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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제일승경(淸道第一勝景) 공암풍벽(孔巖楓壁)(1) / 조성재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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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암풍벽(사진 경상북도 청도군 누리집 캡처)


청도 제일승경(淸道第一勝景) 공암풍벽(孔巖楓壁)(1)
- 모성암(慕聖巖) 시문(詩文)을 중심으로

조성재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청도)


Ⅰ. 공암풍벽(孔巖楓壁)

 공암풍벽(孔巖楓壁)은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 산46번지 소재 바위 절벽과 주변을 통칭하는 단어로 청도팔경(淸道八景)의 하나이다. 청도군청 홈페이지의 청도팔경 중 공암풍벽에 대한 소개를 보면 ‘공암풍벽은 운문면 대천리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인 운문면 공암리에 자리잡고 있는 높이 30여m의 반월형 절벽을 말한다.

 공암풍벽에는 봄이면 진달래를 비롯한 백화가 만발하고, 여름이면 운문천의 맑고 푸른물이 곡천대를 감돌아 흐르는 모습을 보면 더위를 잊게하여 과연 절경이다. 특히 가을이면 풍벽이란 이름과 같이 오색의 단풍이 하나의 벽을 이루고, 겨울에는 주위 송림의 푸른 기상은 우리 고장 선비들의 고절을 상징하는 듯하다. 

 공암풍벽 사이에는 옛날에 용이 살았다는 용혈과 학이 떼지어 놀았다는 학소대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산정에 있는 석문은 예전에 청도에서 경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공암풍벽의 일부가 수몰되었지만 넓은 호수와 함께 어울린 모습으로 더욱 절경을 이루고 있다.’고 되어있다.

 청도제일승경이란 필자의 일방적 느낌으로 칭한 단어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만큼 청도에서는 경치가 가장 빼어난 곳으로 꼽힌다.

 예로부터 산좋고 물좋은 곳은 자연을 감상하고, 자연에 묻혀사는 은일(隱逸)을 꿈꾸는 사람들의 로망이었다. 공암(孔巖)도 당연히 은일을 꿈꿨던 청도의 대표적 인사들이 일찍부터 터를 잡고 살았다.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경재(敬齋) 곽순(郭珣), 청수헌(淸水軒) 윤봉한(尹鳳翰), 외와(畏窩) 최림(崔琳) 등이 이곳에서 자연을 경영했고, 이들을 만나러 많은 인사들이 찾아들었다.

 공암(孔巖)은 층암절벽과 거기에 뚫린 구멍으로 인해 지역의 대표가 되어 지명으로 자리잡은 경우이다. 여기에서는 공암에 관한 옛 기록들을 먼저 찾아보고, 주변의 정자인 거연정과 각자(刻字)들을 간략하게 살펴본 후 모성암 시문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Ⅱ. 공암에 관한 옛 군지의 기록들

 공암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1530년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꼽을 수 있다.

 孔巖院 在郡東八十六里 露出巖壁如門可數十步

 여기에서는 공암을 <역원(驛院)> 조(條)에서 다루고 있지만 공암역 만큼은 따로 거리와 위치뿐만 아니라 석문의 경치를 묘사하고 있어 주목된다.

 다음으로 1673년 발간된 청도지역 최초의 사찬읍지인 『오산지(鰲山志)』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이 책은 청도군지인 관계로 지역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공암원은 이미 폐기되었다고 기록하고, 따로 <경내승지(境內勝地)> 조를 두고 맨 앞에 공암을 표기하였다.

 孔巖 在上東慶州之界 層崖上脊之上 有石穴 可容一龍之身 直下無底 行人 以石投之 附耳聽之 石聲琅琅 然至於細微不可聽 自古投石者 日累百人 而穴尙不充 其餘山之勝 不可形容
 공암: 상동(上東)의 경주(慶州) 경계에 있다. 겹겹으로 쌓인 벼랑으로 이루어진 산등성이 위에는 바위 구멍이 있는데, 용 한 마리 정도 들어갈 수 있고 일직선으로 떨어져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행인들이 돌을 던지고 귀를 대고 들으면 돌 소리가 낭랑하게 들리지만, 미세한 소리까지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예로부터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날마다 수백 명이나 되지만 구멍은 아직까지 채워지지 않았다. 주위 산의 경치도 이루 형용할 수 없다.

