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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형평사운동醴泉衡平社運動의 이해理解(2)


조진향 기자 / joy8246@naver.com입력 : 2025년 0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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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8.17.전조선형평사 제8회 정기대회 포스터


예천형평사운동醴泉衡平社運動의 이해理解(2)
-‘백정白丁’ 인권회복을 위한 신분철폐운동


조윤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예천)

Ⅱ. 예천 형평사 사건 醴泉衡平社事件


2. 형평운동의 전국적 확대

 형평분사 습격사건을 전해 들은 서울 형평사 총본부에서는 1925.8.19. 긴급 회의를 열고 결사대를 보낼 것을 결의하였다.

일, 이번 예천사건을 각 분사에 통지한다.
이, 각 분사와 지사는 임시총회를 여는 동시에 결사대를 선정 보고한다
삼, 사실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충남지사, 수원지사, 본부로 부터 특파한 3명의 보고를 들은 후 충남에서 조직한 결사대를 제1착으로 보내고 제2착으로 정위단의 결사대를 보내며 제3착으로 경기결사대를 보내고, 최후의 방비를 하기 위해서는 총출동의 준비를 해 둔다.
사, 구제반을 조직하여 구타당한 일반 사원을 구호한다.

 라고 형평사중앙회 창원에서 예천사건에 대한 결연한 대책 의지를 보였으나, 일본 총독부경찰국에 의해 게제된 신문의 차압 조치로 보도가 통제 되었다. 또 경찰의 저지와 방해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통제와 방해는 형평사원들의 의지를 더욱 단합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주게 되고 특히 사회주의 운동단체나 청년운동단체들이 분개하여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이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경찰당국이 방관하는 태도를 보여 형평운동단체나 기타 청년운동단체에서 분개하고 있었다. 이에 경북 경찰청에서는 경찰이 방임하는 것이 아니고 폭행자는 엄중히 처벌할 것이며, 이 문제 해결에 대해 연구 중이라고 밝혔다. 이 형평분사 사건에 대해 조선청년총연맹에서 가맹단체인 상주청년회, 용궁청년회에 그 사건의 전말과 전후를 조사 보고하라고 하였다. 

 사건이 점점 연장되어 중대하여 감에 따라 총동맹에서 상무위원회를 열고 상무위원 이영(李英)을 특파하여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면서 농민을 선동하는 배후 세력이 있다고 보고 사회주의 운동자들은 분기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청년총동맹에서는 인근 가맹단체인 상주청년회와 용궁청년회에게 사건의 진상과 선후책을 조사·보고하도록 하는 동시에 직접 상무집행위원 김영(金英)·강훈(姜壎)을 특파하여 상세한 진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재경 9개 청년운동단체들-경성청년연합회 산하의 경성노동회·서울청년회·경성노동청년회·사회주의자동맹회·적박단·자유노동자조합·노동교육회·경성여자청년회·사직동청년회-과 모임을 하고, ①조사위원을 파견해서 진상을 조사할 것, ②무산대중 해방운동과 형평운동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일반 대중에게 선전할 것, ③이번 충돌의 책임자를 징계할 것 등을 결의하고 그 실행위원으로 임종만(林鐘萬)·김사국(金思國)·김석현(金碩鉉)·김영만(金榮萬)·김영배(金英培) 등을 선출하였다. 서울청년회를 위시한 이들의 활동에 경찰은 민감한 반응을 하여 즉각 취소명령을 발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자 서울청년회원 김석현을 구인하기까지 하였다.

↑↑ 전조선형평사 제6회 정기대회 포스터


 8월 18일 재경사회주의 각 단체는 경성부 견지동 경성청년연합회관에 모여 조사위원을 파견하여 그 진상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서울에서는 8월19일 서울에서는 조선총동맹을 비롯하여 각 청년단체, 각 노동 23개 단체의 대표 50여 명이 경성 시내에 있는 재동(齋洞) 44번지 4개 단체 합동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대책을 논의하고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 결의문에서 “이번 사건에 희생된 동지들을 위문하고 사건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대표 2명을 파송(派送)하기로 한다”고 하면서, “이번 사건은 형평운동의 근본 의무를 이해치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연설 및 기타 방법으로 형평운동의 의의를 선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라고 하였다. 또 예천사건에 대해 낙원(樂園)동에 있는 한양청년연맹에서 열기로 하였다. 

