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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가 품은 오징어(2) / 이경애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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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사진 경상북도 울릉군 누리집 캡처)


울릉도가 품은 오징어(2)

이경애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울릉)


Ⅳ. 울릉도 오징어

 오징어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수산물 중 하나이다. 한국의 해역에서 어획되는 오징어의 70% 이상이 동해를 산지로 하고 있으며 동해 가운데에서도 울릉도를 대표적인 오징어의 특산지로 꼽는다.

 세계 각지 바다에서 서식하고 있는 오징어는 460여 종이 있으며, 한국 바다에서 서식하고 있는 오징어는 살오징어, 흰오징어, 갑오징어, 화살오징어 등 약 10여 종이 있다. 그 중 울릉도 바다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살오징어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징어이다.

 오징어는 연중 산란하는데 주 발생 시기에 따라 하계군, 추계군, 동계군으로 구분한다. 울릉도 오징어는 대부분 추계군으로 9~12월 우리나라 제주도 부근 바다와 동해 남부 연안 바위 밑 그늘진 곳에 수만 개의 알을 낳고, 부화한 어린 오징어는 봄이 되면 대마난류를 타고 북상하여 동한난류를 타고 오츠크해 인근 지역까지 회유하며 성장한다. 이후 리만 한류와 북한 한류의 영향으로 수온이 낮아지는 9~10월경 남하하기 시작하여 태어난 바다에 돌아와 알을 낳고 사망하는 단년생 생물이다.

 울릉도 근해는 한류인 북한해류와 난류인 동한해류가 합류하는 어장으로 회유성 어족이 풍부하며, 특히 오징어와 방어 어장으로 유명하다.

 울릉도 오징어의 성수기는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이며 최성수기에는 섬 전체가 오징어로 뒤덮일 정도로 오징어가 지천이었다. 오징어를 집 마당, 길가, 지붕까지 널어서 말렸고, 말린 오징어는 집 안방을 차지하기도 했다.

 울릉도의 어선들은 대다수가 10t 미만의 어선으로 일명 당일바리로 오징어 조업을 한다. 당일바리란 통상 울릉도 주변 약 30~50해리 이내에서 하는 조업으로 전날 오후 2~3시쯤에 오징어를 잡으러 나가 밤새 잡아 이른 새벽에 들어와 위판하는 오징어를 말한다. 이 오징어를 빠르게 건조하는데, 이런 오징어를 울릉도 사람들은 ‘아사이찌’라고 부르며 신선도가 매우 뛰어나다. 이렇듯 신선한 상태의 오징어를 위판하고, 매우 빠르게 건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울릉도 오징어는 고소하며 단맛이 난다.

 울릉도가 오징어로 유명하게 된 건 1960년대 울릉도 트위스트 노래가 나오면서 전국적으로 많이 퍼지게 되면서이다. 울릉도 오징어를 구별할 수 있는 법은 건조 오징어와 반건조 오징어의 다리 사이에 끼워진 탱기에 ‘등록 제467호’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울릉군 수협에서 보증하는 울릉도 오징어이다.


1. 울릉도 오징어 건조 과정
 울릉도에서의 오징어 건조 과정은 육지와는 매우 다르다. 육지의 경우 오징어를 줄에 널어서 말리고 손질 과정도 5~6번에 그치는 데 비해, 울릉도의 경우 손질 과정만 보아도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울릉도에서 오징어 건조하는 과정은 아래 순서와 같다.

