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수
I. 시작하면서
우리지역의 현존하는 금오산(金烏山)의 유산기는 몇 편이 있지만 380여 년전 이곳 구미 선산김씨 가문의 삼매당(三梅堂) 김하천(金廈梴) 유산록이 가장 오래 되고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우선 삼매당의 유산기를 살펴보면,
고아읍 평성(들성) 마을에서 남쪽으로 마주하게 되는데 눈뜨고 소요하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산이 금오산이다. 동행한 와유당 박진경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해평면 괴곡리에서 누대를 세거하여 온 집안으로 언제나 남서쪽으로 시야에 금오산이 들어와 조망할 수 있다. 평성리와 괴곡리는 낙동강의 양안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선대 진락당(眞樂堂) 김취성(金就成)과 용암(龍巖) 박운(朴雲) 선생은 저녁에 등불을 들고 동서로 마주 보며 신호를 하여 서로의 안부와 무사함을 알렸다.
이와 같이 두 집안은 누대를 걸쳐 재지사족으로 불과분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돈독하였다.
유산록의 기록을 보면 함께 동행한 것도 그동안 조망하던 금오산을 바라보면서 친목을 도모하고 부자간의 우의를 앞세워 유산하고 기록하였다고 본다. 그 외에 수행한 사족들은 총 13인으로 일선김씨, 덕산황씨, 신천강씨, 밀양박씨, 전주최씨, 벽진이씨 가문의 지역 사인으로 가을날의 금오산을 유람하였다. 유산록의 기록은 삼매당문집에 수록되어 있어 그 기록을 열어 보기로 한다.
Ⅱ. 금오산유산록(金烏山遊山錄)
1. 유금오산록(遊金烏山錄)
지금부터 약 380여년전에 삼매당 김하천이 남긴 금오산의 유산록을 살펴보면 그 기행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남(嶺南)의 산수 아름다움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마는 선산(善山)도 역시 큰 고을이라 그 주(州)의 진산(鎭山) 금오산(金烏山)은 기형궤상(奇形詭狀)이 모든 산에서 으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놀면서 구경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다투어 달려오기를 개골산(皆骨山, 金剛山)과 같았다. 금년 봄에 와유당(臥遊堂) 박공(朴公)이 나의 부친(父親)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금오산은 명산이고 또 길야은(吉冶隱) 선생께서 학문을 닦던 곳이다. 이 산이 이 고을을 둘렀는데, 내 이 고을 사람으로 나이 이미 육십에도 아직 한 번 올라 간직한 뜻을 풀지 못했더니 지금 봄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구경하기 꼭 알맞으니 원하건데 우리 형(兄)과 함께 가서 노경(老境)에 좋은 일을 만들어 보세.” 하니 집의 부친께서 답장을 하여 나의 뜻과 같다고 하셨다. 중춘(仲春)에 신발을 동여 맬 시기를 잡았더니 와유공(臥遊公)이 유고(有故)가 있어 실행하지 못했고 가을에 와서 시기를 잡으니 구월(九月)에 함께 오르기로 하였다.
십일일(十一日) 임인(壬寅)에 양식(糧食)과 염장(鹽醬)을 싸가지고 대혈사(大穴寺)에 모였으니 집에 부친과 와유공(臥遊公)이 앞장을 서고 수행하는 사람들은 김여담(金汝膽), 황중견(黃仲見), 강지술(康之述), 박통언(朴通彦)과 호언(浩彦), 김대임(金大任)과 중임(重任), 김명부(金明夫)와 중인(仲仁), 최학보(崔學甫), 공위여(孔威如), 이관경(李冠卿)과 장경(長卿)이였다.
절이 산 아래 있어 평전(平田)이 아니고 깊숙하니 야은(冶隱)선생이 거닐고 쉬던 곳이다. 절 뒤에 푸는 대나무가 천 길이나 치솟아 쭉 늘어 섰으니 세상에서는 야은 선생이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한다.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이 일찍이 여기에 놀러와 야은선생이 지은 시운(詩韻)을 따서 시를 지으니 “대나무는 지금도 푸르고, 산은 옛처럼 높구료, 맑은 바람 지금도 머리를 날리니, 누가 고인(古人)을 일러 아득하다 하느뇨”하였다. 그 시를 읽고 그 땅에 나아가니 공경(恭敬)하고 사모(思慕)함이 마치 선생의 언성(言聲)을 듣는 듯하였다.
