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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암풍벽 일대 위성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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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제일승경(淸道第一勝景) 공암풍벽(孔巖楓壁)(3)
- 모성암(慕聖巖) 시문(詩文)을 중심으로
조성재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청도)
Ⅶ. 모성암 시문(詩文)
이제 본격적으로 모성암 시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모성암(慕聖巖)
우러러 보니 더욱 높고 仰之彌高 뚫으려 하면 더욱 견고하네, 鐫之彌堅 무리중에서 우뚝 빼어났으니 出類拔萃 사다리 없이도 하늘을 채웠네, 不階補天 是愚居士書 与崔君贊夫 聖上 二十八年 戊子 四月 日篆 石工 金奉大 時人 兪致龍
이라 새겨져 있다.
이에 대하여 그동안 별다른 자료가 없어 논란 자체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다 2016년 6월 24일 대구일보에 실린 기사가 모성암에 대한 최초의 자료로 남게 되었다. <경주 위덕대, 청도 운문댐 인근 ‘삼국시대 추정’ 옛길 발견>이란 제목의 기사다. 기사를 그대로 옮기면,
경주 위덕대학교 박물관팀이 청도군 운문댐 자락에서 삼국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옛길을 발견해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은 23일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 일대 현장조사 결과 야산 중턱에 길이 890m의 잔도(棧道: 벼랑에 낸 길)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잔도 중간에는 바위 양 측면을 쪼아 석문(石門) 모양의 길이 33m나 이어져 있는 것도 확인했다.
공암리는 운문댐 수몰구역 끝으로 일제 강점기에 산줄기를 돌아가는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이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는 해발 150m 야산 능선의 벼랑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길로 다닌 것으로 보인다. 레이저 거리계측기로 실측한 잔도의 길이는 890m로 운문댐으로 수몰된 구간을 포함하면 1㎞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 관장은 조선시대 이중경(1559∼1678)의 유운문산록(遊雲門山錄)에 ‘길이 바위틈으로 가로질러 통하는데 틈의 길이는 백 척이나 되고 백보 정도 뻗쳤는데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밀양 청도로부터 경주까지 귀하신 분들이 이곳을 경유한다’는 기록을 남겼고, 이는 이번에 발견된 석문을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관장은 “현재 전해지는 1600년대 기록이 가장 오래됐지만 공암 옛길은 신라시대에 경주와 청도를 잇는 최단거리 교통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해발 162m의 암벽에서 조선 순조 때 이 길을 정비했다는 기록이 새겨진 마애비도 발견됐다. 지상에서 4.6m의 바위 표면에 세로 150cm, 너비 100cm 크기로 51자가 새겨져 있다.
모성암(慕聖巖)이라는 제하에 앙지미고(仰之彌高: 우러러보니 더욱 높고), 휴지미견(鐫之彌堅: 뚫으려하면 더욱 견고하네), 출류발췌(出類拔萃: 무리 중에서 우뚝 빼어났으니), 불계보천(不階補天: 사다리 없이도 하늘을 채웠네)라는 문구와 성상이십팔년무자년사월일(聖上二十八年戊子四月日), 시인과 석공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성상 28년 무자년’에 해당하는 것은 조선 순조 28년(1828) 뿐이기 때문에 쉽게 고증할 수 있다.
박 관장은 “마애비는 옛길을 새로 확장 정비한 뒤 순조에 대한 송덕비 형식으로 새긴 것으로 토목공사와 관련한 국왕 송덕비는 아직 예를 찾을 수 없다”며 “아직은 기초조사 단계로 공암 일대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약 20년 전 청도향토사학회 답사에서 모성암 시문을 확인한 이후 최초로 공신력 있는 대학박물관에서 공식 답사를 통해 모성암 시문의 내용에 대해 밝힌 것이다.
이후 발행된 『청도마을지(2020, 청도문화원)』에서 주저자(主著者)였던 박윤제 전 청도문화원장과 김태호 전 청도고 교사는 대구일보의 기사 내용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였고, ‘이것이 국왕 송덕비임은 제자(題字)인 모성암(慕聖巖)과 연호 표기 대신에 성상(聖上) 28년이라고 새긴 것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글을 쓴 사람에 대한 정보는 밝히지 못하였다. 우선 시우거사(是愚居士)란 자 또는 호를 사용한 인물을 특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없고, 인터넷 검색에서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공암 관련 인물들도 삼족당 김대유와 경재 곽순, 청수헌 윤봉한 등에서는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올해 초 청도향토사학회 부회장인 이상동 박사가 모계학원 김형수 이사장의 서고(書庫)에서 『백서록(栢西錄)』이란 표제에 <오산지지록(鰲山地誌錄)>이란 필사 유일본을 찾아 번역하여 가지고 왔다.
