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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광이발관(등록문화재 제720-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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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도심의 考察(4)
최옥녀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영주)
Ⅳ. 근대역사 문화거리
3. 영광이발관
영주 영광이발관은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 있는 이발관이다. 2018년 8월 6일 대한민국의 국가 등록문화재 제720-4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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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광이발관 내부 모습 |
| 영주지역 이발업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영광이발관은 지금 위치의 건너편에 1930년대 있었던 국제이발관에서 시작된다. 해방 후 국제이발관은 시온 이발관으로 변경되었고 1970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경영주가 인수하여 이름을 영광이발관으로 고치고 50년 넘게 영업해 오고 있다. 영광이발관은 2층 상가 목조건축물이다.
4. 영주동 근대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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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주동 근대한옥(등록문화재 제720-3호) |
| 영주시 영주동 근대한옥은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건축물이다. 2018년 8월 6일 대한민국의 국가 등록문화재 제720-3호로 지정되었다.
고택의 원형은 명나라 황제가 자신의 어머니의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이석간을 통해 환후가 쾌차되어 그 보답으로 아흔 아홉칸 짜리 본채와 별채 여러 채로 나뉜 기와집을 지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현재 본채 자리에는 안영빌라가 자리하고 있으며 1920년에 신축한 개량한옥인 별채는 ㅁ자형으로 정면 7칸, 측면 6칸의 규모로 남아 있다. 고택의 별채로 한옥 주택의 건축형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의원과 하숙집으로 사용되어 일제강점기와 근대산업시기의 생활상이 축적되어 있는 가치가 있는 곳이다.
1) 공주이씨가 입향한 마을 두릉촌
공주 이씨가 영주에 들어와 살기는 세종 때 판서를 지낸 공숙공(恭肅公) 명덕(明德)의 증손으로 단종 때 임피(臨陂) 현령을 지낸 이진(李畛)에서 비롯된다. 단종이 수양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진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벼슬을 버리고 영남으로 내려와 영주 두릉촌(杜陵村,두서杜西)에 숨어 살았다.
영주 입향조 이진李畛은 이석간의 증조부(曾祖父)이다. 이진이 영주로 이거한 이유는 처가가 영주에 있기 때문이다. 이석간(1509년~1574년)은 자는 중임(仲任)이며 생원 함(諴)의 아들로 영천 두서에서 태어나 14세 때 영주의 귀원(龜院)에서 아버지 이함(李諴)과 함께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1534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1541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 물러났다.
의술(醫術)로 고명하여 여러 신기한 일화를 남겼으나 문헌에는 그런 사실이 전하지 않는다. 명나라 황태후(皇太后)의 괴이한 병을 고쳐주고 황제에게 받았다는 천도(天桃)씨로 만든 한 쌍의 술잔이 가보(家寶)로 보존되고 있다. 퇴계 문하로 퇴계 임종 시 마지막 첩약을 지어드렸다고 『농암집聾巖集』에 전하며 당대 명사들과 사귀었다. 조선중기의 의서인 『사의경험四醫經驗』을 저술하였다. 1644년 출간된 『사의경험四醫經驗』은 그가 평생 경험한 임상처방을 근거로 만든 의방서(醫方書)이며 석방(石方) 또는 석간방(石澗方)이라고 한다.
그는 평생 초야에 묻혀 전래되어 내려온 각종 의서(醫書)들을 읽으며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면서 의학과 학문연구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의(儒醫), 명의(名醫), 신의(神醫)로 팔도에 이름을 떨쳤다.
2) 天下名醫 李碩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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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석간의 경험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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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간에 대하여 공주이씨 문중에서 대대로 구전(口傳)이 되어 온 이야기가 있다. 지금부터 500여 년 전 영천군(옛 영주) 뒷새라는 마을에 이석간이란 의원이 살고 있었다. 그는 학식이 높고 성품이 어진 선비로 널리 인술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난치병도 그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척척 고쳐 ‘천하명의’란 명성을 얻었다.