 한편 형평사 중앙 본부에서 예천사건으로 격문을 발송한 본부위원 서광훈, 방인영이 종로경찰서에서 소환 취조하고 1주일간 구류를 당한 후 석방되었다. 9월 11일 돌연 서광훈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환 취조하였다. 그 내용은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9월 14일 조선청년동맹은 예천청년회, 예천노동회에 방향 전환을 경고하였다. 즉 이영의 조사보고에 의하여 예천청년회를 이번 사건의 책임자로 인정하고 간부를 동회(同會)로부터 축출하는 동시, 동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종래의 이류동체(異類團體)의 행동으로부터 무산운동(無産運動)으로 목적을 변경키로 경고한다고 하였다. 

 예천노동회는 그 회원이 반동운동에 다수 협동한 것에 대하여, 동회 현 간부로 하여금 인책 사임케 하는 동시에 형평사에 사과할 것을 경고하고, 예천경찰서의 금번 사건에 대한 경계가 태만한 내용을 철저히 조사할 것, 예천지방에 있는 본 총동맹단체로 하여금 예천무산운동단체를 적극적으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9월 17일 경성 와룡동에 있는 형평사 본부는 예천사건 때 출장 중이던 장지필, 이이소가 돌아왔음으로 서울 돈의동 열빈루(悅賓樓)에서 환영회를 열었다.

 9월 19일 화요회, 북풍회, 노동당, 무산자동맹 등 4개 단체 합동으로 경성 동대문 밖 청량관(淸凉館)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926년 2월17일 경성 와룡동 75번지 형평사중앙총본부회관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예천사건 당일 구타를 당하고 수 개월간 신음하다가 사망한 예천형평사분사원 김원준(金元俊)의 가해자를 상세히 조사한 후 상당한 처치를 하고 동 추도식을 형평본부에서 거행하고 따라서 전선(全鮮) 각지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9월17일 개성형평사를 비롯하여 전국 각 형평사에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3. 예천사건 관계자 검속(檢束) 및 재판결과

 이 사건으로 청년회장 김석희 외 23인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예천경찰서는 또 다시 10여 명을 구금하여 사실을 심문하였다. 안동지청검사국 청수원(淸水源)검사가 1925.8.17.안동 자혜의원에 입원 중인 장지필, 이이소를 방문하여 피해 상황을 심문하였고, 8월18일에는 서기 2명을 대동하고 예천에 출장하여 사실을 조사하는 동시에 대구경찰부 고등계 길전(吉田), 최석현(崔錫鉉) 등 양 경관이 예천에 출동, 사실을 조사하는 등으로 시민은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예천사건의 범인 12명은 그 동안 예심을 마치고 유죄로 결정되어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부치어 소요상해훼기(騷擾傷害毁棄) 등의 죄명 아래 1926년2월2일 동법원 제2호법정에서 김천(金川)재판장의 주심 아래 소야(小野), 강(姜) 두 배석판사와 산택(山澤)검사의 입회로 제1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이 사건의 피고인들이 예천면 노상동의 남흥세, 이수암, 육용택, 박만수, 황우춘, 서복술, 장재화, 김흥운, 김경만, 동면 동본동의 명용이, 황인한, 동면 남본동의 금병익 등 12명에 대하여 차례로 주소 성명을 물은 후 사실 심문과 그 외는 다음날로 미루고 페정하였다.

 12인 중 재판에 넘겨져 남흥세(南興世) 외 5인은 징역 6개월, 육택문(陸澤問) 등 2인은 벌금 50원, 황우춘(黃又春) 등 5인은 벌금 30원의 판결이 내려지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예천청년회에서는 사건 토의를 위하여 1925.8.23. 읍내 불교포교당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문하영은 이르기를, “이번 분규 사건을 예천청년회 선동인 듯하다는 모보 기사를 따질 필요가 있다”라는 의견이 있었으나, 전 회장 김석희가, “그것은 분명한 보도가 아니오. 그럴 듯하다는 의미입니다”라고 하여 따지지도 않고 가결되었고, 다시 이대일이, “원인은 예천사회 교화 부족과 또 형평사 기념축하 당시의 감정문제이었다”라고 하여 분규 진상을 인쇄하여 각 사회단체에 보도할 것, 입원치료한 형평사원을 방문할 것을 결의하였다. 동년 12월18일 전 예천청년회장 김석희 등이 명예훼손죄로 안동 12개 단체 대표들을 상대로 고소를 제기하여 공판을 하였는데, 피고 이준태 대신에 김기진이 왔으므로 공판은 연기되었다.