① 오징어 배를 갈라 내장 제거하기
② 대나무 꼬챙이를 이용해 20마리씩 꿰기
③ 해양 심층수를 활용한 오징어 세척 하기
④ 건조장으로 운반하기
⑤ 오징어 덕장에 걸고 한 마리씩 펼친 후 다리 사이에 탱기 치기
⑥ 살짝 마르면 오징어 몸통을 뒤집어주기 (배 뒤집기)
⑦ 꾸덕꾸덕하게 마르면 붙어있는 발 분리하기(발 떼기)
⑧ 오징어 지느러미 부분 세우기 (귀 세우기)
⑨ 손질할 만큼 마르면 오징어를 대나무 꼬챙이에서 빼서 몸통 펴기(오징어 훑기)
⑩ 훑은 오징어를 대나무 꼬챙이에 몸통과 다리부를 반으로 접어 걸어서 다시 말리기
⑪ 마른오징어를 가지런히 쌓아서 보관하기(재개기)
⑫ 마른오징어의 크기별 분류 후 20마리씩 묶음 만들기(축잡기)

2. 울릉도 오징어잡이의 역사
 울릉도 개척 초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이 섬을 개척하고, 어떤 방식으로 경제 활동하며 살았을까? 조선인들의 섬 개척 역사, 도동에 건설된 일본인 어촌, 도동을 중심으로 일본 사람들이 어촌을 만들고 활동하였고, 농경문화였던 조선 사람들이 왜 어업을 했는지, 또 어떤 식으로 어업이 진행되었는지, 오징어는 어떻게 울릉도 사람들에게 선택되었는지, 현재 울릉도 오징어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울릉도는 조선시대 조선 정부의 쇄환정책으로 인해 빈 섬으로 되어있었다. 쇄환정책(刷還政策)은 섬에 사람이 살면 안 되는 법령으로 조선은 조선 초기부터 1883년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지기 이전까지 약 500년간 울릉도에는 사람이 살면 안 되었다.

 섬을 비워 두었더니 일본은 불법적으로 섬에 들어와 자원을 수탈해가고 심지어 울릉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표목을 세워두기도 했었다. 이에 고종은 부호군 이규원에게 검찰사의 명을 내려 울릉도에 파견하여 울릉도에 조선의 백성이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울릉도를 다녀온 이규원의 ‘검찰 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울릉도를 적극적인 개발정책을 펴면 나리동에 설읍을 할 수 있고, 개간하면 각 지역에 1~200호의 부락을 형성할 만한 곳이 있다. 했으며, 조선인 142명, 일본인 79명을 발견했고, 사동에서 통구미가는 바닷가에는 일본인이 세운 ‘대일본국(大日本國) 송도규곡(松島槻谷) 명치(明治) 2년 2월 13일 암기충조건지(岩畸忠照建之)’라고 적힌 표목을 발견하기도 했다고 왕에게 건의하였다 한다. 이규원의 건의로 인하여 섬에는 개척령이 내려지고, 1883년 16가구 54명의 사람이 들어오면서 울릉도는 합법적으로 사람이 들어와 살게 된다.

 1883년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의 41조에 의해 일본은 전라·경상·강원·함경 4도의 영해 내에서 어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으며, 이에 강원도에 소속된 울릉도 해변에서의 어업도 허가 되었다. 조일통상장정의 체결 결과 1888년부터 일본 어민들은 합법적으로 울릉도 연안에서 전복, 우뭇가사리 등을 채취하기 시작하였으며, 1889년 조일통상장정 제41조에 근거한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인들의 울릉도 침어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일통어장정의 체결 이후 일본인의 잠입이 본격화할 당시 울릉도 조선인의 주요 어업은 전복과 미역, 김 등의 해조류 어업이었으며, 일본인들은 전복과 우뭇가사리를 채취하였다. 당시의 전복은 한일 양국에서 대중국 수출품으로 화폐가치가 뛰어난 수산물이었다. 그러나 일본 어민들에 의한 전복 어장의 독점과 남획, 그리고 삼림의 벌채는 울릉도의 자원을 급속히 고갈시켰다. 