하루는 젊은 부인이 찾아왔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라고 묻자 부인은 “저는 혼인한 지 일 년쯤 되었는데 남편의 몸이 날이 갈수록 작아지더니 지금은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품속에서 작은 인형 하나를 꺼내 놓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이고 수염이 난 것으로 봐서 어른임에 틀림이 없었다.
석간은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내가 한 달 동안 치료법을 연구해 보겠으니 가서 기다리시오”라고 했다. 부인은 “꼭 고쳐주십시오.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인형 같은 남편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이석간은 눈앞이 깜깜했다. 의서란 의서는 다 찾아봐도 이런 병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느덧 한 달이 지나가고 그 부인이 또 찾아왔다. 더 작아진 남편을 품 안에서 꺼내 놓았다. 석간은 울상이 되었고 한 달만 더 여유를 달라고 했다. 실의에 빠진 석간은 몸져눕게 되자 의원을 그만두고 도망칠 생각을 하게 됐다. 석간은 의관정제(衣冠整齊)하고 집을 떠나 소백산 죽령고개로 망연(茫然)히 걸어갔다. 그때 “영차! 영차!”하면서 이상한 사람이 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등이 붙은 두 사람이었다.
“여보시오 선비, 혹시 조선의 명의 이석간을 아십니까?” “알지요. 그런데 이석간은 병자를 고치지 못해 도망치고 없는 줄 아옵니다만 ……” “허참! 그럼 천하명의란 헛소문이었군요. 먼 길 허행할 뻔했군. 우리는 집으로 돌아갑시다”라며 발길을 돌렸다.
이때 석간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그 무엇이 있었다. 석간은 그들을 따라가 다급하게 물었다.
“여보시오, 이석간이 못 고친다는 병은 어른이 아이가 되는 병인데 의서에도 없고 보도 듣도 못했던 병이랍니다.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들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어릴 때 젖배를 주린 것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 병이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하고 물으니
“첫아이 낳은 1천 집 모유를 서 말 세 홉 모아 세 번 목욕시키면 낫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석간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등 붙은 사람이 가르쳐 주는 대로 했더니 그는 정상인으로 돌아와 남편 구실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 후 젊은 부부는 이석간을 아버지라 부르며 한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석간의 명성은 멀리 중국까지 알려졌다. 하루는 중국 사신이 조선 조정에 와서 말하기를 “영천 땅에 살고 있는 ‘의원 이석간’을 중국에 보내 달라”며 황제의 친서를 내놓았다. 조선 임금님은 “이석간을 중국으로 보내도록 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석간은 사신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황궁으로 가서 황제 앞에 서게 됐다.
“의원 이석간은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들었소. 황태후가 병이 깊어 중국에 있는 명의란 명의의 약을 다 써 봤으나 소용이 없었소. 이제 이석간 천하명의를 불렀으니 꼭 고쳐 주기 바라오”라고 했다.
이석간은 황제의 안내에 따라 금은보석으로 장식한 황궁의 여러 방을 지나 황태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희끗한 모후가 누워 있었는데 얼굴은 떠오르는 달 같고 손은 백옥 같아 아무 병도 없는 것 같았다. 진맥하니 맥박도 정상이었다.
“폐하, 황태후는 아무런 병이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고하니 황제는 황태후의 이불을 걷어붙이며 “이것을 보시오”라고 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모후의 하반신이 뱀같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석간은 깜짝 놀라 아무런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황제는 “고칠 수 있겠는가?”라고 다그치니 석간은 ‘못 고친다 하면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예, 한 달의 여유를 주시면 치료 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석간은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고 연구와 고민을 거듭하다가 문득 죽령 고개에서 만난 등이 붙은 사람이 생각났다. 석간은 천지신명께 ‘등 붙은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밤을 새워 기도를 이어갔다.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꿈에 등 붙은 사람이 나타나 “나는 소백산 산신령이다. 지난번에는 (어른이 아이 되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이번엔 또 무슨 도움이 필요한가?” “예, 소백산 신령님, 황태후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을 내려 주십시오”
소백산 산신은 “황후는 오랜 황실 생활을 하다 보니 기(氣)가 막혀 하반신이 뱀과 같이 변하고 있다. 금침(金鍼)을 배꼽에 꽂아 두면 기(氣)가 살아나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석간이 잠에서 깨어보니 손에 금침이 쥐여져 있었다. 석간은 그길로 황제를 알현(謁見) 하고 당장 모후 치료에 들어갔다. 십여 일을 꼬박 치료한 결과 황태후의 몸은 서서히 회복되어 갔고 한 달이 되는 날 거의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석간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석간은 “저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집이 없어 곤란을 겪고 있으니 작은 집이나 한 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석간은 6개월간 중국의 명산대천을 구경하고 전의(典醫)란 벼슬을 받아 귀국길에 오르게 됐다.