 한편 예천청년회장 김석희와 장수암(張守岩) 등은 안동의 사회단체 대표 17인과 조선일보 본사편집인 및 안동지국장 김남수 등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였다. 이들이 예천사건 이후 김석희 외 13인을 예천사건의 선동자라 하여 안동소재 11개 단체의 결의로 비인간적으로 대우했다는 것과 그 결의를 조선일보에 게재하였다는 이유였다. 이들의 고소로 13인은 기소되어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 공판에 회부되었다. 복심에서는 화성회의 김원진(金元鎭)·유연건(柳淵建)은 징역 8월, 안동청년회의 박영수(朴永壽) 외 6인은 징역 6월을 각각 구형받았다.

예천사건 경위

1923.8.9. 예천형평사분사 창립, 창립주동자: 김도천(金道天), 박학선(朴學先) 등, 창립회원: 약 700명
1925.7.5. 오후 9시 분사장 박원옥(朴元玉) 방에서 간부회를 개최하고 오는 11일 임시총회 개최 건과 창립2주년기념축하식을 성대히 거행할 일 등의 결의가 있었다. 이 날 예천신흥청년회원 다수 입사함. 조선일보 1925.7.10자
1925.7.11. 임시총회 개최
1925.8.9.  창립2주년 기념식 거행, 사무실: 예천읍 남본1리 제방 옆 매립지(埋立地), *1925.5.1.예천시장, 남본리 매립지에 신설(그 전에는 장시가 도로변에서 열렸다.) 예천청년회 회장 김석희의 축사 시 내용 문제로 분란이 야기되어 농민 300여 명 식장 습격
1925.8.10. 농민들 200여 명이 날이 저물자 재거 형평분사 습격하며 반형평운동 전개, 형평사원 2인은 중상, 경찰서는 비상소집, 시내상점은 철시하고, 시민은 전전긍긍. 예천형평분사 사장 박원오(朴元五(玉?)) 사임. 조선일보 1925.8.14.자
1925.8.11. 수천여명 농민 3차 형평분사 습격, 23명 경찰에 검속됨. 동아일보 1925.8.16자 
1925.8.12. 형평분사, 예천경찰서에서 해산명령 내림. 동아일보1925.8.16자  
1925.8.15. 경북 사상단체인 화성회가 예천형평분사 습격사건 진상조사단을 예천에 파견
1925.8.17. 경북여자청년회 등 경북10개단체 습격사건 대책회의,진상규명 조사 실시키로 함
1925.8.18. 재경해방운동단체, 경성청년연합회관에서 습격사건 조사단 파견 결의
1925.8.19. 형평사 중앙총본부가 예천사건을 듣고 긴급회의를 열고 전국 형평사원의 총출동 의결 및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동아일보 1925.8.24.
1925.8.19. 몰비판한 반동적 비행, 예천형평사원 습격사건...인류평등의 대의로 보거나 피압박계급의 일치단결 필요로 보거나 또는 민족으로서...노동회원이라는 신분을 가진 그릇된 차별적...형평사원의 대습격을 자행한다는 것은 매우 애석할 일대실책이다....  조선일보사설 1925.8.19.
1925.8.21. 각지역 사상단체 조사위원 파견 결의
1925.8.25. 대구 10여개 사상단체, 예천사건 진상 조사 및 원조 결의
1925.9.2. 마산구락부회관에서 마산 9개단체 예천사건 대책결의. 9.7일자 조선일보
1925.11.9. 예천사건으로 19인을 고소. 11.12.조선일보
1925.12.12. 예천사건으로 10인 기소, 사실보도한 것이 명예훼손이라고. 12.12.조선일보
1926.1.29. 예천사건공판은 검사가 또 연기
1926.2.3. 천형평사사건의 공판에서 50원의 벌금형을 언도
1926.2.5. 예천사건 벌금구형, 피고 9인 전부
1926.4.9. 문제의 예천사건, 1심에서 벌금판결, 복심에서는 징역 언도, 김원진 류연건 징역 8개월, 박영수 외 6인 징역 6개월
1929.6.30. 예천군내 거주 백정 147호 891명<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 *양반과 유생은 16개 성씨에 1,145호 6,118명이다.

다음편에는 형평사 전국지사, 분사의 예천사건 대응 사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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