옛날에 야은(冶隱)선생을 위하여 서원(書院)을 골 어귀에 지었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으니 토척(土瘠)하여 계속 지키기 어려워 낙동강(洛東江) 위에 남산(藍山) 모퉁이에 이건(移建)하였다한다. 절과 서원(書院)터가 모두 연속(連屬)하였고 시냇가에 함벽루(涵碧樓)의 옛터가 있는데 어느 해에 창건(創建)하여 어느 대에 없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술과 안주를 가져와 밤 새 마시고 끝났다.
계묘일(癸卯日) 아침 해가 처음 솟으니 절을 나서서 우러러 본즉 붉고 푸르름이 서로 어우러졌고 암봉(巖峯)이 빼어남을 자랑하여 귀신(鬼神)이 어루만저 동서(東西)가 아득하고 천태만상(千態萬狀)이 아름답게 단장하고 곱게 꾸며 나의 눈에 들어오니 서로 손뼉을 쳐서 가리켜 보이니 몸이 가벼워 발걸음이 날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마침 비파(琵琶)를 가진 자가 찾아와서 함께 술을 마시고 비파소리를 들으니 마치 그 소리가 갱연(鏗然)하여 유흥(幽興)을 돋구기에 함께 가자고 하였더니 연고가 있다고 사양하였다.
어른 아이 십오인(十五人)이 개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이상함을 만나면 곧 물어보곤 하였다. 바위가 넓어서 앉을 만한 곳도 있고 물결이 휘감아 돌아 목욕을 할 곳도 있었다. 스님이 말하기를 이곳을 욕담(浴潭)이라하니 나의 문조(門祖) 욕담공(浴潭公)이 이곳을 취하여 자호(自號)한 것인데 미루어 지난 자취를 생각하니 슬퍼 눈물이 핑 돌았다. 바라보니 흰 무지개가 두 골짜기를 가로질러 뻗은 듯 한것은 외성(外城)인데 성문(城門)에 흰 글씨로 써 붙인 것은 「大惠門」이니 그 또한 백성들에게 사혜(思惠)함이 크다는 뜻이겠지? 성안에 창고(倉庫)가 있으니 이름은 문 이름과 같고 창고 앞에 마을이 있으니 이름은 창고와 같았다.
절이 창고 왼쪽에 있어 화암사(華巖寺)이고 바위가 오른쪽에 있어 용각암(龍角巖)이요 물이 백척(百尺)을 날아서 중천(中天)에 떨어지는 것은 폭포(瀑布)이다. 화암사를 등지고 폭포를 바라보며 깍아 만들어 병풍(屛風)처럼 둘러 선 것은 위벽(危壁)이요 벽허리에 궤이(詭異)한 굴이 있으니 도선굴(道詵窟)이다. 바위를 자른듯한 이상한 자취는 기묘하게 눈을 휘둥글게 하고 험준(險峻)하여 몸을 숨길 만하니 임진년(壬辰年)에 집 부친(父親)이 문족(門族)들과 함께 병화(兵禍)를 피하였던 곳이다. 여기에 도착하니 금오산(金烏山) 일면(一面)을 밟았다. 그 낮은 곳이 이와 같으니 높은 곳을 알겠고 한 면이 이같으니 삼면(三面)을 알 수 있겠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비탈길을 밟아 열 걸음에 한 번은 쉬어 용각암(龍角巖)에서 쉬니, 용각(龍角)이라 함은 암석이 우뚝히 솟아 나와 용의 뿔과 같은 것으로 이름한 것이다. 바위 위에 흩어져 앉아 가을 이슬을 가득히 따르니 산광(山光)과 풍영(楓影)이 흉중(胸中)으로 흘러 들었다. 암벽(巖壁)을 잡고 사닥다리를 건너 사이길로 다다르니 암자(庵子)가 자리를 잡았고 돌이 둘러앉아 즐길 만한 곳인데 흘송대(屹松臺)였다.