귀국하는 날 황제는 송별연을 베풀고 금은보화와 비단도 하사했으며 황실의 귀한 술과 천도복숭아 등 진귀한 음식상을 내놓았다. 석간은 난생처음 맛본 천도복숭아가 얼마나 맛있는지 그 씨를 도포 자락에 넣어 가지고 와 술잔을 만들었는데 후손들은 그 술잔을 귀하게 여겨 혼례 때 의례용 잔으로 사용도록 하였다. 석간이 압록강을 건너 여러 날이 걸려 영천의 집에 도착하니 전에 살던 집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금방 지은 99칸 큰 기와집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나라 황제가 지어 준 집이다.
2008년 공주이씨 문중으로부터 천도복숭아 쌍잔을 비롯한 소장전적(所藏典籍)을 기증받은 소수박물관은 2011년 ‘영주의 공주이씨 사람들’ 「儒의 道로 仁의 術을 펴다」란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3) 사의경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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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의경험방 |
| 4명의 의원(이석간李石幹·채득기蔡得己·박염朴濂·허임許任)이 평생에 걸쳐 경험한 임상처방을 근거로 편찬한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은 임상을 통하여 체험으로 익힌 실증적이고 살아있는 한의학 전문서적이다.
특히 여기에 실려있는 300여 종의 생약은 그 당시의 약에 대한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 당시 민간 의방서로 애용되었던 이 책은 『경험방』·『본초서』·『동의문견방』 등의 출전을 밝혀서 내용을 충실히 하였고 병의 증세를 우리말로 해석하여 경험방의 고증과 그 지식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남겼다.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은 간행년이 불분명한 두 종의 목판본과 다수의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 종의 목판본은 수진본(袖珍本)으로 휴대하여 이용하기 편리하게 만들어진 점으로 볼 때 임상에 빈번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매우 다양한 형태의 필사본이 광범위하게 산재되어 있다는 것은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이 전통사회 의가들에게 매우 애독되었음을 방증한다.
5. 구 영주역 7호 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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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 영주역관사 7호(등록문화재 제720-2호) |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 있는 구 영주역 7호 관사는 일제강점기 때 건축물이다. 2018년 8월 6일 대한민국 국가 등록문화재 제720-2호로 지정되었다. 1935년에 건축된 구 영주역 관사는 중앙선 철도 개설공사에 참여한 공병대 기술자들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다가 나중에는 영주 역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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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호 관사 건물 |
| 영주가 근대도시로 발전한 계기는 1942년 중앙선이 개통되고 영주역이 중간역으로써 역할을 하면서부터이다. 이 관사는 중앙선 개설을 위해 건립한 것으로 철도관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시 생활사적 가치가 크다. 목조 일식관사 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내부 공간구성, 외관 형태 구조 및 원형의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큰 대지에 동서로 길게 지은 일본식의 목조 단층집이다. 이 건물은 건립 당시부터 다른 가옥들과 크게 달랐다. 한집인지 알고 들어가면 가운데 담이 있어서 지붕은 하나인데 집은 두집이라 이색적이다. 7호 관사는 대문을 앞으로 내어서 사용하였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 양옆으로 회양목과 연산홍을 심어서 봄이면 예쁜 연분홍 꽃을 활짝 피웠다. 마당 귀퉁이 빈 공터에는 고추, 상추, 오이를 심어서 채전 밭으로 활용하였다.
