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새재도적 박응서와 영창대군
박응서(朴應犀)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인의 거두 박순(朴淳)의 서자(庶子)다. 박응서는 시문(時文)에 능한 문사였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출사(出仕) 할 수가 없었다. 박응서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명문출신 서얼인 김평손(金平孫), 심우영(沈友英), 서양갑(徐羊甲), 박치의(朴致毅), 박치인(朴致仁), 이경준(李耕俊) 등과 어울려 적서(嫡庶) 차별의 불만을 토로(吐露)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광해군도 적자가 아닌 서자였으므로) 연명으로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묵살 당했다. 그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당시의 세상을 원망하며 경기도 여주의 강가에 윤리가 필요 없다는 뜻의 무륜당(無倫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술과 풍류로 세상을 등지고 지냈다.
마침 모인 사람의 수가 일곱 사람이라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중국 진나라의〈죽림칠현>을 본받아〈죽림칠현>이라고 고쳤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풍치 있는 이름이었으나 이들의 속 내용은 도적질에 강도질까지 일삼는 폐륜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세월이 가면서 이들의 패륜행각은 더해만 갔고 이들의 활동영역도 점차 넓혀지면서 멀리 문경새재까지 원정을 오게 되었다. 새재는 서울과 영남을 오가는 중요한 길 몫이라 장사치들이 많이 다니기도 하지만 산이 깊어 몸을 은둔하기가 좋아 도적질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
박응서 일당은 새재에서 은전(銀錢) 수 백 냥을 약탈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이어지는 칠서사건(七庶事件)이다. 이들은 새재에서 은전(銀錢) 수 백 냥을 탈취하여 의기양양하여 여주 본거지로 돌아왔다. 일 년 동안 흥청망청 쓰고도 남을 많은 양이라 이것이 꿈인가 생신가 싶어 누가 미행하는 줄도 모르고 나귀에 은전이 실린 그대로 나귀를 여주 본거지까지 몰고 온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한 말구종은 멀리서 도둑놈들이 어디로 가는가를 살펴보면서 몇 날 며칠을 도둑의 뒤를 밟았다. 이들의 본거지를 확인한 나귀를 몰았던 구종은 곧바로 한양으로 달려가서 포도청에 고발하였다. 사건을 접수한 포도청에서는 포교와 포리 십여 명을 여주로 급파하여 박응서 일당을 체포하여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박응서 일당의 문경새재 은전 약탈사건은 단순한 강도사건이었다. 하지만 당시 집권한 대북 파에서는 소북파를 제거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이번 문경새재 은전 약탈사건을 역모사견으로 둔갑시켜 소북파를 압박할 계략을 꾸미게 되는데........
당시 대북파의 실세였던 이이첨(李爾瞻)은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을 찾아가서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이이첨은 자신의 심복부하인 김개(金闓) 김창후(金昌後)를 포도청으로 보내면서 포도대장 한희길과 긴밀히 협조하여 새재의 은전 약탈사건을 역모사건으로 몰아갈 것을 지시하였다.
포도대장 한희길과 이이첨의 심복 김개, 김창우는 이번 사건의 주모자인 박응서를 비밀리에 만나 박응서에게 살길을 찾아 주겠다면서 금부로 이송되어 문초를 당할 때에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하며는 살아날 뿐만 아니라 이번 일에 공을 세우면 공신이 될 수도 있다고 박응서를 꼬드겼다.
죽을 줄로만 알았던 박응서는 눈이 번쩍 뜨였다. 한희길은 박응서의 귀에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박응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음날 의금부에서 죄인들의 문초가 시작되었다. 문초가 시작되자 박응서는 거짓 증언을 하였다.
“소인은 단순한 강도가 이니요! 대사를 도모하기 위하여 우선 첫 번째 사업으로 양식과 무기를 구입할 목적으로 돈을 강탈한 것이요.”
“대사라니? 무슨 대사 말이냐?”
“소인은 김제남과 오래 전부터 영창대군을 옹립할 모의를 해왔소. 지금의 주상은 선왕의 서자이니 적자인 영창대군이 왕위를 계승함이 순리를 따르는 것이오.”
틀림없는 역모사건이었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문초는 일시 중단되었고 임금이 친국하기에 이르렀다. 광해군은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판의금 박승종 등이 참관한 가운데 친국이 시작되었다.
“신이 4년 전부터 서양갑, 박치의, 김평손, 심우영, 박치인, 이경준 등과 여주에서 모의를 하였고 대사가 성사되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하게 할 계획이었소.”
박응서의 입에서는 역모사건이 술술 흘러나왔지마는 애초에는 없었던 일이라 다른 관련자들은 서로간의 말이 도무지 맞지를 않았다. 마침 서양갑이 김제남(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과 서로 만났다는 말이 나와 그것을 빌미로 김제남의 관직을 삭탈하고 궁중 출입을 금지시켰다.
계속되는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무고한 많은 사람이 연루되었다. 연루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무고함만을 주장하고 남(소북파)을 모함하였다. 이렇게 새재의 은전 약탈사건은 얼토당토않게 역모사건으로 비화되어 계축옥사를 치르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연좌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이(安易)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대신들과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의 관련자 수 십 명도 모두 하옥되었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했던 일이 발각되어 김제남은 그 일로 사약을 받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다.
계축년에 일어난 옥사라 하여 계축옥사라고 하는 이 사건으로 인목대비는 서궁으로 위폐되었고 영창대군은 폐서인이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다.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에서는 역모의 뿌리를 뽑기 위하여 영창대군을 사사(賜死)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항복, 이덕형, 곽재우 등은 혈육 간의 정과 영창대군의 나이가 연소함을 들어 성은을 베풀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으나, 대북파의 위세를 넘지 못하고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등이 유배를 당하고 소북파를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들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영창대군이 위리안치(圍離安置) 된 강화도에 강화부사로 정항(鄭沆)이 새로 부임 온 뒤로는 영창대군에게 밥조차 제대로 주지를 않았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안치(安置)에 수직을 서는 사람이 몰래 밥을 주다가 발각되어 곤장을 맞고 내쫓김을 당하였다. 먹지 못한 영창대군의 기력은 쇠할 대로 쇠하였다. 이뿐이 아니었다. 강화부사 정항은 대군이 거처하는 방 아궁이에 불을 많이 지펴서 결국 영창대군은 살가죽이 타들어가는 뜨거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강화도에 위리안치 된 그 이듬해에 죽었다. 영창대군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칠서 사건에서 거짓 자백을 하고 혼자 살아남은 박응서는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 때 반정군에게 잡혀서 죽었다. 새재도적 박응서의 거짓 자백으로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어 강화부사 정항에게 불에 쪄 죽임을 당한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가 서궁에 위폐되어 궁벽한 삶을 살고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 한 수를 여기에 소개한다.
老牛用力已多年 늙은 소는 힘을 쓴 지 이미 여러 해인데
領破皮穿只愛眠 목이 찢기고 가죽은 뚫려 다만 자비로운 눈 뿐
犂耙已休春雨足 쟁기질과 써레질이 이미 끝내고 봄의 물조차 넉넉한데
主人何苦又加鞭 주인은 어찌 이다지도 괴롭히며 심하게 채찍질을 하는가.
집권 세력의 위세에 시달림을 당하는 아픔이 그대로 묻어난 가슴 아픈 시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