↑↑ 공암(구멍바위)

 曲川堂 在孔巖 三足堂金先生所卜也 今爲廢基
 곡천당:공암에 있으며 삼족당 김선생이 머무르던 곳이다. 지금은 터가 남아있지 않다.


 司諫亭 在孔巖 郭警齋珣所卜也 與曲川堂 隔水相對 今爲遺墟
사간정:공암에 있으며 경재(警齋) 곽순(郭珣)이 머무르던 곳이다. 곡천당과 더불어 물을 마주하여 대하고 있다. 지금 터가 남아있다.

 위에서 보듯 일반적 기록이면 공암에 이어 인근에 곡천당, 사간정이 있다고 간단히 기록하여도 무방함에도 따로 표기하면서도 공암에 있다[在孔巖]하여 명승지임과 관련 인물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후 이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소략(疎略)하게 표기하는 양상을 보인다.

 1895년 『청도군군지(淸道郡郡誌)』 역시 비슷하나 곡천대를 공암 안에서 기록하지만 사간정 기록은 남겨두고 있다.

 孔巖 在郡東八十六里 層崖山脊之上有石穴可容一龍之身 直下無底以石投之石聲琅琅 然至於細微俯不可聽 東渡一溪數百步許有曲川臺 三足堂金先生之所卜也 今爲廢臺
 司諫亭 郭司諫號警齋名珣所卜 溪亭與曲川臺 隔水相對 今爲遺墟

 이후의 기록에는 사간정 역시 보이지 않다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與勝覽)』에 다시 이런 형태의 기록이 나타난다. 1940년경 발간된 『청도문헌고(淸道文獻考)』의 <형승고적(形勝古蹟)> 조에는 공암에 대한 좀 더 상세한 기록이 나오지만 이어 곡천대만 나온다. 사간정은 여기에 기록이 없고 뒤에 따른 <고적(古蹟)> 조에 나온다. 즉, <형승고적>과 <고적>을 분리하면서 사간정은 <고적> 조로 편성하였다.

 孔巖在郡東雲門面孔巖洞層崖上有石穴可容一龍之身直下無底行人以石投之俯耳聽之石聲琅琅然至細微不可聽自古投石者日累其人而穴尙不充沿崖作半圓形高百餘尺巖壁屛立樹林繁茂下有深潭傍有龍峀鶴巢臺石門春則萬花醉香夏則綠陰濃織秋則丹楓呈娟冬則白雪冰釰懸於巖壁四時之景頗極壯麗有一齋蔣俊馨題詠
 공암 : 군 동쪽의 운문면 공암동에 있다. 층층의 벼랑 위에 바위 구멍이 있는데, 용 한 마리 정도는 포용할 수 있고 바로 아래에는 바닥이 없어 지나가던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귀를 대고 들으면 돌 소리가 낭랑하지만 소리가 아주 작고 가늘어 들을 수 없다. 예로부터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졌으나 구멍은 아직까지 채워지지 않았다. 
 낭떠러지를 따라 반원형이 되어 있는데, 높이가 100여 자에 이른다.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나무가 무성하다. 아래에는 깊은 못이 있는데 그 옆에는 용수(龍峀), 학소대(鶴巢臺), 석문(石門)이 있다.   봄에는 수많은 꽃이 피어 그 향기에 취하고, 여름에는 녹음이 짙게 드리고, 가을에는 단풍이 뛰어나게 아름답고, 겨울에는 백설과 고드름이 바위 절벽에 걸려 있어 사시사철의 경치가 이루 형용할 수 없이 웅장하고 화려하다. 일제(一齋) 장준형(蔣俊馨)의 제영이 있다.

 曲川臺 在孔巖洞前川 背如弓 波面似鏡可比蜀江之巴字 三足堂金大有杖屨地
 곡천대 : 공암동 앞내에 있다. 뒤가 활처럼 휘어져 있는데 수면은 거울처럼 맑아서 촉강(蜀江)의 파(巴)자에 비견할 만하다. 삼족당 김대유 선생이 머물던 곳이다.

