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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도의 고기잡이(출처 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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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청어(靑魚)에 대한 인식과
과메기의 어원(語源)에 대한 연구(2)
이재봉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포항)
III. 청어에 대한 기록
서양에서 청어가 인쇄물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서기 240년대이다. 3세기 로마의 역사가 솔리누스(Solinus)는 스코틀랜드 헤브리디스 제도 사람들이 ‘생선과 우유로 먹고 산다’고 묘사했는데, 그 생선이 바로 청어였다. 오메가 3가 풍부한 이 생선이 유럽인들의 기근을 해결해주며 그들의 주식(staple food)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청어는 코펜하겐과 암스테르담과 같은 항구 도시들을 건설하게 했고 오늘날 EU와 비견되는 이른 바 한자동맹(the Hanseatic League)시대를 열었다.
성서시대 이후 최고의 신학자라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죽음이 임박했을 때 제자가 “선생님, 기운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무엇을 드시고 싶은지요?”라고 여쭈었다. 이 위대한 성인은 “싱싱한 청어가 먹고 싶구나.”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와 같이 서양에서 청어가 일찍부터 기록되었고 중세의 유럽역사를 바꾸고 전쟁을 일으켰을 정도였던 반면에 우리나라 청어는 이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되기 시작했고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그러나 폭넓게 세상에 스며들었다.
1. 『태평광기(太平廣記)』와 『본초강목(本草綱目)』
청어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어림(語林)』, 『세설(世說)』, 『서경잡기(西京雜記)』와 『유양잡조저의(酉陽雜俎䱉議)』 출처의 청어 이야기들이 나온다. 개괄적인 상황은 서경잡기에, “또 오후(五侯)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해서 빈객들이 오후가(五侯家)를 두루 내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루호(婁䕶)는 뛰어난 언변으로 이들을 설득하고 두루 잘 지냈다. 이에 오후들이 각각 루호를 부르며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특이한 고기(鮮)들을 가져왔다. 루호가 이를 합쳐서 청이 되었다. 세상에서는 이를 오후청이라고 부르는데 그 맛이 뛰어났다(又五侯不相能賓客不得往來䕶豐辭辯傅㑹五侯問各得其心競致竒膳䕶乃合以為鯖世稱五侯鯖以為竒味焉出西京雜記.”라고 잘 정리되어 있다.
루호가 먹은 청어는 젓갈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은 유양잡조저의에 “양(梁賀季)와 유효의(劉孝儀)가 ‘청어 젓갈(청자)’을 먹고 말했다. 오후구백(五侯九伯)이 이제 원정을 마쳤을 때 왜의 사신 최할(崔劼)과 이건(李騫)이 앉아 있었다…(梁劉孝儀食鯖鮓 曰五侯九伯今盡征之 魏使崔劼李騫在坐劼曰…)”라는 내용으로 파악할 수 있다.
위와 같은 기록을 볼 때 필자는 루호는 오후가 보낸 특이한 고기들을 청어 젓갈(鯖鮓)에 모두 섞어서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세설에는 “혹은 루호가 오후들을 감화시켰는데 이는 그가 편식하지 않고 오후들이 보낸 것들을 합해서 먹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만든 음식이 ‘청’이었다고 한다(或云䕶兼善五侯不偏食故合而為之鯖也出世說).”고 기술되어 있다.
『어림(語林)』은 이와 관련된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루호의 자(字)는 군경(君卿)인데 그는 오후가를 내왕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오후가는 각기 매일 아침에 음식을 보냈는데 군경이 어느 날 좋은 음식도 매일이니 물리어서 시험삼아 청어젓갈을 섞어서 먹어보았다. 그 맛이 매우 뛰어나서 이후 사람들은 이를 오후청이라 부르며 군경에 의해서 생겼다(婁䕶字君卿歴游五侯之門每旦五侯家各遺餉之君卿口壓滋味乃試合五侯所餉之鯖而食甚美世所謂五侯鯖君卿所致)” 라고 오후청의 생성 배경을 설명했다. 오후들이 보낸 음식들을 청어 젓갈과 섞어서 먹었고 오후가 이에 감화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청어靑魚(鯖)’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먼저 출현했지만 사실 민물고기였으며 젓갈로 만들어 먹었다는 것이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하다. 이시진(李時珍)은 “청(靑)은 청(鯖)으로도 쓰는데, 색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큰 것은 누어(䱾魚)라고 한다.”라고 하였다(時珍曰: 靑亦作鯖, 以色名也. 大者名䱾魚). 또한 소송(蘇頌)의 말을 인용해서 “청어는 강과 호수에서 살고, 남쪽 지역에 많다. 북쪽 지역에도 더러 때때로 있고, 아무 때나 잡는다. 잉어나 환어(鯇魚)와 비슷하지만 등이 짙푸른 색이다. 남쪽 지역에서는 많은데 젓갈을 만들어 먹는다. 옛사람들이 ‘오후청(五侯鯖)’이라고 말한 것이다. 대가리 속에 있는 침골(枕骨)은 푹 쪄서 햇볕에 말리면 모양이 호박(琥珀)과 같아진다.”라고 하였다. (頌曰: 靑魚生江湖間, 南方多有. 北地時或有之, 取無似 鯇而背正青色, 南方多以作鮓 古人所謂五侯鯖 卽此, 其頭中枕骨蒸令氣通, 曝乾狀如琥琯).