산나물과 들채소를 섞어 무쳐서 술을 권하는 자는 암자(庵子)의 스님 처한(處閒)이다. 내 붓과 벼루를 구하여 암자의 벽에 이름을 적으니 한퇴지(韓退之)가 혜림사(惠林寺)에서 적은 체(體)를 본 받으니 제우(諸友)들이 괴이(怪異)한 일이라고 나무랬다. 북애(北崖)의 이름을 물어 백운대(白雲臺)의 유허(遺墟)를 알겠고 새로운 단(壇)에서 쉬면서 백성(百姓)들을 편안하게 하였다는 미명(美名)을 들었다.
대를 지나 몇 번이나 구불어졌다가 펴여서 대지(臺地)가 있으니 장차 만든다고 하는데 위에 반석(盤石)이 있어 백명은 앉을 수 있겠다. 여기 올라 바라보니 마음이 눈을 따라 탁 트여 상쾌하게 몸이 반공(半空)에 있는듯하여 가만히 생각하니 세계(世界)가 이미 십만(十萬) 겹이나 가리어 짐을 짐작하겠고 신선(神仙)과 인연(因緣)이 있는 자(者)라야 능히 여기에 이른다는 것을 비로소 믿게 되었다.
대혜문(大惠門)에서 이 대(臺)에 이르기까지 낭떠러지에 부쳐서 길이 뚫렸는데 무릇 구십오(九十五) 구비였는데 앞에 사람은 더욱 잡고 뒤에 사람은 버티고 밟아 진실로 앞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만 보이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밑만 보인다고 할 만하다.
북문(北門)에서부터 들어오니 내성(內城)이었다. 병자 정축년(1636~1637)사이에 이상국(李相國) 원익(元翼)이 만든 것이다. 문안에 만승사(萬勝寺)가 있는데 절이 비어 스님이 없으니 볼 수가 없었다. 성내(城內)에 우물 아홉 개를 파고 절 세 개를 지었다. 서쪽으로 창고(倉庫)가 있고 동쪽에 관아(官衙)를 지었는데 관장(管掌)하여 맡은 사람이 세 명이요 사는 주민은 사십여호(四十餘戶)인데 모두 별장(別將)이 통솔(統率)하니 별장은 이씨(李氏)가 그 성(姓)이요 적(積)이 그 이름이요 자(字)는 영중(盈仲)이었다. 사람을 맞이하고 보낼 때 문밖에서 검문(檢問)을 하고 장대(將臺)에 이르니 또 검문하여 밤에서 아침까지 네 번이나 물으니 매번 물을 때 마다 대답을 하고 또 잘 가십시오 하면 고맙다고 대답하니 그 후덕한 뜻이었다.
대(臺)에는 제승(制勝)이란 현판(懸板)이 걸려있고 대 뒤에는 승사(僧寺)를 지었는데 승장(僧將) 덕준(德峻)이 살고 있었다. 문에 나와 맞으며 위로하는 말이 매우 간곡하였다. 밤이 되어 대상(臺上)에 나와 앉아 승장(僧將)을 데리고 와서 함께 앉아 이야기를 하니 이윽고 빙월(氷月)이 떠 올라 빛을 토하니 하늘이 훤히 밝아 왼쪽으로 운산(雲山)을 대하고 오른쪽으로 연사(煙沙)를 바라보니 호호(浩浩)하고 양양(洋洋)하여 흥취(興趣)가 다함이 없었다. 술 자리를 벌여 가득한 잔을 당기다가 베개를 베고 쓰러져 누웠는데 동방(東方)에 해가 이미 솟은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갑진일(甲辰日)에 승장(僧將)에게 앞길을 인도하게 하여 성 서쪽으로 가서 홍문(紅門) 밖을 바라보니 건성문(建成門)이 있었고 건성문 북쪽에 서격대(西擊臺)가 있고 대 아래는 위태로운 암벽(岩壁)인데 밑에 까진 까마득하였고 바위 위에 또 바위가 곁으로 서서 문지방 같은데 바위를 의지하여 붙어서 바라보니 정신이 상쾌하고 청월(淸越)하여 황홀(況忽)히 바람앞에 나뭇잎같이 여겨졌다.
