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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년 준공한 영주제일교회(등록문화재 제720-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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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도심의 考察(3)
최옥녀
경북향토사연구회 회원(영주)
Ⅲ. 도시의 형성과정과 격동의 시대
3. 영주 격동(激動)의 시대
1) 대동상점
대동상점은 대한광복회가 그 활동거점으로 이용한 상업조직이며 이는 박제선(朴濟璿)·권영목(權寧睦) 등이 중심되어 경영하던 잡화상점(雜貨商店)이었다. 그러나 그 실체는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목적으로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박제선은 1910년 당시 풍기 공립고등학교 훈도로서 평소 배일사상을 품고 있던 권영목과 뜻을 같이하여 1915년 8월 대동상점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1916년 이교덕(李敎悳)·정응봉(鄭應鳳)·류명수(柳明秀) 등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권영목과 이교덕은 영주 부호의 자제였으며 정응봉은 풍기에서 서당을 열었고 유명수는 박제선의 처남으로 보통학교 훈도로 있다가 참여하였다. 대동상점의 구성원을 볼 때 유림계열의 인사들만이 아니라 신교육을 받은 인사들도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비밀결사의 독립운동단체들은 그 활동 거점으로 상업조직을 활용하고 있었는데 대한광복회의 경우에도 매우 광범위한 상업조직을 이용하고 있었다. 대동상점도 이런 조직의 하나로 결성되었고 따라서 그와 연계된 활동을 하였을 것이다. 대동상점 관련인사들이 대부분 광복회 조직원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대동상점 사건의 판결문에 의하면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과 대동상점의 권영목이 접촉하고 있었고 또 이에 따라 행동한 것으로 보아 광복회와 관련된 조직이었음은 확실하다.
박제선의 판결문에 의하면 그는 국권회복 활동에 따른 비용을 얻기 위하여 영주에서 대동상점을 경영하다가 이것을 남만주로 이전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조선인을 규합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거사한다는데 동지들과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이라는 목표로 활동하던 대한광복회나 풍기광복단의 활동목적에 따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박제선은 만주·경성·영주를 부단히 내왕하면서 적절한 시기를 찾아 활동 무대를 만주로 옮길 것을 계획하였다. 1918년 영주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권영목이 영주 헌병분견소에 체포됨으로써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풍기에서도 광복단이 결성되었다.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결성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영주인들의 항일투쟁은 전국적으로 그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풍기광복단은 대한광복회로 발전하면서 국내는 물론 국외 만주 지역에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1910년 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식민 통치의 중추기관으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였다. 조선 총독은 입법, 사법, 행정은 물론 군사권까지 장악한 식민통치의 최고 권력자였다. 영주지역에도 헌병분대가 설치되었다.
또한 1913년 풍기군(현 영주시 풍기읍)에서는 의병 활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일제에 대항하기 위하여 항일비밀결사가 조직되었는데 그것은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열(柳璋烈) 등이 결성한 풍기광복단(豐基光復團)이었다. 풍기 광복단 결성의 주도 세력들은 하나 같이 다른 지역에서 풍기로 모여든 인사들이었다. 채기중은 함창군, 유창순은 전북 고창 출신, 한훈은 충남 청양, 장두환은 천안, 강순필은 상주, 김상오는 서울, 그 외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풍기는 『정감록(鄭鑑錄)』에 전쟁이나 질병이나 재해가 없는 십승지지(十勝之地) 가운데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구한말 혼란기에는 팔도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일제 침략과 더불어 출신지를 떠난 의병(義兵)이나 지사(志士)들이 모여들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채기중이 풍기에 정착한 후 국내외에서 전개된 역사적 격랑(激浪)들은 그의 투쟁의지를 더욱 고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10년 국권상실에 크게 충격을 받은 채기중은 1912년 중국을 여행하고 귀국 후 광복단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주요 활동은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무기 구입과 군자금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채기중과 박상진의 역할이 주효했다. 또 영주의 대동상점도 이에 합류하여 규모가 크게 되었다. 1915년 풍기 광복단은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일부 인사들과 합류하여 대한광복회로 재편되었다. 영주의 대동상점, 풍기광복단의 투쟁은 국내는 물론 만주 지역으로 활동이 이어졌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Ⅳ. 근대역사 문화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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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역사문화거리 |
| 영주 근대역사문화(榮州 近代歷史文化)거리는 2018년 문화재청으로부터 ‘선(線)·면(面)’ 단위 문화재 등록제도를 통해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720호로 지정돼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입체적인 보존과 활용 방안을 통해 새로운 명소로의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149-12 외 152필지에 해당된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 있는 영주의 근대생활사를 보여주는 역사문화공간이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철도 역사와 그 배후에 형성된 철도관사, 정미소, 이발관, 근대한옥, 교회 등 지역의 근대생활사 요소를 간직한 건축물이 모여있는 관사골에서 광복로 일대의 거리로써 영주의 근대생활사를 보여주는 역사문화공간으로 보존과 활용 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된다.