이 책은 1870년에 기록한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청도지역에 대한 기록으로 당시 산천(山川)과 지명(地名)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 특징이다. 그 기록을 따라 답사를 다니기로 하면서 내용을 읽어보다 모성암에 대한 다음의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自上倉東距孔巖, 有慕聖岩, 卽監司鄭晩錫巡察時刻石也. 東越川, 有曲川臺, 卽郭敬齋遺址, 而崔山林卜居也. 상창으로부터 동쪽에 공암까지에는 모성암이 있으니, 곧 감사 정만석이 순찰사로 있을 때에 돌에 새긴 것이다. 동쪽으로 시내를 건너면 곡천대(曲川臺)가 있으니, 곧 경재 곽순의 터이고 최산림(崔山林)이 살았다.
이 책에서 글을 새긴 사람이 감사 정만석이라 했다. 그럼 정만석과 ‘시우거사’의 동일인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일반적인 검색에서 정만석의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성보(成甫), 호는 과재(過齋)로 나온다. 우의정까지 지냈으며, 현재 전하는 저서로는 『관서신미록』이 있다. 시호는 숙헌(肅獻)이다.
일단 정만석에 대한 검증은 접어두고 또다른 인물 최산림에 대해 알아보자. 위의 각주에서 보듯 최산림의 자가 찬부(贊夫)이니 모성암에 새겨진 글 ‘与崔君贊夫’에서 본 그 인물이다. 그리고 최산림의 문집인 『외와집(畏窩集)』에 그 해답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외와집』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고전번역원에 원문 입력과 해제(解題)가 있어 개략적인 내용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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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산림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집 |
| 최산림은 45세 때인 1823년(순조 23) 부친의 사망과 함께 경주의 서산(西山)인 청도 운문 공암에 자리잡았다. 『외와집』 2권 서(書)에는 의미있는 글이 등장하는데 <여시우정상공만석(與是愚鄭相公晩錫)>과 <여시우정상공경오(與是愚鄭相公庚午)>가 그것이다.
해제에서 고전번역원 서인숙 박사는 “정만석에게 별지로 ‘是愚’의 당명을 지어준 내력을 적은 내용의 편지가 있다.”고 하였다. ‘시우’는 곧 최산림이 정만석에게 지어준 당명(堂名)인 것이다. 이 별지는 <여시우정상공경오(與是愚鄭相公庚午)>에 붙은 내용으로 여기에는 모성암에 대한 해답도 들어있다. 잠시 원문 일부를 옮긴다.
【別紙】 甕牖前頭。有所謂孔巖者。此實前日閤下所嘗賜慕聖巖三字及銘詩四句者也。而其丹崖翠壁之截然聳峙。淺流深潭之瀅然遠回。殆可謂神刓鬼刻。春粧秋餙。惜其出於荒堙夐僻之境而非車塵駟迹之所可到。琳之入西山也。竊能愛其邃而尤美其名之得孔字。妄欲僦屋。讀書於其下。而又或得貴重墨蹟刻于石。以寓區區慕仰之意而終身焉。所以年前就謁竹葉山墅。而淸燕夜席。妄以是及之。則閤下亦不以爲不然。酬答如響。書賜三字。至於銘詩則又是微衷之所未敢望者。感悚無涯。已愜私願。而歸路湖西。又拜鰲村講座。而從容及此。敢以所獲於閤下者聞焉。則丈席亦愛翫而亟稱之。更爲手書尋顔及慕彦四字以副焉。其所謂尋顔者。蓋以爲旣曰慕聖。又以鑽仰高堅爲銘詩。則此本是顔子語。且孔顔一道。有志慕孔。更須尋顔子樂處。其所謂慕彦者。朱夫子嘗捐俸錢令西原隱者崔嘉彦作卧龍庵。今之卜居西山者……(中略)……有不待望天而可捫星辰者乎。亦惟陶鑄之是竢。而只願已成之屋。必不至於畫墁。鏤石之澤。必不至於沒字。則非徒隷業之徒蹈舞康莊。而亦惟是愚二字。輝暎湖山。語涉煩猥。不知忌諱。伏乞寬宥而裁納焉。
『외와집』의 이 내용으로 모성암에 대한 의문은 모두 해소되는 셈이다. 즉 ‘是愚居士書 与崔君贊夫 聖上二十八年戊子四月日篆 石工金奉大 時人兪致龍’은 정만석이 쓰고, 지은 모성암이란 글씨와 시를 최산림이 1828년 4월 석공 김봉대와 유치용을 시켜 새겼다는 명확한 근거가 된다.