성(城)밖에서 노랫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은 꿀밤 줍는 아낙과 나무하는 총각들이요 골(谷口) 어귀에서 사람소리 요란하게 들리니 늙은이는 지팡이를 짚고 젊은이는 짐을 짊어졌다. 성밖에는 갈항사(葛項寺)가 있고 절 앞에 돌비가 있으니 최학사(崔學士) 고운(孤雲: 崔致遠)이 써 새긴 것이다. 제우(諸友)들이 두루 바라보고 상쾌하여 다시 모든 기적(奇蹟)을 찾지 않으니 크게 유상(遊賞)하는 흠결(欠缺)이었으나 명춘(明春)에 만일 다시 놀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이곳을 먼저 올 것이라 하였다.
서격대(西擊臺)를 떠나 삼십보(三十步)에 가파른 암대(巖臺)가 솟았고 암대를 지나 한 번 내려가고 한 번 올라가니 서봉(西峯)인데 봉상(峰上)에 진영(陣營)을 만들었으니 그 높이가 모든 봉(峰)보다 뛰어나고 돌이켜 지나 온 곳을 바라보니 또한 눈 밑에 있었다. 진영(陣營)의 북쪽에 바위가 있어 올라가 볼 만한데 이름이 없고 바위 북쪽에 대가 있으니 북격대(北擊臺)이다.
새로 쌓은 성(城)은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현월봉(懸月峰) 아래에서 그치니 쌓은 사람은 이군수(李郡守) 각(恪)인데 새 성을 다 쌓고 나서 또 내성을 수선(修繕)하고 사영(四營) 사문(四門)에 누각(樓閣)을 지어 이름을 붙이니 모두 이군수(李郡守)가 지어 정(定)한 것이다.
별장(別將)이 산 아래 산다기에 찾아가 보니 별장이 가을 산의 경치와 성을 쌓기 시작함과 물이 많고 적음과 양곡(糧穀)의 오래되고 새로운 것을 말하고 다시 남봉(南峯)의 아름다움을 말 했으나 가보지는 못한 것이 한(恨)이였다.
따라온 몇 사람에게 진남사(鎭南寺)에서 아침밥을 준비하게 하여 가서 먹으니 절에 늙은 스님은 희준(熙俊)인데 접대하기를 근관(勤款)하게 하고 객승(客僧)을 데려와 인사를 시키니 이름은 자경(自警)이요 보제사(普濟寺)에 있는 스님인데 보제사는 서문(西門) 밖의 깊숙하고 고요하여 볼 만한 곳이라 한다. 자경(自警)이 시(詩)에 능(能)하였고 금강산(金剛山)의 아름다운 경치를 말하였고 약사(藥師)의 궤이(詭異)한 형상(形狀)을 칭도(稱道)하니 매우 무던한 스님인 듯 하더니 별장이 와서 사례(謝禮)하고 갔다.
절 오른쪽을 따라 오르니 장차 약사암(藥師庵)을 보려는 것이다. 성내(城內)에서부터 봉(峰)에 올라 그 고하(高下)를 헤아려 보니 사분(四分)의 이(二)는 되는데 북서남(北西南)이 눈 아래에 있었다. 암상(巖上)에 승장(僧將)과 함께 앉아 지팡이를 가리키며 말 하기를 장대(將臺)의 뒤에는 무슨 성인가? 하니 옹성(甕城)이요 하고 옹성(甕城)의 머리에는 무슨 대(臺)인가? 하니 격대(擊臺)라 하고 남문(南門)은 무슨 이름인가? 하니 대양문(大陽門)이라 하였다. 대양문 위가 곧 남영(南營)이고 남영 앞이 군기(軍器)이고 군기의 동쪽에 격대(擊臺)가 있고 격대 곁에 절벽(絶壁)이 있으니 남(南)에서 본 것이 북(北)과 같은데 그 기이(奇異)하고 아름다움은 항상 서로 겨루었다.
절벽을 잡고 붙어 오르니 절벽이 끝나 봉(峰)이 다하였다. 봉상(峰上)에 또한 대를 만들었으니 봉은 약사봉(藥師峰)이요 대(臺)는 공원대(控遠臺) 였다. 이 봉(峯)이 산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모든 봉보다 제일 높으니 내 일찍 집에 있으며 우러러 보면 퍼렇게 우뚝하여 높으기가 다른데 사양(辭讓)하지 않는 것이 이 봉(峯)이다. 봉이 가장 높으기 때문에 눈이 더욱 넓어져 모든 산이 와서 조회(朝會)하여 형세가 별들이 공읍(拱揖)함과 같고 두 시내가 가로 흘러 모양이 실을 갈라 놓은듯 하였다. 사면을 돌아 보아 나의 눈이 모자라니 참으로 유자(柳子: 柳成龍)가 말한 “尺寸에 千里를 한 곳에 모아 포개여 쌓았다”함과 같았다.