위와 같이 『본초강목(本草綱目)』도 청어는 젓갈을 만들어 먹는 민물고기이며 옛 사람들이 그 젓갈을 오후청이라 불렀다고 했다. 오후들은 서로 경쟁하고 질투하며 싫어했지만 언변에 능한 루호를 모두 좋아해서 자기들이 별미식(別味食)을 먹어보라고 했을 지도 모른다. 루호가 이 음식들을 청어젓갈에 전부 섞어 먹었더니 오후들이 처음에는 놀랐으나 결국 감화되었을 것으로 본다. 상기에 언급한 “로후가 젓갈을 합해서 먹어서 오후들을 감화시켰다.”는 세설(世說)의 내용이 이 같은 추측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오후가 감화되었다는 것은 오후들 사이의 ‘갈등(葛藤)’이 ‘화해(和解)’로 반전되었음을 의미했다. 오후가 보낸 음식들을 루호가 청어젓갈에 골고루 섞어 먹은 것이 오후청(五侯鯖)이 되었고 이것이 이후 화해의 상징이자 산해진미(山海珍味)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추정한다.
2. 『동의보감(東醫寶鑑)????과 조선삼대어보(朝鮮三大魚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청어가 강이나 호수에 산다. 잉어와 비슷하되, 등이 새파랗다(靑魚生江湖間, 似鯉統, 而背正靑色).” 라고 『본초강목(本草綱目)』를 인용했지만 “우리나라의 청어는 아니다(非我國之青魚也).”고 했다.
『우해이어보(牛海離魚譜)』의 저자 김려(金鑢)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상기 내용을 인용하면서 “진청(眞鯖)이 청어이다. 길이는 1자 5치이고, 맛은 달고 연하며 구워서 먹으면 무엇보다도 맛이 있으니 참으로 진귀한 물고기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주의 청어가 제일이라고 한다. 한나라 때 오제후(五帝侯)들이 매우 호걸스럽고 귀하게 잘 살았는데, 청어를 즐겼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귀한 물건을 ‘五侯鯖’이라고 했다.
선대의 유학자들은 청어를 해석하기를 ‘자어(炙魚)’(鯖魚也, 長一尺五寸. 味甘輭, 炙食絶佳, 眞珍品也. 東人以海州鯖魚爲第一, 漢時五侯甚豪, 貴鯖魚, 後人以物之貴者, 爲五侯鯖. 先儒釋鯖魚爲炙魚).”라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청어가 진품 청어라고 강조했다.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도 정약전(丁若銓)은 ”본초강목의 청어는 강과 호수 사이에 태어나 머리 속의 심골(枕骨) 모양이 호박(琥珀)과 같고, 잡는 데 때가 없다고 되어 있다. 즉, 지금의 청어가 아니다. 그 빛깔이 푸른 점에서 우선 가칭한 것이다(本草綱目, 靑魚生江湖間, 頭中枕骨, 狀如琥珀, 取無時, 則非今之靑魚也. 今以其色靑, 故假以名之也).” 라고 인용하며 본초의 청어가 민물고기이며 우리나라의 청어가 아님을 명확히 했다.
서유구(徐有榘)도 『전어지(佃漁誌)』에서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나오는 중국의 민물 청어를 보다 자세하게 언급하면서 “우리나라의 청어는 이와는 다르니, 강이나 호수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겨울철에 關北의 해양에서 나서, 겨울 끝에서 초봄에 이르기까지, 동해를 따라 남쪽으로 영남의 먼 바다에 이르러 더욱 많이 생산된다. 다시 서해로 돌아 황해도의 해주 앞바다에 이르면, 더욱 살이 찌고 맛있어진다(我國青魚異於是, 不産江湖間. 冬月産關北海洋, 冬末春初, 循東海迤, 南至嶺南海洋, 其産益繁. 又迤西, 至海西之海州前洋, 則更益肥美).” 라고 우리나라의 바다 청어와 차이를 분명하게 강조했다.
이처럼 『동의보감(東醫寶鑑)』과 조선삼대어보(朝鮮三大魚譜)도 『본초강목(本草綱目)』을 공통적으로 인용하면서 우리나라의 청어가 중국의 청어와 다른 바다 물고기라는 사실을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강조하며 ‘조선어(朝鮮魚)’임을 명확하게 기술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