물론 여기서 ‘감사 정만석이 순찰사로 있을 때 새긴 것’이라는 단어와 비교할 때 약 20년에 가까운 시간상의 편차가 발생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산림이 서산(공암)에 들어오고 새겼다는 그의 글에서 글을 받은 시점과 글을 새긴 시점의 차이도 분명히 기록되고 있다.
또한 모성암은 국왕에 대한 송덕비가 아니라 공자와 그의 애제자였던 안회(顔回)를 기리는 내용임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은일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사표(師表)로 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인 안회를 통해 최산림은 자신의 공암 은거에 대한 명분을 쌓고 있는 셈이다.
최산림이 꿈꾼 은둔, 은일의 삶은 그의 시 <우견벽간제림화정호산소은시근차(偶見壁間題林和靖湖山小隱詩謹次)>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시에서는 또 다른 은일의 대표격인 임포(林逋)의 시에 차운하면서 공암에 은거하고 있는 자신을 대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Ⅷ. 마무리
운문 공암의 모성암과 비슷한 연유를 간직한 곳이 있으니 김천의 공자동 일원이 그곳이다. 행정구역상 김천시 대항면 대성리이며, 이회(李晦)라는 선비가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공자의 화상을 구해와 공자동(孔子洞)의 자택에 모시고 있었다 해서 마을명을 공자동이라 했다 한다.
이같이 성인(聖人)인 공자의 이름을 직접 가져다 쓴 지명의 사례는 없다고 한다. 또 마을 앞 하천 바위 위에 누대를 쌓고 안연대(顔淵臺)라 이름하고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곤 했는데, 안연은 곧 안회(顔回)로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숭상되는 인물이다.
상좌원의 선비 이민관(李民觀)은 자신의 호를 모성(慕聖)이라고 지어 공자를 사모하면서 구곡단가(九曲短歌)를 지어 노래했다. 제1곡 모성암(상좌원), 제2곡 문도동(들은들), 제3곡 저익촌(지리대), 제4곡 영귀반(명덕), 제5곡 백어촌, 제6곡 안연대, 제7곡 자하령(창평), 제8곡 공자동(대성동), 제9곡 주례동이다.
또한 호상(湖上) 여석홍(呂錫洪)의 공자동구곡(孔子洞九曲) 시도 전한다. 김천시 대항면과 구성면 일대에 걸친 마을들로 ‘공자동(孔子洞)’, ‘창평(昌平)’, ‘주공(周公)’, ‘안연대(顔淵臺)’, ‘백어(伯魚)’, ‘명덕(明德)’, ‘저익촌(沮溺村)’, ‘문도동(聞道洞)’, ‘상좌원(上佐院)’, ‘모성암(慕聖巖)’이 그것이다. 모두가 공자와 연관된 지명들이다. 모성암의 지명 유래와 시를 소개한다.
‘모성암(慕聖巖)은 구성면 상좌원 마을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로 옛 이름은 굴암(屈巖)이었는데 1697년에 모성암(慕聖巖)이라 개칭했다. 초당(草堂) 이장원(李長源)의 장구지소(杖屨之所)로서 바위와 산수가 아름다워 구곡단가와 여석홍의 공자동구곡 제1곡에서 나오며, 황남별곡에도 백장층암이 기이(百丈層巖奇異)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민관(李民觀)의 후손들이 모성암 바위 위에 모성정(慕聖亭)을 지어놓고 공자를 숭앙하고 있다.’