지정구역 내 건축물 유형은 전통과 근대의 다양한 목조건축물이 남아있어 지방 소도시의 근대기 건축양식 및 생활문화를 추측할 수 있다. 20세기 초 영주 도심의 형성과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핵심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1. 영주 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는 근대역사문화거리에 있으며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 있는 교회당이다. 2018년 8월 6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720-6호로 지정되었다. 11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영주제일교회는 2009년 4월 5일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영주제일교회는 영주지역의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가 언제 설립되었는지 「영주제일교회 85년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907년 태백산맥을 타고 죽령 소백산 남쪽 영주에 장치연, 엄응삼, 강재원 씨 등이 나귀를 타고 복음의 씨앗을 뿌려 1년 동안 10명의 신자가 생겨 구성공원 성 밑 정석주 씨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1909년 4월 이곳에 초가 3칸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였으며 초대 교역자 엄응삼 조사가 시무하여 30여명의 신자로 확장되어 열심히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1910년 3월 오월번 선교사와 강재원, 장치순씨 등의 노력으로 경북노회에서 ‘영주교회’로 정식명칭 허락을 받았다.
1915년 강명서숙을 설립하여 여성 교육을 실시하였다. 1926년 아동교육을 위해 유치원을 운영하고 영주 기독청년회가 조직되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목사와 장로, 전도사들이 구금 또는 옥고를 치렀고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었다. 1954년 5월 1일 기공 후 신도들의 노역봉사로 1958년 7월 25일 준공되고 11월 25일 교회 헌당식 창립 5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영주지역에서는 유일한 서양의 고딕식 건축양식을 차용한 절충양식의 근대건축물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근대 산업시기를 거치면서 영주시의 근현대사에서 영주 시민이자 신도들인 지역 주민들의 삶과 역사적 흔적들이 남아있어 전승 보전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크다.
영주제일교회가 영주 지역의 습속을 순화하였으며 뜨거운 마음으로 전도하여 이후 영주에 많은 교회가 문을 열게 되었다. 영주제일교회는 전통적으로 기도하는 목회자들이 많았다. 전쟁 직후 어려운 가운데서도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했던 목회자들이 계셨다. 초대 교역자로 시무하였던 엄응삼 조사를 비롯하여 김성억 목사와 허승부 목사도 기도의 목사로 유명하다.
2. 풍국정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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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국정미소(등록문화재제720-5호) |
| 영주 풍국정미소는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에 있는 근대산업시기부터 운영된 정미소이다. 2018년 8월 6일 국가등록문화재 제720-5호로 지정되었다. 오랜 역사를 덧칠해 놓은 것 같은 붉은 철문이 있는 풍국정미소를 살펴보자. 벼나 보리 등 곡식들의 껍질을 벗겨내는 도정 작업을 하는 곳이다. 광복로는 교통의 요충지로써 1930년경에는 경북 북부지역 미곡유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총 30여 개의 정미소가 있었으며 풍국정미소는 1940년경에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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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국정미소 내부 구조 |
| 많은 정미소 가운데서도 풍국정미소는 정부미 도정 공장역활을 하는 큰 규모의 정미소였으나 현재는 영업을 중단하고 있다. 이곳은 양곡 가공업의 생성과 양곡 유통의 역사, 정미소의 건축형식과 설비구조, 각종 도정기기 등 당시 정미소의 흔적이 잘 남아있어 기공과 곡물유통의 산업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풍국 정미소는 경북 북부와 강원도 남부 탄광지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거점으로써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정미소의 건축물은 80년 정도 되는 목조건물이다. 기계, 창고, 정미실 등 관련 시설들이 지금도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어 근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다음편에서 계속 |