내 말하기를 이 대(臺)에 올라와 서방(西方)끝을 바라보아 그 이름을 알지 못하면 초동(樵童)들이 보는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니 자뭇 능숙하게 지시를 하는즉 「이 산이 야중(野中)에 우뚝 솟아 산맥(山脈)이 태백산(太白山) 줄기에 연(連)하여 크지는 않아도 기이(奇異)하고 높이는 멀리 주부(州府)를 바라 볼 수 있으니 북쪽에 있는 것은 문경(聞慶)과 상주(尙州), 용궁(龍宮), 비안(比安)이고, 동쪽에 있는 것은 군위(軍威)와 인동(仁同), 칠곡(漆谷), 대구(大丘)이고, 남쪽에 있는 것은 성주(星州)와 고령(高靈), 합천(陜川)이고, 서쪽에 있는 것은 개령(開寧)과 김산(金山), 지례(知禮)라 한다.」
무릇 이 여러 고을의 토양(土壤)이 모두 궤석(几席) 밑에 있으나 각각 높으게 주진(州鎭)을 삼은것이 있으니 문경(聞慶)은 주흘(主屹)이요 상주(尙州)는 사불(四佛)과 만경산(萬景山)이다. 이백(二白, 小白 太白)이 둘러 여러 고을의 진영(鎭營)이 되고 팔공산(八公山)이 팔주(八州)의 진전(鎭殿)으로 뻗쳐 있고 인동(仁同)의 천생산(天生山)과 칠곡(漆谷)의 가산(架山)이요 남서(南西)에는 가야산(伽倻山)이요 서쪽에는 지리산(智異山) 또는 서북(西北)으로 속리산(俗離山)이다. 큰 것은 형제(兄弟)와 같고 작은 것은 자손(子孫)과 같으며 어떤 것은 비단병풍(緋緞屛風)을 좌우에 나누어 벌려 놓은듯 하고 어떤 것은 동이와 항아리가 앞 뒤로 섞여서 떨어진 듯 하며 어떤 것은 기이(奇異)하고 어떤 것은 험준(險峻)하여 어떤 것은 밝고 어떤 것은 어두웠다.
선산(善山)에 있는 산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은 서면(西面)의 복우산(伏牛山)과 해평(海平)의 조계산(曹溪山), 신곡(新谷)의 냉산(冷山), 새재(鳥嶺)를 넘어 어렴풋이 눈을 가리고 가야산(伽倻山)을 넘어 남쪽은 우주(宇宙)의 기운(氣運)이 아득히 막혀 바라는 눈이 모자라 다시 환희 볼 수가 없었다.
봉(峯) 아래에는 약사봉(藥師峯)이 있는데 암벽(岩壁)이 위태롭고 바위가 험준(險峻)하여 속세(俗世)에선 능히 이르지 못하니 어렵게 석문(石門)을 지나 곁으로 들어 가니 한 칸밖에는 다시 여지(餘地)가 없었다. 암자의 오른쪽에 바위가 있는데 가운데가 갈라져 마치 늙은 도사(道師)의 버린 지팡이 같았는데 스님이 말하기를 약사의 지팡이인데 이 암자에 내려 오다가 버린것이라 하나 그 말이 허탄(虛誕)하여 믿을 수는 없으나 그 형세(形勢)를 보니 마치 귀물(鬼物)이 만들어 둔 듯하였다.
바위 사이에 돌호박이 있고 탑(塔)위에 석불(石佛)이 있었다. 그 아래에 돌적암(湥寂庵)이 있는데 스님에게 물으니 폐(廢)하여 수복(修復)하지 못한지 오래이라고 한다. 돌아서 석문을 나와 약사암(藥師庵)에서 한번 돌아 다시 북문(北門)위에 솟아 오른 것은 현월봉(懸月峰)인데 약사봉과 마주 우뚝서서 높이나 기묘(奇妙)함을 서로 양보하지 않았고 봉(峰)뒤에 신선사(神仙祠)가 있으니 성중(城中)의 사람들이 춘추(春秋)에 제사(祭祀)를 모시던 곳이다.