모성암(慕聖巖)
주렴 친 초갓집에 늙은 바위 나를 맞아 老石迎人廬一廬 여와씨가 다듬은 골격 지금까지 남아있네 媧磨骨格至今餘 앞길 구비마다 기이한 경치 펼쳐있어 前行曲曲奇觀在 행단의 현가가 밖으로 나오게 하네 杏壇絃歌出洞疎
지금까지 청도의 대표적 경승지인 공암풍벽과 주변의 거연정, 그리고 풍벽의 바위에 새겨진 시문들을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 특히 모성암 시문은 기존의 알려진 내용과는 다르게 임금을 기리는 송덕비가 아니라 공자와 안회 등을 기리는 내용임을 알게 되었다. 그 단초를 제공한 최산림이란 인물에 대해 그동안 관심과 연구가 부족했던 건 아마 그가 오롯한 청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복암 장화식의 <유운문산록(遊雲門山錄)>에 잠깐 언급되었지만 크게 주목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외와집』에서 그와 교류한 인물들이 청도군수, 경주부윤, 관찰사와 방백, 정승까지 폭넓게 퍼져 있음에 놀라게 된다. 그런 그가 공암에 자리잡기까지 토박이들의 텃세가 상당했음도 위의 글 <별지>에 나타나 있다. 즉, ‘경재 곽순의 터에 감히’ 이런 식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공암에 터를 잡은 최산림을 통해 모성암의 의문을 풀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Ⅸ. 蛇足
이뿐만 아니라 최산림(최림)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공암의 옛집이 수몰의 위기에서 벗어나 각남면 녹명리 말테우리에 옮겨졌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2018년 향토사학회 답사에서 한극원 송덕비를 찾아 나섰다 들린 말테우리에서 주인장 서상인 씨에게 들었던 재취옥 이야기. 운문의 공암에서 각남까지 옮겨진 200년 된 기와집 이야기는 청도향토사학회보 제35호(2018년 6월 30일 발행)에 실려 있으니 결코 우연은 아니라 생각된다. 단지 그때의 우리들은 최림이란 인물의 존재를 몰랐고, 거금을 들여 장거리 여행을 한 집이 신기했을 뿐이었다. 거기에 실린 서상인 씨의 증언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이 집은요, 운문 공암 마을에 있었는데 운문댐 건설로 수몰되는 집을 당시 거금 8천만원을 들여 이곳으로 옮겨왔어요. 당시 이 집은 경주 최씨 성을 가진 분의 집이었는데 수몰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앞뒤 계산할 겨를없이 이 집을 지켜야 되겠다, 살려야겠다라는 생각밖에 들지않았어요.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단지 이 집이 공암 아랫마을 안쪽 약간 높은 언덕같은 곳에 있었는데 옮길려고 보니 차도 못 들어가고 해서 큰길에다 차를 대기시켜놓고 작은 수레를 이용하여 하나씩 옮겨 담았어요. 제일 신기했던 건 기와를 옮기는데 큰 광목천을 지붕에서 저 아래 마당 끝까지 비스듬히 펼쳐 고정시켜 놓고, 그 끝에는 모래를 가득 쌓아 지붕에서 기와를 광목천에다 미끄럼을 태워 모래위에 떨어지면 기다리던 인부들이 얼른 주워 수레에 차곡차곡 세워담아 큰 차로 옮기는데 한 장씩 한 장씩 조심스레 옮기다보니 약 2,000여장 되는 기와장 옮기는데만 닷새나 걸렸어요. 그때는 참말로 힘들었는데 다 옮겨 새로이 지어놓고 나니 정말 뿌듯하고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지었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 그대로 지은 것을 재취옥이라고 한대요. 사람도 두 번째로 결혼하면 재취댁이라 하지 않나요?”
<참고문헌> 『청도군지』, 청도군청, 1991 『청도마을지』, 청도문화원, 2020 『청도문헌고』, 청도문화원, 2009 『청도문헌자료집』, 청도문화원, 2013 『청도 사족의 운문산 유람록』, 김명순·이상동 옮김, 청도문화원, 2009 『오산지』, 이중경 지음·이상동 옮김, 청도문화원, 2003 『청도향토사학회보 제35호』, 청도향토사학회, 2018
<논문> 「청도운문의 거연정에 관한 연구」, 이석래, 1986 「청도 공암풍벽과 거연정 별서원림의 재조명」, 김정문 외, 2020 「고산정(孤山亭) 시문을 통해 본 17세기 초 朝鮮·明朝 사대부의 공간인식」, 중국문학연구 50, 권석환
<웹사이트>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종합번역원 디지털청도문화대전 청도군청 홈페이지 대구일보 홈페이지 등
이상으로 청도 제일승경(淸道第一勝景) 공암풍벽(孔巖楓壁)을 모두 마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