 司諫亭 在雲門面孔巖洞警齋郭珣所卜與曲川臺隔水相望今廢
사간정 : 운문면 공암동에 있다. 경재 곽순이 머물던 곳으로 곡천대와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졌다.


Ⅲ. 공암 원림을 경영한 거연정(居然亭)

 거연정은 청도 뿐만 아니라 영남 지방에서는 드물게 비구(飛溝)를 통해 계류(溪流)를 끌어들여 만든 지당(池塘) 조성 등 조경학계에서 더 주목하는 정자이기도 하다.

 이를 가장 최근의 논문인 「청도 공암풍벽과 거연정 별서원림의 재조명」에서 전북대학교 조경학과 김정문 교수는 “…문화적 혼란기에 많은 문화유산이 망실되거나 훼손되었다. 이런 훼손의 하나로 우리의 원림도 많은 부분 훼손되고 있으며, 지금도 그 중요함을 모르고 후손들에게 잊혀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의 하나가 경북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에 위치하는 거연정원림이다.”고 하여 거연정의 관리와 보존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다.

 이 논문에 의하면 거연정은 1983년에 이석래에 의해 처음 학회에 보고되었고, 이후 1992년에 역시 이석래에 의해 영남지역의 대표적 별서정원으로 재조명된 바 있다.고 하였다. 또한 1984년 한국조경학회(당시 한국정원학회) 차원에서 거연정원림의 문화재 지정을 건의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석래는 거연정을 원림정원보다는 노장사상에 힘입은 임천정원(林泉庭園)으로 규정하고 지당의 형태와 내부, 주변의 수종에 대한 조사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거연정의 영향권에서 공암의 관련성을 주목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이석래는 별서원림(別墅園林)으로써의 거연정을 주목하여 정원배치도를 작성하고 공간의 쓰임새와 식재에 대해서만 일부 보완한 작업을 수행하였다. 「청도 공암풍벽과 거연정 별서원림의 재조명」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공암을 거연정의 외원(外園)으로, 거연정과 지당, 계류, 바위 글씨들과 원림수목 등의 내원(內園)으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를 위해 거연정의 경영자인 청수헌(淸水軒) 윤봉한(尹鳳翰, 1807~1867)의 문집인 『청수헌유고(淸水軒遺稿)』를 비롯한 여러 글들을 찾아 그의 삶과 철학, 자연관 등을 알고자 했다는 점은 매우 바람직한 연구방법으로 여겨진다.

 거연정의 당호 ‘거연정(居然亭)’은 주자의 「무이정사 잡영(武夷精舍雜詠)」 12수에 등장하는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따온 말로 주자가 소박하게 자연에 의지한 삶을 산 것에서 자신도 그러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판단된다. 함양 서하면 화림동천(花林洞天)의 거연정 또한 이와 같은 의미를 담은 동명의 당호이다.

 거연정에 관한 군지류의 기록은 『청도문헌고(淸道文獻考)』가 거의 유일하다. ‘거연정(居然亭) 군의 동쪽 운문면 공암동에 있다. 윤봉한(尹鳳翰)이 가꾼 곳이다’라 한 것이 전부이다. 거연정의 건립 시기는 1700년 설부터 1843년, 1848년 설 등 몇 가지 설이 있으나 좀더 고증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주변의 바위 글씨들로는 건물 뒤의 석벽에 새겨진 산고수장(山高水長)과 그 우측의 운심부지처(雲心不知處), 개울가의 바위에 활수원(活水源), 구은교(求隱橋 혹은 水隱橋로 보기도 함), 물 건너의 아천석(我泉石), 가이대(可以坮), 제시인간별유천(除是人間別有天)이 있다. 원래 거연정의 당호 노릇을 했으나 지금은 건너 민가로 옮겨진 의당(義堂)이 확인된다. 경(敬)이란 글이 새겨진 바위도 있었다 하나 주변에서 찾기는 어렵고, 앞서 언급한 건너 민가에 흠의탑(欽義塔) 또는 흠희탑(欽羲塔)으로 읽혀지는 바위가 있어 출처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지당이나 식재 수종 등은 본고가 거연정 위주의 글이 아니기에 다루지 않고 넘어가기로 한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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