봉(峰) 오른쪽을 따라 암문(暗門)을 나와서 새성(新城)을 따라 또 암문을 들어서니 암자(庵子)가 날아 갈 듯 서 있는 것이 보봉사(普峰寺)였다. 등에는 현월봉(懸月峰)을 지고 앞에는 낙동강(洛東江)의 흐름을 내려다 보니 우러러 선계(仙界)와 같고 가보면 신선(神仙)의 정취(靜趣)가 있거늘 여러 절과 비교하여 보면 가장 아름다웠다. 늙은 회(檜)나무 구름 속에 솟았으니 절개(節介)가 가상(可尙)하고 남아 있는 국화(菊花) 서리를 맞았으니 지조(持操)가 사랑스럽다.
푸른 낭떠러지를 굽어 돌아 걸음이 망원대(望遠臺)에 이르니 승장(僧將)이 여기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스님에게 앞길을 물어 빠르고 가까운 길로 질러가니 따르는 자가 다섯 사람이였다. 사닥다리 같은 위태로운 바위의 가운데가 갈라진 곳을 겨우 통하여 앞에선 당기고 뒤에선 밀어 어렵게 어렵게 내려오니 참으로 말할 수 없이 기묘(奇妙)한 곳이었다.
성을 의지하여 조금씩 나아가 동포루(東砲樓)에서 쉬었다가 암문(暗門)을 나와 내려와서 동양사(東陽寺)에 이르니 스님 축선(竺宣)이 가을 배(霜梨)를 가득 내어 놓아 다투어 먹고 나니 갈증이 해소되었다. 절의 정취는 보봉사(普峰寺) 보다 못하지만 넓직한 골짜기의 그윽한 취향(趣向)은 또한 다른 절과 비교 할 수 없었다. 절 뒤에 해송(海松)이 많아 이곳 사람들이 취(取)하여 관노(官奴)에 보충(補充)하였다고 한다.
골짜기 길을 따라 아홉 번은 앉고 열 번을 쉬어 돌아 와 대혈사(大穴寺)에 들어가니 임인일(壬寅日)부터 갑진일(甲辰日)까지 무려 삼 일이었다. 내성(內城)을 따라 동양사(東陽寺)까지 거의 사십여리(四十餘里)였는데 문득 가슴이 후련하고 정신이 호광(浩廣)함을 깨달아 다시 여러 스님을 대하였으니 마치 옛날에 내가 아닌 듯 하였다. 다시 몇 일 동안 본 것을 마음속에 모아 묵묵히 상상(想想)한 것을 말한다.
기이(奇異)한 것은 그 기이(奇異)함을 다하였고, 장대(壯大)한 것은 그 장대(壯大)함을 보여 단엄(端嚴)하고 장중(莊重)한 것은 마치 지키는 것이 있는 것 같았고 웅장(雄壯)하고 과감(果敢)한 것은 마치 믿는 바가 있는듯 하였고 두각(頭角)을 쭈구려 숨기는 것은 두려워 함이 있는 듯 하였고 어긋나서 서로 등지고 있는 것은 마치 거만함이 있는듯 하였고 또 삼대(三代)의 망주(望主)가 높이 앉아 공수(拱手)하여 의상(衣裳)을 드리우고 있으면 사이(四夷)와 팔만(八蠻)이 분주하게 다가와서 대왕(大王)으로 삼은 것 같으며 육국공자(六國公子)가 시도(市道)를 내려오면 삼천유사(三千遊士)들이 선후(先後)로 달려 가는것과 같으며 전국(戰國)때에 나라가 어지러우니 모신(謀臣) 맹장(猛將)들이 각각 그의 유능(有能)함을 다하여 이름을 당세(當世)에 취(取)하고져 함과 같고, 양한(兩漢: 東漢 西漢)이 와열(瓦裂)하여 판장(判將)과 적신(賊臣)이 각각 일방(一方)에 점거(占據)하여 사교(四郊)에서 공격함과 같은 것도 있고 공자(孔子)가 진채(陳蔡)의 사이에서 허둥거릴적에 쫓아 모시던 칠십자(七十者)와 같은 모습도 있고 맹자(孟子)가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에 오갈적에 따르는 수레가 수백승(數百乘)과 같은 것도 있었다.
