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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새재 아리랑비(사진 경상북도 문경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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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26)
이정록 26. 새재아리랑
영남제2관인 조곡관(鳥谷關)을 지나면 영남제3관인 조령관(鳥嶺關)으로 오르는 새재 길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곡관을 종점으로 올랐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기 때문이다. 조령관으로 오르는 길은 지금까지 온 길에 비하면 경사가 약간 있는 길이다. 적적하기는 하지만 조용하고 오붓한 맛도 있다. 발밑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다정한 연인처럼 가만가만 말을 걸어오고, 미끈하게 잘 자란 나무들이 이따금씩 정겨운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제2관문인 조곡관 바로 뒤편의 시비(詩碑)가 있는 오솔길을 지나서 1km 정도 올라가면 자연석 화강암에 새겨진 <문경새재 아리랑> 비가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아마 아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들 가슴 아주 깊은 곳에 먼 먼 향수처럼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우리나라 민요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전국 방방곡곡 어디를 가도 아리랑이 없는 곳이 없다.
아리랑은 옛날부터 식견이 높은 사대부가에서 부르던 노래가 아니었다. 이름조차 알 수없는 사람들이 지어 부르고 어깨 너머로 배워 부르고 했던 백성들의 노래, 민초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그래서 민요(民謠)인 것이다.
노래에 재능이 없고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아리랑 노랫말 한 두 구절 모르는 사람이 없고 비록 애써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구든 아리랑 한 곡조쯤은 뽑아낼 수 있는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다.
아리랑이 대중화 되어 널리 불러지게 된 시기는 1865년 경복궁 중창 때라고 한다. 백성들은 원납전(願納錢)을 강요받아 생활이 어려웠고, 전국에서 경복궁 중창에 부역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과 부모님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신세 한탄조의 아리랑이 널리 불러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에 부역에 동원된 많은 사람들이 문경 새재를 넘었고, 문경새재 물박달나무도 건축 연장의 재료로 쓰이기 위해 경복궁 중수 공사장으로 갔고, 이곳 문경새재에서 널리 불러지던 토속소리(문경새재 소리)도 이들과 함께 서울로 갔다고 한다. 이렇게 서울로 간 문경새재 토속소리는 경복궁 중수 공사장에 동원된 많은 부역꾼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고 이것이 문경새재 아리랑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아리랑이 처음으로 서양식 기법을 사용하여 음계로 된 악보가 생겨나기는 1896년 당시 우리나라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미국의 할버트(Honer Bhlbert)박사에 의해서였다. 할버트는 『Korea Repository』라는 잡지에 ‘Korea Vocal Music'이란 제목으로 당시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있던 아리랑을 채보하여 서양식 기보법으로 발표하였다.
할버트 박사는 채보된 아리랑을 소개하면서 아리랑이 1883년부터 대중적인 애호를 받게 되었으며 제 각각 다른 내용이지만 후렴 부분은 변하지 않고 쓰인다고 하였다. 아리랑의 이런 해설과 함께 조선 사람에게는 아리랑은 쌀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있는 말을 덧붙였다. 쌀은 조선 사람에게는 몸을 지탱하는 양식이라면 아리랑은 조선인의 혼을 지탱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아리랑은 조선 사람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 애환(哀歡)을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서양 선교사 할버트 박사에 의해 채보된 아리랑이 제일 먼저 소개되어 실린 아리랑이 문경새재아리랑이었다. 서양 사람의 눈에 비춰진 원조 아리랑으로 문경새재 아리랑이 선택된 이유를 이 방면에 많은 관심을 가진 이들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라는 후렴 부분의 아리랑고개의 합성어에 주목하고 있다. 아리랑고개의 합성명사가 아리랑과 문경새재의 결합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아리랑고개가 그냥 막연한 고개가 아닌 실재하는 고개에서 형성되었다는 전제(前提)를 한다면 이 전제의 대상이 바로 문경새재라는 이론이었다.
김하돈은 그의 저서 「고개를 찾아서」에서 “백두대간을 넘어가고 넘어오던 숱한 민중들의 발품의 역사 또한 그 길섶에 고스란히 묻혀있다. 조선왕조 500년이 흐르는 동안 새재는 그렇게 나라 산천에 걸린 수많은 고개 중의 고개로 무릇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가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문경새재는 문경사람들만의 고개는 아니었다. 조선 사람 모두의 고개였다. 새재를 넘었든, 넘지 못했든 간에 조선사람 모두의 가슴 속에 간직한 응어리가 문경새재이고 굽이굽이 눈물을 흘리며 넘어야 하는 운명같은 고개가 문경새재였다. 그렇기에 숱한 애환이 담긴 고갯길이며 고달픈 역사가 함께한 고갯길이며 겹겹이 설움이 쌓인 고갯길이 문경새재였다. 이런 문경새재가 아리랑과 합성하여 아리랑고개 라는 합성어가 탄생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무리한 추측은 아닌 성싶다. 아무튼 문경새재 아리랑은 당시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고, 또한 많이 불러지고 있었고, 당시 조선 최고의 유행하는 소리였고, 인기 있는 노래였다. 문경새재 물박달 나무 홍두께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께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 넘어를 갈 제 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이것은 문경새재 아리랑의 대표 사설이다. 아리랑은 누구든 아리랑 곡에 맞추어 노랫말을 지어 부를 수 있는 매력이 있다. 이런 매력 때문에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더 친숙해졌을 것이다. 문경새재 아리랑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 사설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 많이 불러졌던 사설 몇 자락을 소개한다. 문경아 새재고개는 윈 고갠지 구비야 굽이굽이가 눈물이 나네 문경아 새자야 시무푸리남근 도루깨 노리로 다나가네 문경아 새자야 찹싸리남근 꼬깜아 꼬지로 다나가네 조령산 허리에 해는 지고 성주봉 꼭대기에 달떠오네 신북천 앞 냇가 물안개 돌고 요성들 풍년재 어깨 춤 추네 꽃 떨어진다고 니 통곡마라 꽃 떨어지고야 열매 맺는다 세월아 네월아 오고가지 말아 아까운 이내 청춘 다 늙어 간다 날 가라네 날 가라하네 삼베 질삼 못한다고 날 가라하네 삼베 질삼 못하는 건 배우면 하지 아들 딸 못 낳은 건 어찌하나 삼베 질삼 못하는 건 대단하고 아들딸 낳아준 건 대단치 않나 산도 설고 물도 설은데 누구를 바라고 여기를 왔나 어스름 달 밤에 홀로 일어나 안 오시는 님 기다리다 새벽 달이 지샛네 십오야 뜬 달아 말 물어 보자 우리 님 계신 곳 비차 주렴 담뱃불이 번쩍번쩍 님이 오는 줄 알았더니 저 건너 개똥불이 나를 놀리네 문경새재 고개는 무슨 고개길래 영남의 선비가 다 넘나 든다 오르막길 40리 내리막길 40리 80리 문경새재 해가 저문다 논뚝길로 오시려나 밭뚝길로 오시려나 나날이 바래여도 우리 선비 아니 오내 오늘 올까 내일 올까 손꼽아 바래다가 새재 넘는 과거 선비 우리 선비 안 오든가.
다음편은 새재도적과 영창대군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