 29) 3월 25일 기사에 “전 보은현감 장현광은 본래 가문의 조행(操行)이 있고, <주역>에 정통하였으며 참된 선비이다. 또 학행에 있어서 영남지방에서 명망이 있었다.” 그리고 상촌 신흠(1523~1597)이 아뢰기를 “신이 들은 바로는 영남에 장현광이 있는데 조야에서 글을 읽는 사람으로 당세에 고사(高士)라고 합니다. 또 임하(林下)에 인물로 장현광 한 사람뿐입니다. 그의 학행이 선비들의 사표가 되기에 충분하니 그를 먼저 발탁하여 등용하면 사람들이 추향(趨向)을 알게 되어 충분히 고무가 될 것입니다.”
인조가 경희궁 자정전(資政殿)에서 인견(引見)하여 이르기를 “이름은 들어본지 오래이다. 꼭 한번 만나서 국사를 논하고 싶어 여러 차례 불렀으나 오지 않으므로 아마도 내가 과실이 많아서 어진 이를 오게 할 수 없는 것인가 하고 자신[주상]을 반성하며 자책할 뿐이다. 이제 만났으니 매우 반갑다.”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늙고 병들어서 산야에 물러가 있었는데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행재소(行在所)에 가려고 하였으나 병이 깊어서 조금씩 전진하여 이제야 대궐에 왔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은명(恩命)을 내려 풍헌(風憲, 지방관)의 직임에 발탁해 주시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1624년 3월 공조참의로 제수하였으나 사직하는 소의 내용이 “<역경>에 천도(天道)는 차[滿]는 것을 줄이고, 지도(地道)는 차는 것을 변경하고, 귀신(鬼神)은 차는 것을 해치고, 인도(人道)는 차는 것을 미워한다.” 하였습니다. 상도(常道)에 있어서 차야 할 것이 차는 것도 천지와 귀신과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맞지 않는 직위, 공로가 없는 상(賞), 분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해 4월 13일 장현광이 소장(疏狀)을 남겨두고 돌아왔다.
이튿날 장현광은 패초(牌招:주상이 승지를 시켜 부르는 것) 에 응하지 않는 자신을 탓하는 상소를 올려 “신은 손상(損傷)이 이미 쌓이고 원기(元氣)가 다해 가는데 이것이 신이 사진(仕進)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4월 16일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아뢰기를 “장현광은 평소에 병이 많아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해 8월 28일 이후 이조참의, 동부승지, 형조참판, 대사헌, 부호군, 경상좌우도 호소사, 이조참판, 호조·공조판서, 우참찬이 계속 관직이 내려졌다. 인조 13년(1635년) 8월 11일 장현광이 나를[주상] 보려고 하지 않는가 하니 정온(鄭蘊, 1569~1641)이 아뢰기를 “현광은 나이가 80이니 멀리 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1636년 7월 20일 소명을 받고 올라오던 중 함창현[상주]에 이르러 병이 나서 올라가지 못하고 그의 아들 장응일(張應一, 1599~1676)을 시켜 상소하였는데 상이 병세를 하문하고 호초(胡椒)와 납약(臘藥)을 하사 하였다. 다음해 9월 15일 전 의정부 우참찬 장현광이 돌아가셨다. 소식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장현광은 바르고, 어질고, 겸손하고, 검소하여 옛 사람의 풍도가 있었는데 이제 문득 졸하니 매우 슬프다.” 하고 이어서 장사를 치를 물건을 넉넉히 주어 장사 지내게 하라고 명하였다.[訃聞, 上曰:“張顯光, 端良謙儉, 有古人之風, 今忽卒逝, 予甚悲悼.” 仍命優給喪需以葬之.]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살펴보면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져도 부임하지 않고 사직상소를 올리는 것을 볼 때 진정한 선비의 진퇴(進退)의 지조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82세의 노구에도 주상의 부름에 올라가는 도중에 병이 나서 아들을 대신 보내 상소를 올려 자신의 뜻을 전달했음은 신하의 도리를 다한 것이다.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음은 사환(仕宦)보다는 학문을 중시했으며, 특히 어려운 역학과 성리학에 전심하여 저술을 남겼음을 볼 때 단량공검(端良恭儉)한 학자의 풍도가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