대체 이 산의 둘레가 사십오리(四十五里)의 거리에 불과(不過)한데 그 기이(奇異)한 형상(形狀)은 참으로 형언(形言) 할 수 없으니 적은 산이라고 말 할 수 없고 들 가운데 대하였으나 위태로운 형세(形勢)가 높이 창공(蒼空)을 뚫었으니 야산(野山)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공경(恭敬)하여야 하고 사모(思慕)하여야 하고 근선(勤善)하여야 하며 징악(懲惡)하여야 하니 참으로 스승으로 여길만하고 참으로 경계(警戒)하여야 할만하다.
이것이 한 산의 가운데에서 보양(補養)하고 감발(感發)함이 이같으니 그 적은 산 야산(野山)이라고 소홀히 여기겠는가 ! 하물며 더욱 높으고 더욱 굳은 채미(采薇: 伯夷 叔齊)의 유풍(遺風)이 있으며 이미 두텁고 이미 무거운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통서(統緖)를 이으니 이선생(二先生: 冶隱, 旅軒)의 절의(節義)와 도덕(道德)을 이 산과 비교하면 또한 방불(彷彿)하게 그 하나의 단서를 얻으리라.
아 ! 이 산이 만약에 중국(中國)에 있었다면 마땅히 수양산(首陽山), 무이산(武夷山)과 함께 전후(前後)로 아름다울 것이고 지주(砥柱)와 백록(白鹿)이 굳건하게 고금(古今)에 우뚝하여 후세(後世)들이 경앙(景仰)하는 지경이 될 것인데 어찌 머리 깎은 스님들의 도피(逃避)하여 모인곳이 될뿐이리요.
통언(通彦)과 호언(浩彦)이 와유공(臥遊公)을 모시고 원당(元堂)으로 돌아가고 나도 부친(父親)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고 여러 친구들도 흩어져 돌아갔다. 이윽고 뜰 앞을 지나니 부친께서 너 유산록(遊山錄)을 지었느냐 ? 하시니 내 못하였습니다. 하였더니 너는 쓰지않으면 안된다고 하시기에 물러나와 기록(記錄)하였다. 이 유산록(遊山錄)이 계미년(癸未年, 인조 21, 1643) 가을에 이루어지니 대게 부친의 명(命)에서이다. 와유당(臥遊堂) 박공(朴公)이 손수 유산록(遊山錄)을 지어 집에 부친에게 보냈으니 한 권의 책에 모아 후일(後日)에 추상(追想)하는 자료(資料)로 삼고져 하니 또한 박공(朴公)의 뜻이었다.
마침 제우(諸友)들이 유산록을 짓지 않았기에 상자속에 간수하여 두었더니 지난 갑신(甲申, 1644) 구월(九月) 십일일(十一日)에 선군(先君)께서 불초(不肖)를 버리시니 이 날이 년전(年前)에 유산(遊山)한 날이였다. 황망(慌忙)하고 미란(迷亂)하여 이것을 살필 겨를이 없었더니 을유년(乙酉年, 1645) 여름에 박공(朴公)을 찾아가 절하고 공(公)이 지은 것을 돌려 드리니 공(公)이 슬픔에 잠겨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문자(文字)인가? 때때로 보고져 하여 만들어 자네 어른에게 맡겨 둔 것인데 등산(登山)했던 날이 어찌 자네 부친(父親)이 영원(永遠)히 돌아갈 날이 될 줄 알았으리요. 자네는 한 통을 더 만들어 자네 부친의 뜻에 보답하여 자네가 영원히 사모(思慕)하는 정성(精誠)에 부치지 않겠는가?” 하기에 하천(廈梴)이 눈물을 머금고 공손히 대답하고 여러 벗들이 지은 것을 모아 두 통을 써 가지고 하나는 박공(朴公)에게 드리고 한 통은 집에 간수하여 애통(哀痛)히 사모(思慕)하는 사정(私情)에 부치노라 !
병술(丙戌 25歲, 1646) 중동(仲冬) 초순(初旬)
다음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