 1900년 일본 영사관보 ‘아카쓰카쇼스케’의 조사 기록인 「울릉도조사개황(鬱陵島調査槪況)」에서 ‘전복과 우뭇가사리의 수량이 감소하여 전망이 좋지 않고, 잠수기선도 1척 이상은 전망이 없다.’, ‘규목(느티나무)은 이미 6척 이상은 다 베어내고 현존하는 것은 200그루가 채 안된다.’라는 울릉도의 심각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울릉도는 앞으로 유망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현재 섬에 있는 일본인을 돌아가게 하고 앞으로 입도를 금지하더라도 손실이 많지 않을 것이다.’라는 비관적 전망을 기록하고 있을 만큼 당시 일본인들에 의한 울릉도 자원고갈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울릉도의 전복 및 삼림이 고갈되어 가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삼림벌채 항의는 일본의 울릉도에 대한 정책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계기로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 압록강·두만강 유역 및 울릉도의 삼림벌채권을 획득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울릉도에 대한 일본의 자원 수탈에 대해서 조선과 일본 양국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러시아의 이 같은 강경한 태도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상 울릉도가 갖는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항의를 받은 일본은 러시아의 벌목 금지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일본인들의 울릉도에서의 주거권을 주장하여 울릉도 문제에서 러시아를 배제시키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문제로 몰고 가고자 하였다. 
 
 이에 일본은 자국인의 울릉도 거주 기반을 종래의 벌목에서 어업으로 전환하여 이주어촌을 형성하고자 하였으며, 울릉도는 일본에 의한 어업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렇게 울릉도에서는 일본에 의해 오징어 어업이 시작되었고, 울릉도 오징어 어업의 처음 시작 시기를 1902~190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해에 위치한 시마네현의 오키도는 일본에서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자 세금 납부에 오징어를 사용했을 만큼 유명한 오징어 어장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시기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연안 어장의 부족 및 연안어업의 정체가 이어지자 오키도의 어민은 새로운 어장을 찾아 울릉도로 오게 된다. 울릉도로 온 오키어민들은 울릉도가 대규모 오징어 어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의 중앙정부 또한 어촌의 궁핍화를 해결함과 동시에 제국주의의 확장이라는 이해가 맞았으므로 자국민의 조선 어장 진출을 적극 지원하였다. 울릉도에서 가장 가까운 오키섬 어민을 전략적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일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오키섬의 어민들이 왕래할 수 있는 배를 개조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오키섬이라는 곳은 일본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로 소작민이 4~50%였고, 오징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소작료도 낼 수 없는, 일본 내에서도 가장 극빈층이 오키섬의 어민이었다. 또 오키섬 어민이 일본에서 오징어 잡이 하는 방법은 지금처럼 독도 근해나 먼바다에서 하는 게 아니고 강꼬처럼 작은 배에다가 한두 명이 노를 저으면서 육지와 가까운 연안 근처에서 오징어잡이를 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많이 잡히던 오징어 어획량이 감소하고, 풍어와 흉어의 간격이 빨라지기 시작하니 그에 대한 대책으로 일본 정부는 발달된 오키도의 오징어 어업을 울릉도에 이식해야겠다는 발상이 나오게 된다.