6. 구 영주역 5호 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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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주역관사 5호(등록문화재 제720-1호) |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 있는 구 영주역 5호 관사는 일제강점기 때 건축물이다. 2018년 8월 6일 대한민국 국가 등록문화재 제720-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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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호 관사 창고 |
| 5호 관사에는 주인이 살고 있다. 역장들이 살던 곳이어서 집 외에도 마당이 꽤 넓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 창이 바깥으로 튀어나왔고 가운데 마루를 통한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1935년 당시 건물임에도 관사 내부구조는 실내에 붙박이장, 목욕탕, 화장실이 들어가 있는 고급 주택이었다. 모두가 초막집, 판자집, 벽돌집에 살 때 철도관사는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던 건축물이다. 아직도 조개탄을 넣던 외부 시멘트 구조물을 볼 수 있다. 앞에 있는 시멘트 집에는 철도에 종사하는 간부나 역장이 살고 뒤에 지은 목재집은 직급이 낮은 역무원이 살았다.
Ⅴ. 맺음말
소백산이 품고 있는 고을, 영주 도심의 형성과 발전과정은 학교와 관공서의 건립에 따라서 인구가 증가하며 중앙선 개통 이후 榮州驛의 건설과 더불어 도심이 확장되어 경북 북부지역의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음을 볼 수 있었다. 철도의 건설은 물류와 인구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영주로 인구가 모여들어 상권이 크게 형성되었다. 1961년 서천이 범람하여 영주시 전체가 물에 잠기는 대참사를 겪으면서 서천(西川)의 물길이 현재의 위치로 변경되었다. 남산평야는 사라지고 신영주로 도심은 확장되었으나 동구대와 서구대의 아름다운 풍광은 옛 선현들의 기록과 사진으로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소지왕조(炤智王條) 벽화와의 사랑이야기 속에 소지왕이 영주를 순행(巡行)했다는 것은 영주가 신라의 땅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을 하지만 소지왕이 왕의 권위로 오지 못하고 미복 차림으로 자기의 옛 땅을 수차 숨어서 부자유스럽게 영주를 순행했다는 것은 고구려군(高句麗軍)이 주둔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영주도심에는 근대역사문화거리와 삼판서(三判書) 고택,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磨崖如來三尊像) 및 여래좌상(如來坐像)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영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물부서(人物富庶)라 기록한바 같이 안향(安珦), 정도전(鄭道傳)등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된 고장이기도 하다. 구한말 소백산 등지에서 의병투쟁의 불길이 타올랐으며 일제 식민통치하에서는 대동상점과 풍기광복단이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주도적(主導的)으로 이끌었다.
끝으로 영주는 2008년 문화의 거리 기반 조성 사업부터 삼각지 마을의 시민광장 및 공원조성, 영주동 자전거공원, 관사골 및 효자지구 새뜰사업, 남산 선비지구 및 한절마지구 뉴딜사업 등으로 고령화 추세와 저성장, 인구감소에 대비하기 위한 대책으로 국비지원을 받아 시행된 이 사업은 2년 연속 최우수 도시재생사업으로 선정되었으며 국내외 관계기관들의 벤치마킹 사례로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여러 컨텐츠 발굴을 통한 구도심 관광 활성화로 재생사업의 파급효과를 기대하며 앞으로 많은 관광객(觀光客)들이 찾아 와 보는 관광을 넘어서 배우는 관광, 느끼고 체험하는 관광이 되어 영주를 우리나라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이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도 영주가 다시 한번 도약하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강주고금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영천군편 김부식,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83 명문당,『고문진보집』 전집, 2003 송지향,『영주·영풍향토지』 여강출판사, 1987 이희경, 「설수외사」성균관대학교, 2011 영주문화원, 「영주의 마을」 영주문화원, 영주향토사연구발표회, 2005 영주문화유산보존회, 「영주의 題詠」 2022 영주시, ‘영주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 국보승격을 위한 학술대회 2023 (정성권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의 제작시기와 조성배경」) 영주시사편찬위원회 『영주시사』, 2010 김덕우, 영주의 원도심, 2020 영주시민신문(http://www.yjinews.com) 끝
이상으로 영주 도심의 고찰을 모두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