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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공산 은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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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은해사 경내의 금석문(1)
-바위글씨와 비석을 중심으로
전일주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영천에는 여러 유형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선조들의 생활 터전인 전통한옥과 학문을 논하고 제자들을 길러낸 서원과 향교, 서당이 있고, 문중마다 선조들을 추모하는 재실과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며 시문을 창작했던 공간인 정자가 있으며, 선인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문헌과 여러 종류의 비석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유구한 역사 속에 전해져 온 불교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필자가 금석문에 관심을 두고 시간이 될 때마다 답사하고 조사한 비석이나 바위 글씨는 주로 팔공산 자락에 산재한 것들이다. 영천의 각 읍면 관내에는 수많은 금석문이 있고 이를 조사 정리한 책이 있지만, 본고는 팔공산 자락에 자리한 은해사 경내와 계곡, 산내암자에 새겨진 바위 글씨와 비석에 한정하여 조사하고 자료를 정리하였다.
팔공산 자락에 있는 치산계곡의 각석과 신령면무소에 모아둔 비석과 비문 도 답사하여 조사하였지만, 지면의 한계로 차후에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혼자서 틈틈이 답사한 것을 정리했기에 실재 있는 금석문이 소개되지 못한 것도 있을 수 있기에 누락된 것은 보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Ⅱ. 은해사 경내의 금석문
팔공산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그리고 교구 본사 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 개가 있고 말사 숫자가 50여 개에 이르고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 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1. 바위 글씨
일반적으로 바위나 절벽에 새긴 글씨를 ‘각석’ 또는 ‘마애각석’이라 하고, 불상을 새긴 것을 ‘마애불’이라 한다. 은해사 경내에는 팔공산의 어느 사찰이나 어떤 계곡보다 각석이 많이 남아 있다. 유구한 사찰의 역사와 함께 수려한 계곡, 울창한 숲, 글씨나 그림을 새길 수 있는 우람한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중암 뒤편 정상 너럭바위에 새긴 삼인암을 위시하여 은해사유공송 각석, 한시를 새긴 바위와 나무아미타불 각석 등의 바위글씨가 있는데, 이 각석들은 표석이나, 기념비적인 역할과 함께 때로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각석했음을 알 수 있다. 선인들이 남긴 석각을 보면, 사찰의 역사와 함께 석각 글씨의 예술적인 면을 감상할 수 있다.
은해사 경내에 산재한 각석 글씨 7점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은해산문(銀海山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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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해산문 |
| 크기 가로 38㎝, 세로71㎝ 내용 銀海山門 壬寅 知郡 李章鎔(은해산문 임인 지군 이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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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해산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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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산문은 은해사 경내에 들어서는 문이란 의미로, 임인년에 영천군수인 이장용(李章鎔)이 새겼다는 내용이다. 이장용은 1901년부터 1902년까지 영천군수를 역임하였다. 이 바위는 원래 산문 입구 길가의 자연석에 새겨 두었던 것으로, 근래에 사찰을 정비하면서 본래 자리에서 바위를 옮기고 보이던 글씨는 위로 향하게 두어서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무심히 지나치기 쉽다. 사진도 바위 위에 올라서야만 촬영이 가능하다.
2) 한시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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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시바위의 한시 |
| 크기 가로 43㎝, 세로65㎝ 내용 永川 成昊運(영천 성호운) 我與公山倂我州(아여공산 병아주)
花辰月夕訪雲樓(화신월석 방운루) 白髮旋疎餘素癖(백발선소 여소벽) 聊將此石活千秋(료장차석 활천추) 辛未冬十月 四龍山下 晩悔 書
나와 팔공산은 우리 고을에 함께 있어 꽃 피고 달뜨는 저녁이면 운부암을 찾는다네. 백발이 어느새 엉성하지만 평소의 버릇은 남아 장차 이 돌을 천추토록 살아 있게 하리라. 신미년 겨울 시월에 사룡산하의 만회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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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시바위 |
| 한시바위는 은해사 경내 템플스테이 수련원 건물 뒤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현재까지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팔공산 금석문에서 이곳에 새겨져 있는 한시가 유일하다. 한시를 새긴 바위로서 희소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잘 보존하며 홍보할 필요가 있다.
3) 은해사 유공송(銀海寺有功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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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해사 유공송 |
| 내용 堂上大監 興宣君(당상대감 흥선군) 巡相國 申錫禹(순상국 신석우) 丁巳 六月 日(정사 유월일) 主事 輸誼書(주사 수의서) 刻字 鄭喆伊(각자 정철이) 당상대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순찰사 신석우로 하여금 인조대왕 태실에 제사를 받들기 위해 궁실의 제물을 보낸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은해사유공송’이라 제목하고 길목 큰 바위에 새긴 내용이다.
4) 나무아미타불, 이름 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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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아미타불 각석 |
| 내용
큰 바위에 안윤명(安潤明), 박창호(朴昌鎬) 2명의 이름자와 바위위쪽 경사면에 큰 글씨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이름 등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5) 삼인암(三印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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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인암 |
| 크기 가로 200㎝, 세로 73㎝ 내용 三印岩(삼인암) 삼인암(三印岩)은 은해사의 산내암자인 중암암(中巖庵) 뒷산 바위에 새겨진 글씨이다. 삼인암이란 장방형의 인장(印章)처럼 생긴 3개의 바위가 있어 일컬어진 것 같다. 큰 바위위에 예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암(岩)자의 모양새가 건너편 산의 모양을 닮아 있다.
6) 중암 이름 글씨 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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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암 이름 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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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중암암(中巖庵) 뒤쪽에 있는 삼인암(三印岩)에서 북쪽을 향해 바라보이는 바위절벽에는 군수(郡守) 조재득(趙載得), 원주판관(原州判官) 재한(載翰), 고산현감(高山縣監) 재리(載履), 재전(載田), 노진(潞鎭), 수진(修鎭)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군수(郡守) 조재득(趙載得), 원주판관(原州判官) 조재한(趙載翰), 고산현감(高山縣監) 조재리(趙載履), 조재전(趙載田)은 본관은 풍양(豊穰)이며 조선(朝鮮) 영조(英祖)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조현명(趙顯命)의 아들이다. 조노진(趙潞鎭)와 조수진(趙修鎭)은 조재득(趙載得)의 아들 4형제 가운데 장남과 차남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기록에 의하면, 조재득(趙載得)이 영조(英祖) 35년 기묘년(己卯年, 1759년) 9월 3일에 영천군수(永川郡守)가 되어 영조(英祖) 38년 임오년(壬午年, 1762년) 7월 3일까지 부임하여 근무하였다. 따라서 위의 제명(題名)은 조재득(趙載得)이 영천군수로 재직하던 중에 형제들과 중암암(中巖庵)을 둘러보고 새긴 것으로 보이며, 훗날 조재득(趙載得)의 아들 조노진(趙潞鎭)와 조수진(趙修鎭)이 이곳에 와서 아버지와 숙부들의 제명을 보고 자신들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7) 은해사 일주문 이름 각석 (최항묵과 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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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항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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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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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