 여기에서 하나 생각할 게 있다. 우리나라 다른 도서 지역이나 바닷가 마을은 토착민들이 수백 년 동안 그 지역에 거주, 관리하였기에, 처음 일본 사람이 들어왔을 때 일본인들에게 텃세 같은 알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권력이 있었지만, 울릉도는 빈 섬으로 있으면서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이 거의 동시에 거주하기 시작하는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울릉도는 분명 조선의 영토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울릉도의 경제적 주인이 누구였느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 사람들은 일본과 울릉도 간 항로가 연결되어있어 수시로 큰 배를 타고 울릉도에 들어와 본인이 필요한 나무나 울릉도에서 많이 났던 콩들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서 돈벌이할 수 있었지만, 울릉도에 농업인으로 들어온 조선 사람들은 농업만이 유일한 경제 활동이고 육지로 오가는 정기 여객선 또한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울릉도에서 자급자족해야 하는 상황으로, 일본인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울릉도는 땅이 척박하여 곡식은 안되었으나, 콩과 감자는 잘 되었다. 그 또한 일본인들이 가지고 온 공산품이나 식품과 바꾸어야 했었는데 소면 375g에 콩 5되, 석유 1말은 콩 1섬 2말, 설탕 375g에 콩 5되, 성냥 1봉지에 콩 5되였다고 하니 울릉도 사람들은 일본인에게 경제 활동의 주도권을 빼앗겨 삶은 점점 더 궁핍해졌고, 또 일본에서도 하층민이었던 오키섬 어민들에게 오징어 잡이 방법을 배워야 했던 울릉도 내 조선인들의 고달픔을 글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분명 우리 땅이지만 식민지 시대를 거쳐 1945년 해방될 때까지는 울릉도의 경제적 주인은 일본 사람들이었다. 조선 정부는 울릉도에 들어온 사람들에 대해서 무책임하게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입도만 시켜 놓고 이 사람들의 생활은 그냥 알아서 자력으로 하라고 한 것이다.

 오키지역 어민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오징어 어업은 울릉도 사회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09년 통계에 따르면, 조선인 902호 4,955명중 어업을 겸업하는 자는 480호 2,095명으로 약 40%의 주민이 오징어 어업에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개척 초기 농업을 중심으로 한 울릉도의 조선인 사회가 오징어 어업의 도입으로 인해 급속히 어촌화 한 것이다. 

 이후에도 울릉도 내 어민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오징어 어선의 수는 1909년 조선인 소유 30척, 일본인 소유 8척, 떼배 200척이었다. 1913년 조선인의 어선은 78척으로 증가하였으며 오징어 감찰어선(鑑札魚船)은 436척이 되었다. 여기서 오징어 감찰어선은 오징어 어업을 허가받은 어선을 말하며 대부분 일본인의 소유다. 

 1932년에는 발동기 어업이 도입되어 1932년 72척, 1942년에는 145척으로 증가하였으며 이 발동기 어선의 소유자 역시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특히 발동기선의 출현과 확대는 어로 기술상 큰 변화를 의미한다. 즉, 발동기의 등장으로 인한 어선의 동력화는 ‘기다리는 어법에서, 쫓아가는 어법’으로의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1척당 어획량도 강고나 떼배 등 무동력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울릉도 내 동력선의 도입, 확산은 일본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발동기선은 발동기 장착이 용이한 어선을 필요로한다. 이에 반해 당시 울릉도 내 대다수의 조선인은 영세 어민이었으므로 발동기선의 도입과 운영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는 민족 간 어업 경쟁력과 빈부격차의 심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오징어 어업이 확대되고 지속적인 인구 유입으로 번성했던 울릉도는 1914년 이후 오징어 흉어기가 도래함에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부민층은 점차 울릉도를 떠났다. 연도별 호수 및 인구수를 보면 1914년 조선인 8,597명, 일본인 1,404명으로 최고점이었던 1914년을 기점으로 일본인 인구수는 감소하였고, 

 특히 1920년에는 800명으로 급감하였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감소하였다. 이에 반해 조선인의 경우 일자리를 찾아 울릉도에 유입되었는데 유동적이기는 하나 대체 적으로 조선인의 인구는 증가추세에 있었으며 1932년에는 일만 명이 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척박한 토지의 경작과 오징어 어업을 겸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지속된 오징어 흉어는 울릉도 주민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특히 흉작이 더해질 경우 그 피해는 극심한 기근으로 나타났다. 삼림벌채로 형성된 농지는 오랜 기간 경작으로 황폐화되어 흉년이 빈번했고, 상거래의 기반이 허술한 상황에 오징어 어획량의 감소는 울릉도민의 생활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처럼 울릉도는 오징어 산업이 침체되면 울릉도 주민은 더욱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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